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왕자의 난 -이방석의 묘에서

윤여설 2015. 11. 9. 16:29



 



왕자의 난



 

                                       - 의안대군 방석의 묘에서

 

                   

                                                                         - 윤여설 시인



 

     권력은 무엇이고 임금의 자리는 어떤 위치일까?

     과연 피로 맺여진 형제도 무참히 살해해도 되는 건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지나친 권력이나 재물(자본)은 비켜서 생활하는 것이 평생 무난한 삶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 산 152번지 남한산성 동쪽 자락의 양지바른 언덕에 의안대군 이방석은 고이 잠들어 있다.

     조선왕조 대군의 묘치곤 규모가 작다. 부부의 묘제인데 앞엔 방석의 묘이고 뒤엔 부인 심씨가 잠들어 있다. 묘의 형태가 좀 독특하다. 직사각형의 둘레석이 있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이 조성된 매우 보기 드문 고려의 묘제를 택하고 있다. 아직 조선이 건국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고려의 풍습이 남아서 일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저 어린 16살의 소년이 이복형(태종)에게 무참히 살해됐어야 할까?

     태조 이성계는 5남인 이방원의 도움을 받아 조선을 건국한다. 정안군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라며 무너져가는 고려에 충절을 보이던, 이성계의 정적인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는 등의 큰 공을 세운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등 공신인 이방원은 당연히 세자가 될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방원은 공신에도 끼지 못했다. ? 이성계는 이방원을 세자로 삼지 않고 이복동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까? 이성계도 세자를 책봉하는 데에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여러 사극에서 이 점을 조명해보려고 노력했다.




    분명히 조선 건국공신인 방원은 세자로써의 지위 획득엔 문제가 없었다. 이성계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심은 이방원을 두려워 했을 것이다. 그의 포악한 성격을 백성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으로 이성계는 권력에 전혀 때가 묻지 않은 막내인 7남 방석을 새자로 책봉했다. 물론, 방석의 생모인 선덕왕후 강씨의 입김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분명 잘못 판단한 것이다. 자신이 쿠데타로 조선을 건국하며 권력의 속성를 잘 아는 그가 어찌해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의문이 든다. 커다란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더욱이 방원의 성격을 잘 아는 그가 이방원을 살려두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마치 권력을 향한 사자(방원)에게 강아지(방석)를 던져준 꼴이 됐다.

   방석의 세자 책봉은 방원에겐 거의 죽음을 강요받은 것과 같았을 것이다. 또한 고려의 멸망을 주도하고 지켜본 이방원이 살 수 있는 길은 자신이 왕이 되는 길 외엔 없었을 것이다.  방원은 이숙번 등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불의에 급습하여 살해하고, 이에 대항하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세자인 방석과 그의 동모형 방번도 아울러 살해했다. 결국 방원은 자신과의  정치적으로 대결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라고 한다.

   이성계가 차라리 유교의 전통에 따라서 장자 우선의 법칙에 의해서 장남을 세자로 책봉했으면 왕자의 난은 어느 정도는 막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방원은 부왕인 이성계가 물러나자, 장자승계를 내세우며 자신은 왕위에 관심이 없다며 둘째 형인 방과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그가 조선의 2대왕인 정종이다. 정종은 2차 왕자의 난을 겪은 후에 권력다툼에서 완전히 밀려나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하며 왕자의 난을 끝을 맺는다.

태종 이방원의 뒤를 이은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지으며 해동육룡에서 정종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자신의 직계조상이 아닌 백부였기 때문이다. 권력은 이처럼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요즘도 어느 재벌에서 왕자의 난이 진행 중이다. 또한 이와 유사한 한국의 재벌 가계도들이 많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계가 세자책봉에 실패했듯이 권력과 재물 앞엔 형제도 부자도 없고 오로지 힘과 자신의 이익만 존재할 뿐이다. 더욱이 윤리와 도덕은 거론조차 할 수가 없다. 오로지 힘만이 윤리이자, 도덕이 된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왕자의 난을 막으려면 후계자를 지명할 때, 관습권적인 장자나 공적자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는 그 이유를 자녀들에게 잘 설명하고 또한 동의를 받아야 가문의 추한 우세를 면할 수 있다.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은 방석의 모후이자, 자신의 계모인 강씨의 묘를 지금의 영국대사관에서 파묘해서 옮겨버린다. 그리고 능의 석물은 청계천의 홍수로 무너진 장통교를 개축하는 데에 사용해서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도록 했다. 청계천의 복원과정에서 장통교의 석축에 왕능에 쓰였던 십이지장상이 발견되어 사실임이 밝혀졌다. 이방원이 강씨에 대한 적개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잠시, 묘소 주변을 뒤돌아 본다.

   엄미리 계곡은 그날의 처절한 형제간의 칼부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풍이 곱게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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