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떼꾼의 삶(정선 아우라지에서)

윤여설 2016. 5. 13. 22:45


                                          

                     떼꾼의 삶

                                        (정선 아우라지에서)

 

 

                                                                                                                      - 윤여설 시인



 

   골천과 송지천에 만나서 어우러진다고 해서 아우라지의 지명을 만들어낸 5월의 정선은 매우 화창하다, 어제 비가 내린 뒤라서 파아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수련한 산들이 어우러져 한폭의 잘 그려진 동양화를 자아내고 있다.

 

   이 곳은 70년대까지 이어졌던 뗏목이 엮어져 강물을 따라서 서울로 운송되던 시발지이다. 강변 곳곳에 유래를 알리는 노래비와 안내석이 서 있다. 온갖 애환을 함께 엮어 떠나가던 정선 땟목!

아우라지 뱃사공아 ......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정선아리랑도 이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 유일한 교통수단은 나룻배였을 것이다. 강물이 불어나 배가 다니지 못할 때 건너편에 사는 님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봄부터 서울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한 뗏목은 늦가을까지 계속 되었다. 이 곳을 떠나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도달하는 데는 닷새에서 열흘이 걸린다고 한다. 장마로 물이 불어난 여름철은 하루 반나절이면 도착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매우 위험해서 거의 띄우지 않는다고 한다.

 

   “떼돈 벌었다.”는 말이 있듯이 떼꾼들이 품삯은 쌀 다섯 가마정도로 당시는 매우 큰돈이었다. 당시 건장한 머슴의 일 년 새경이 쌀 열두 가마였으니, 두 번만 뗏목을 타면 거의 1년분의 돈을 버는 셈이다. 그 중엔 안정된 삶을 산 떼꾼도 있었으나 대부부은 피폐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아침밥이 사자밥이라는 말이 있다. 떼꾼들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밤이 되면 나룻터에 뗏목을 묶고 객주에 머물면서 대부분이 탕진하기 일쑤였다. 뗏목을 타는 일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선에서 서울까지의 물길은 매우 위험한 곳이 많았다고 한다. 한해에도 떼꾼 4~5 명씩 희생됐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몰고 가는 뗏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손수 체험하는 떼꾼들의 여정은 심한 스트레스와 긴장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쉬는 밤이 되면 당연히 술이 필요했고 여자가 따랐을 것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강 천이백 리 뱃길은 수백 개의 나루터에 객주가 즐비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수운업(水運業)이 잘 발달되어 작은 포구가 형성된 곳이 많아 인천 등지에서 올라온 소금배나 일용품들이 거래되곤 했다,

   더욱이 객주집엔 떼꾼들을 노린 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이다 보니, 아침을 먹고 떠나는 떼꾼들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혹시 그말이 징크스가 되어 목숨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뗏목을엮을 때는 부정을 탄다고 여자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뗏사공을 하려면 불알이 여물어야 한다.”는 말이 떼꾼들 사이에서 생겨나기도 했다. 그만큼 건강해야 뗏목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정에 지친 떼꾼들은 객주에서 머물면서 주모(갈보)들에게 정선아리랑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흔치는 않았지만 떼꾼과 눈이 맞은 여자들이 이른 새벽 몰래 뗏목을 타고 도주해서 충청도나 경기도에 떼꾼들과 딴살림을 차린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주모들 사이엔 자주 쉬고 가는 떼꾼들과 안면이 익어 어젯밤에 어떤 떼꾼들과 잤는지 알 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침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갈보들의 걸음걸이를 보면 안다고 한다. , 그들 사이엔 속칭 어떤 떼꾼이 변강쇠인지 알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도 야한 말들이 오갔을 것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한강이 되는 두물머리(양수리)에 뗏목이 당도하면 강가의 객주들은 배에 술과 여자를 싣고 장구를 치며 접근해서 떼꾼들을 유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지역의 물살이 급하지 않아서 속도가 느리고, 오고 가는 배들이 많아서 뗏목이 서로 엉키지 않도록 쉬어간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도 없지만 두물머리의 나루터는 밤이면 흥청거리며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주막 한 곳에 스무 명 정도의 여자들이 기거하며 뱃사공이나 떼꾼들을 상대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봐도 매우 규모가 큰 유흥업소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팔당을 거쳐서 광나루터나 노량진 혹은 마포에 도달한 뗏목은 해체되어 주인에게 팔려갔으며 주로 한옥을 짓는데 사용됐다.

 

   수많은 애환과 사연을 안고 70년대까지 간간히 뜨던 뗏목은 충주댐과 팔당댐이 완공되면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또한 강변의 나루터를 따라서 번창했던 주막도 모두 사라졌다. 다만, 이포나루터 정도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가 있고 팔당댐의 수청나루터에 지금도 나룻배(동력선)가 운행되고 있을 정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아우리지는 이제 뗏목도 떼꾼도 없다, 관광객들과 소풍온 학생들만 북적인다. 다만, 이 곳이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는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으며, 당시의 뗏목과 나룻배가 전시되어 있어 그 옛날의 추억과 애환을 전할 뿐이다. 그리고 강변엔 목수들이 나룻배를 짓고 있는 손길이 분주하다.

 

  지금 강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처녀동상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직도 뗏목을 타고 떠난 님을 기다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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