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불신의 시대

윤여설 2005. 12. 25. 15:30
 

 


(수필 15매)

                               불신의 시대



                                                                              윤  여  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를 믿지 못했을까?

모두가 보이지 않게 감시당한다. 도로에서, 은행에서, 현금 인출기 앞에서, 백화점 매장에서, 병원 로비에서, 지하철 플랫폼에서. 어디든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우리를 노려보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증폭된 반목. 은행 같은 금융기관은 사람의 눈에 잘 띠는 객장에 설치되어 신이라도 포착할 듯이 기세 등등하며, 아예 ‘이곳은 감시용 카메라가 녹화 중입니다.’ 라고 경고문을 써 붙여 놓았다. 또한 사람들이 눈치를 못 채는 장소에 설치된 곳도 있으며, 너무 소형이라서 전혀 알 수 없는 카메라도 있다. 나는 가끔 현금인출기 앞에서, 분명히 숨어 생쥐눈처럼 노려보는 카메라를 찾아볼 때도 있다. 주위가 온통 서로를 믿지 못하는 위기의 불신으로 널려 있다.

더욱 문제는, 불신이 또 다른 불신을 낳는 데에 있다. 감시용 카메라가 설치 목적과는 달리 정당하게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사생활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자비하게 노출되고 있다.

백화점 화장실에 설치된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경영하는 비디오방의 고객들을 녹화해 유통시키는가하면 치과의사가 간호원들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녹화해서 말썽을 빚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개인의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어야 하는 병원에서, 환자의 동의 없이 진료장면이 녹화되는 일도 있었다. 마치, 삼 차 세계대전을 예고했던 조지 오웰의 소설 ‘천구백팔십사 년’처럼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감시를 당하고 있다. 그 소설에는 텔레비전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비밀리에 안방이 감시되고 있었다.

현실은 그 상황보다 더욱 불신을 사고 있는 것 같다. 어느 곳도 자유롭다고 볼 수가 없다. 믿음이 없는 반목의 질시는, 이제 부부 사이도 감시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피로 맺혀진 부모 자식간에도 살인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험악한 사회를 개선할 길은 없을까. 이 테크노적인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분명히 종교는 번창하고 있다. 한 집 건너면 교회요, 또 한 집 건너면 법당이고 또 한 집 건너면 다른 종교 시설이다. 밤에 바라보면 주택가에도 교회의 소탑들이 벌겋게 수놓고 있다. 그러나 범죄는 그 수에 비례하듯이 늘어나고 있다.

서로를 불신하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을 모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서로 모르는 것은 대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화가 부족한 것은 산업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고도의 분업과 이익집단끼리만 접촉하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이 사람 사이에 맹수 근성만 표출하게 했다.

조물주는 인간을 선과 악을 동시에 겸비하도록 만들었다.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인격(생각+느낌+행동)은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조합되어 결정된다. 생물학에서는 유전를 중요시하고 심리학에서는 환경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요즘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다. 환경과 교육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자신에게 피해가 없는 한은 절대적으로 온순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무감독 시험을 보았고 무인 판매점이 있었다. 시험시간이면, 반장은 교무실에 가서 문제를 가져다가 나누어주고 스스로 시험을 본 후에 시간이 끝나면 걷어서 교무실에 제출했다. 그러나 조그마한 사고도 없었다. 가끔 교장선생님께서 복도로 순찰을 하셨지만 부정 행위자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인판매점 뒤에는 대형 거울이 걸려 있었고 “거울에 내 마음을 한 번 비춰봅시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물건을 꺼내고 서랍에 돈을 넣을 때마다 누가 뒤에서 바라보는 것 같았고, 내가 계산을 잘못해서 돈을 적게 넣는 건 아닌가 하고 마음을 조리며 몇 번을 다시 계산했다. 나는 그때에 학생주임 선생님과 함께 무인판매점을 관리하고 있었다. 삼 일에 한 번씩 마감할 때에 계산을 해보면 판매대금보다 돈이 꼭 몇 십 원씩 남았다.

요즘 동사무소에서 인지값을 본인이  직접 계산해 바구니에 넣고 거슬러 가고 있다. 액수가 적어서 일까. 아니면 스스로의 양심 때문일까. 마감을 해보면 돈이 남는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곳에 그렇게 자신의 양심에 맡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수는 없는 일일까. 다른 관공서나 공기업에서도 시도해 볼만한 일이다. 예를 들면, 지하철표를 구입하는 데도 지금처럼 역무원이나 자동판매기에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회권 정도는 스스로가 진열대에서 표를 구입하고 거스름돈을 가져가는 등의 방식을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선함을 내보일 수 있는, 그런 곳이 늘어가야만 이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건강성을 회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어떤 종교나 모랄리스트의 외침만으로는 이 사회를 구원하기는 어렵다.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다시 인간 내면에 고유의 성선(聖善)함을 이끌어 낼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결코 맹수만이 아님을 자각하게 해야 한다. 인간인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선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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