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글고비

윤여설 2018. 1. 6. 15:41


                                                                                                 (묘지에 세운 모조 비석임)


                                        한글고비에서

                                                                                    < 효심의 극치>

 

   

 

                                                                                                                                 - 윤여설 시인

 

   

 

   이것은 신령스런 비석이다. 이를 범하는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보물 제 1524)

 

   서울 하계동 산 12번지. 나지막한 산자락의 무덤 앞에 평범한 묘비가 서 있다. 그런데 이 묘비는 오른쪽 옆면에 독특한 한글의 비문이 써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중세 한글체 비문이다. 또한 초기 한글서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이 비석은 1536년 묵재 이문건이 조선 중종 때 승문원 부정자를 지낸 아버지 이윤탁의 묘를 어머니 고령 신씨와 합장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을 보통 영비(靈碑)라고 부른다. 이윤탁의 묘는 원래는 지금의 태릉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태릉이 조성되면서, 아버지 이윤탁의 묘를 이장해서 이곳의 어머니 묘와 합장한다. 국가 권력에 의해서 아버지 묫자리를 빼앗기고 부모님 묘를 합장해서 조성한 이문건은 이제 다시는 묘가 이장되거나 사람손에 의해서 유실되는 것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

 

   이문건은 나름대로 어떡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까 번민 끝에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된다. 당시는 한자가 모든 공문이나 통용문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글이 창제된 지 90년이 되던 해이다. 아직 한글은 암글혹은 언문이라고 비하하며 하층민이나 부녀자들이 서간문 정도로 사용되던 시대였다.


   한글로 비문을 새기면서 신령한 비석이고, 범하면 화를 입고, 글 모르는 사람게 알린다.’ 라고 적었다. 이문건은 한글이 쉽고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이 비문 내용에 진실은 부모의 묘를 지키기 싶은 아들의 효심이 적혀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긴 전에는 이 지역 주민들은 신령하다고 해서 이 비석에 금줄을 두르고 치성을 드리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지역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묘가 위치한 자리에 4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묘를 또 한번 옮겨야 할 처지에 놓인다. 국가와 문중(성주 이씨)은 많은 고뇌를 하게 된다. 문중은 종중묘가 있는 온양으로 이장을 결정한다. 이번엔 국가에서 반대를 했다.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문화재는 원위치에 보존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숙의 끝에 묘를 원위치에서 뒤로 15m를 옮기고, 도로가 개설되고 묘가 있던 자리는 표지석을 묻었다. 아들의 뜻과는 달리, 묘는 다시 옮기게 된 셈이다. 하지만 뒤로 15미터만 이전하게 돼서 아들의 뜻이 조금은 반영됐다고나 할까?


   처음에 묘를 이장하려고 할 때, “범하면 화를 입으리라는 비문 때문에 아무도 이장에 참여하지 않으며 인부들도 꺼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장한 뒤에 화를 입은 사람이나 문화재청 직원들은 없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했던 이문건은 서예에 능했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하는 삼경일제/일지춘심 자규야 알랴만은/다정도 병인양하여 잠못이뤄 하노라라는 시를 남긴 -이조년의 후손들이다.

 

   불암산 끝자락에 위치한 이 지역은 앞에 노원평야가 펼쳐지고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위치한 넓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풍수상 길지로 뛰어난 곳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가득히 숲을 이루고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이 지역에 도읍을 정하려고 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부모의 묘를 평안히 모시고 싶었던 이문건은 분명히 명당을 찾아서 묘를 조성했을 것이다. 묘를 쓸 때에 가장 주의할 점이 앞으로 묘가 이장되는 조건이 없는 땅을 택하는 것이다. 부모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묘가 다시는 옮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명당은 없다. 다만, 참된 효심만 존재할 뿐이다.


    이제 한글은 우리 민족 말고도 아프리카 수단의 미우리족과 콩고공화국의 수발리족, 인도의 찌아찌아족이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소리글자인 한글의 우수성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한글고비 앞에서 가을이면 한글백일장이 열리곤 한다. 묘지 훼손을 염려한 이문건의 효심은 한글발전에도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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