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호의 "씨뿌리는 사람"

윤여설 2006. 1. 21. 00:32
 

 

 

  황혼의 들녘에서 커다랗게 지는 금빛 해를 뒤로하고 다부진 농부가 파종을 한다. 왼손에 바구니를 안고 오른손으로 씨앗을 뿌리며 가고, 그 뒤로 까마귀 몇 마리가 앉아 있다. 그리고 멀리 주택이 보이고 그 주택 아래는 아직 수확이 덜 끝난 곡식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다. 이모작을 하는 밭인 것 같다. 배경이 아주 환하고 평화롭다.

  오직 그림만을 위해 생을 바친 화가 고호. 그는 무엇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그렸을까?
외국의 화가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화가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 고호를 꼽고 싶다. 나는 이 모조품을 식탁 유리 아래에 넣어놓고 매일 바라본다.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 고호는 자신의 작품이 어느 쓸쓸한 시인의 식탁에 놓여질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아니, 그의 영혼이라도 있으면 자신의 작품이 이렇게 사랑받는 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나는 식사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며  농부의 고마움에 대해서 감사한다. 그들이 아니면 지금 나의 식단이 이렇게 조촐히 풍성할 수 있을까. 
  농부는 어느 나라나 뙤약볕 아래서 고생을 한다. 또한 세계 공통적으로 소외를 받는다. 벼 알알이 농부의 땀방울이라는 한시(漢詩)도 있다. 지금 농부는 저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파종을 마치려는 듯 표정이 바쁘기만 하다. 어딘지 다부지고 강직하면서도 근면한 표정의 동작이 사실적이다. 

  사실 어떤 때는 나도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볼까. 하고 쉽게 귀농을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농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내가 시골에서 결정적으로 떠나온 것은 빈농에서 태어났기도 하지만 어떤 해의 여름날이었다. 보리를 공판(共販)하려고 넓은 마당 가득 멍석을 펴고 건조시켰다. 뙤약볕에 잘 말리면 내일은 출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금세 사방이 어두워지고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온 마을이 떠내려가도록 내리는 것이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미처 거두지 못한 보리를 물에 떠내려 보냈다. 허탈감에 하늘을 원망할 틈도 없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으면 할말을 잊는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마당에서 떠내려가는 보리를 보면서 어쩌지 못하는 아쉬움에 그 비를 다 맞았다. 심을 때나 거둘 때도 기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직업이 농부다. 

  그 뒤로 나는 농사는 짓지 않겠다고, 농부는 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도시에서 생활을 하면서 식사 때마다 이 한 톨의 쌀을 생산키 위해서 농부들은 얼마나 많을 땀을 흘리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특용작물 재배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농부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일한만큼 대가를 가장 받지 못하는 것이 농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농사일도 많은 보람을 느낀다. 이른 아침에 이슬을 떨며 논에 가보면 어제 보다 벼가 분명 더욱 푸르르고 키가 자라서 깃을 더욱 높이 씩씩하게 펼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알알이 배가 불러와 통통해지며 머리를 숙이는 노란 벼를 보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마음 속에 뿌듯한 그 무엇을 느끼게 한다. 마치 자식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흐믓하다. 흙보다 진실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외롭고 무겁기만 한 것이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고호가 그 농부의 씨뿌리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은 농부의 근면성과 땀의 기쁨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맨발에 어딘지 다부지고 부지런한 농부가, 저 해가 지기 전에 파종을 완료하려는 표정이 훈련소의 신병처럼 매우 씩씩하고 절도 있는 모습이다. 

  그림만을 위해 살다가 간 불멸의 고호! 
  그는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에 애정을 가지고 그린 작품이 많다. 이 작품도 농부의 부지런함과 그 성실성을 전부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밝게 노을 진 태양과 과 주위의 어두워 오는 땅거미가 매우 잘 조화를 이룬다. 파종하는 모습을 그린 것은, 아마도 석양과 파종을 대비시켜 탄생의 신비를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본인은 의식하지 않고 그렸지만은 무의식중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는 해의 풍경과 씨 뿌리는 농부의 모습이 존엄한 조화를 이룰 수가 있을까?
  심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살아서는 단 한 작품밖에 팔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고호.  
  자신의 작품이 어느 평범한 가정의 식탁 유리 아래에 놓여져,  땀과 노동의 기쁨을 느끼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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