수필

남한산성 서문을 나서며......

윤여설 2005. 12. 25. 15:26
 

 

남한산성 서문 설경
 


(기행수필 17매)


                          남한산성 서문을 나서며


                                                                              윤  여  설



남한산은 전체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른 이름은 낮이 길다고 하여 주장산(晝長山) 혹은 일장산(日長山)이라고 부른다. 최고지대에 위치한 수어장대에서 바라보면 날씨가 맑은 날은 동쪽으로는 여주와 서쪽으로는 인천 앞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또한 서울이 바라뵈는 서쪽은 경사가 상당히 급하다. 택리지에는 사람이 살만한 곳은 못된다고 적혀 있다.

서문을 나서면 양쪽으로 학이 날개를 펴듯 성곽이 펼쳐져 있고 발아래 잡힐 듯 다가오는 서울이 평온하다. 어찌보면 건물들이 밀집하여 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서울은 한강을 끼고 웅장하게 발전했다. 멀리 정면으로 북한산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도봉산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관악산이 자리잡고 있다. 항전과 비애와 수난이 서려 말없이 서울을 굽어보는 서문은 그날의 치욕을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오늘도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들만 즐겁게 오고 갈 뿐이다.

한국사에 가장 치욕으로 기록된 삼전도의 비극!

실리와 명분, 어느 것도 우열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치우친 외교나 처신은 손해를 보게 된다. 명나라는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광해 임금은 1만 병사와 조선국 도원수로 강홍립 장군을 임명하여 출병시켰다. 그는 명나라의 힘이 약해지는 걸 알고 기발한 밀명(密命)을 내린다. 상황에 따라 대처하라. 명의 전세가 불리하면 청에 투항하라고 명했다. 불과 얼마전의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구원병의 도움을 받은 조선의 임금으로서는 참으로 어렵고도 훌륭한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광해는 당쟁에 의해서 희생되고 말지만 외교와 정치는 조선의 어느 왕들보다 훌륭했다. 강홍립은 청과 싸우다가 명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청나라에 투항한다.  

병자호란(1636년)에 앞서서 정묘호란(1627년) 때에 선봉에서 조선을 진격한 사람이 강홍립이었다. 인조반정이후 이괄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나라로 달아났던 이괄의 잔당인 한윤(韓潤) 등을 통해서 자신을 총애했던 군주는 폐위되고 남은 가족들이 홀대받는 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격분한 강홍립은 청태종에게 조선을 정벌할 것을 간청했으며 조선 침략에 앞장을 서게 된 것이다.

1637년 음력 정월 그믐날 새벽, 인조(즉위15년)는 항복하기 위해 이 성문을 나서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폐주가 된 선왕의 실리 외교의 치적을 생각했을까? 인조는 정문인 동문으로 떳떳이 내려가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금의 청태종은 반대했다고 한다. 항복하는 주제에 무슨 정문이냐고. 정사(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민갓에 두루마기를 입고 이 서문을 나섰다고 한다. 밤에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이 험한 길을 뒤따르는 나인은 한 삼십여 명 정도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야사이기는 하지만 어느 궁녀의 작품인듯한 매우 사실적이며, 순 우리말로 적은 최초의 일기체인 ‘산성일기’에는 다르게 적혀 있다. ‘청의(淸衣)를 입으시고 서문으로조차 나가실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은 지는 모르겠으나 두 기록을 살펴 볼 때에, 인조는 익선관을 벗고 용포를 입지 못한 건만은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이 성문에서 지금 바라다 보이는 송파구 석촌동에는 대청태종공덕비(大淸太宗功德碑), 일명 삼전도비가 있다. 그 곁에 부조에는, 인조가 수항단(受降檀)에서 항복하며 청태종에게 삼배구고(三湃九叩)하는 모습을 조각해 놨다. 그러나 그 작품은 분명히 잘 못 되었다. 인조가 익선관에 용포를 입고 있다. 조각가는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역사의식이 결여되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치욕의 역사도 분명 살아 있는 역사이다. 또한 역사는 사실과 해석이다. 그러나 기록은 사진이라도, 수학 공식이 아닌 이상 공정한 사실일 수는 없다.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다. 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그 조각품은 다시 세우거나 없애야 한다.

그리고 좀더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아야 한다. 치욕적이었다고하여 우리가 사실을 왜곡하며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 영광스런 역사도, 굴욕의 역사도 역사인 것이다. 수난과 치욕은 우리만 간직한 역사도 아니다.

청나라 즉, 여진족은 세계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그들은 정복국가를 이루었으나 자기의 문화를 이루지 못하고 국제사회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자기의 삶과 문화를 지키며 민족국가를 이루고 있다

인조가 내려갔던 길을 따라 내려가본다.

생각보다 산세가 험하다. 인조는 눈길을 헤치며 걸어서 내려갔다고 전해진다. 바로 발아래 닿을 듯이 다가오는 마을이 오금동이다. 인조가 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오면서 오금이 저려서 쉬고 갔다고 해서 오금동이라는 유래가 전해져 내려온다.

인조는 패전의 군주로서 이 길을 내려가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인조는 분명히 목숨의 위험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백성과 왕실의 안녕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와 명분에만 치우쳐 청나라를 등한시한 외교의 전략과 전술의 실패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오금동 옆에는 문정동(文井洞)이 있다. 인조가 항복하러 가면서 잠시 쉬며 물을 마셨다하여 문정동이라는 유래가 전한다. 이것으로 봐서 인조는 매우 지쳐 있었으며 겨울이지만 갈증이 심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그 때와 같은 겨울의 그 산길이지만 눈은 쌓이지 않은 길을 내려오고 있다. 그날의 인조도 나인도 백성도 아닌 등산객으로 내려오지만 이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험한 산길이다. 여기에 눈은 내려 미끄럽고 정신적인 강박관념에 둘러싸인 하산길이라면, 인조는 매우 힘들고 스트레스가 심한 여정이 되었을 것 같다.

요즘 IMF에 시대에 접어들어 6. 25 이후 최대의 국난에 처해 있다고하며 일부에서는 경제의 신탁통치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좀더 외환 보유고에 신경을 쓰고 일찍 IMF에 대처했더라면 오늘처럼 마치 패전국의 대우는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민간 경제 연구기관에서 외화 위기에 대한 여러 차래 건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묵살되었다고 한다. 지금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이 길을 내려오면서 오늘 신문의 기사를 되새겨본다. 통치권자로서의 수치심과 실리.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이 길을 내려가서 오금동과 문정동을 거쳐 삼전도비까지 둘러볼 예정이다.

어디선가 백성들의 통곡과 나인들의 울부짖음과 인조의 흐느낌이 들리는 것 같다.

                                                      <1999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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