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도봉산의 가을

윤여설 2005. 12. 29. 12:56

 

도봉산의 가을

      -다락능선에서

 


   도봉산을 오른다. 울긋불긋 단풍도 화려하지만 계절에 따라서, 기분에 따라서 변화하는 산이 더욱 유쾌하고 흥미롭다. 단풍의 으뜸은 뭐니뭐니 해도 설악이겠지만 설악산을 당일에 다녀오기란 쉽지 않다. 단풍이 늦게 드는 내장산도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단순하게 붉게 물드는 단풍은 기암괴석과 어울리는 도봉산만은 못한 것 같다.


   관리사무소에서 다락능선까지 올라와 잠시 쉰다. 지도를 펴봤더니, 여기가 525고지 쯤 되는 곳이다. 오른쪽은 산 중턱에 걸려 있는 듯이 보이는 망월사가 잡힐 듯이 다가온다. 주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 동양화 속의 동양화요, 절경 중의 절경이다. 정면에는 포대능선이 절벽인가하면 열두폭 아름다운 병풍이요, 명화인가 하고 눈 크게 뜨면, 장엄한 기암괴석이다. 내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저 엄숙한 바위들! 약간 왼쪽으로는 도봉산의 주봉인 만장봉과 자운봉이 기세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한 자태로 다가 선다.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산은 바라볼 때마다 그 표정이나 느낌이 다르다. 봄에 바라보는 것과 가을에 바라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오늘 같은 가을이라도 구름이 낀 날과 맑은 날 바라보는 것은 천지 차이가 난다. 만장봉과 포대능선이 구름을 이거나 휘감긴 모습은, 어느 힘이 샌 청년이 그 비밀을 숨기고 은근히 드러내려는 것 같다. 삿갓구름이 걸려 있을 때는 산을 사랑하던 하늘 한 조각이 내려와 바위를 포근히 감싸고 애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같은 날이라도 시간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해를 받을 때의 희망차고 늡늡한 모습과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좀 더 여유가 있고 안온한 모습일 때와의 차이 또한 크다. 뿐만 아니라 나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산도 편한한 모습으로 다가서고, 내가 기분이 상한 마음으로 대하면 산도 토라져서 돌아선다.


   나는 얼마간을 만장봉과 포대능선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망월사를 바라봤다. 망월사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은 모두가 큰스님이 될 것만 같다. 저 경치가 그렇게 만들 것 같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은 부모의 피를 받지만 기게나 성격은 지세를 닮게 되어 있다.


   望月寺는 전국에 많이 있다. 그러나 도봉산의 망월사에서 바라보는 달은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달을 바라보며 스님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이미, 속세를 떠났으나 질긴 인연을 버리지 못해 두고 온 가족이나 연인을 생각하는 스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달을 바라보며 더욱 수도에 정진하고 중생을 구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거나 다짐을 하는 스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별 의미 없이 무연히 바라보는 스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목적으로 바라봐도 관계는 없을 것 같다. 빼어난 풍경 위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나쁜 생각을 하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망월사에서 보름달을 바라보고 싶다.


   다시 머리를 돌려 포대능선을 바라보았다. 어찌 바라보면은, 손짓하며 치마자락을 날리는 여성같기도 하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면은 굳건한 바위의 모습인 그저 돌덩이가 앞을 가로막을 뿐이다. 잠시 쉬었다가 차분한 마음으로 바라봤던니 자운봉과 만장봉이 그 작은 봉오리들을 부하들로 거느리고 바라보고 있다. 너무도 씩씩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나는 동료와 잠시 담소를 나누고 땀을 씻은 후에 다시 바라봤다. 이제는 분명한 조각품이다. 동양화도 아니요, 비경도 아니요, 씩씩한 남자도 아니다. 세계명작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어디 한 곳 흠잡을 수가 없는 완전한 작품이다. 포대능선은 특히 신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것이 틀림없다.
맞바래기의 나!


   다시 바라보며 다짐해 본다. 자연앞에 미미하기 그지없고 지금 붉게 지는 낙엽만도 못한 내 삶. 낙엽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았으며 결코 거슬리거나 남에게 불편한 짓을 한 일이 없을 것이다.
탐욕과 애증으로 가득한 나의 삶.


   지금 저 산 앞에서, 삶을 마감하는 낙엽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 본다. 완전한 삶을 살 때는 언제일까? 죽은 뒤일까? 아니다. 살아서 완전한 삶을 살고 싶다. 자연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누구라도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다. 이 풍요로운 가을에......

( 2001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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