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을 담으며
- 윤여설 시인
붉은 카펫을 펼친 듯이 물드리며 번지는 서쪽 하늘의 노을은 장엄하다 못해 엄숙하다. 저 충실한 하루를 마감하는 해. 초겨울은 노을의 계절인가 보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얹고 구도를 잡아 지는 해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세팅을 마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셔터를 누른다. 렌즈 속의 노을은 더욱 아름답다. 마치 숲에 드는 것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산이 더욱 아름답듯이 ......!
내 고향 충남 논산도 노을이 아름답다. 곱다. 언덕에 서서 지는 해를 무연히 바라보던 유년. 어느 시인이 자신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듯이, 나를 키운 건 구할이 자연일 것이다. 앞산에 뛰놀며 새집을 보고 생명의 신비를 체험했고 단풍을 마라보며 색감을 익히고 눈 덮힌 논에 새그물을 치며 겨울을 났다.
가을이면 유난히 붉은 노을. 논산의 고유지명은 놀뫼(山)이다. 즉, 노을이 지는 산이다. 논산 평야 끝 나지막한 산머리로 지는 해를 보며 지은 이름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지명을 조사하며 한자식으로 놀은 논(論)으로, 뫼(山)는 산으로, 바꾸어서 논산(論山)이 됐다. 이런 한자식으로 바꾼 우리나라의 지명이 거의 모두이다. 해방 70년이 지났다. 속히 고유어로 바꿔야 할 것이다.
도시의 생활은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 그저 밝음과 어둠 그리고 시간으로만 가늠한다. 또한 일출이나 일몰을 유심히 바라볼 여유도 없다. 그리고 도심의 건물들이 노을을 조망하기에 적당치 않은 지역도 많다. 일부러 해를 바라보지 않는 한은 그냥 지나친다. 심지어 지하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해를 위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서 생활에 별 지장이 없다. 그럼으로 자연은 더욱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도심에서 자연을 잘 관찰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사회가 많이 순화됐을 것이다.
해가 산이나 나무에 걸려서 지는 것이나 아파트 머리에 걸려서 지는 모습이나 모두 감동적이다. 모두가 아름답다. 자연은 순수하고 아무에게나 평등하기 때문다. 지금 앞 동 아파트를 건너서 열벙합 발전소 굴뚝에 걸려 지는 해는 매우 환상적이다. 굴뚝에 걸린 석양이, 좀 해학스럽다가 연기에 가려지며 태양의 안색이 흐려지는 걸 보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진을 예술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어느 문학 교수가 있었다 그 노(老) 교수는 늘 “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은 사실을 담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예술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니다.
사진은 얼마든지 예술이 될 수가 있다. 사실을 담는 것은 기본이고, 구도와 빛의 양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얼마든지 눈으로 보이는 현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
눈으로 보이는 것 외에 여러 가지 상상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심지어 동일한 피사체의 과거와 현재를 한 장에 오버랩시킬 수가 있다. 이제 사진은 사실이 아니라 창조다.
(다중 노출)
사진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나만의 세계, 나만의 독특함, 나만의 빛깔”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사실! 수많은 프로 사진가들이 넘쳐나는데 내가 마땅히 담을 만한 피사체는 없었다. 다만, 남의 표절일 것 같아서 고심했다.
사진가라면 누구나가 한번쯤은 노을을 담고 싶어한다. 그러나 석양을 다중노출로 담는 것도 만만치는 않다. 먼저 스케치하듯 백지에 구도를 그려보고 오늘의 날씨 예보를 살펴보고 해가 지기 한시간 전부터 삼각대를 설치하고 해를 조망한다. 조리개와 시간 그리고 여러 가지로 세팅을 바꿔가며 셔터를 누른다. 상황에 따라서 화가가 붓을 바꾸듯이 렌즈를 교환하기도 한다. 또한 해가 지는 속도가 집중해서 바라보면 매우 빠른 편이다. 바삐 움직여야 한다. 내가 원하는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서 보통 50번 정도는 셔터를 눌러야 한다.
몇 번은 즐겁고 행복했으나 계속 반복되는 일은 매우 고단한 작업이다. 더욱이 모든 사진은 해를 등지는 순광일 경우는 별 무리가 없이 잘 담을 수가 있다. 그러나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역광일 경우 카메라의 세팅이 매우 곤란하고 어려워 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의 피로가 매우 높다. 짙은 선글라스를 써도 매우 고통스럽다.
어떤 사진이 좋은 작품일까?
답은 없을 것이다. 내가 좋으면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평가로는 독창적이고 개성이 강한 사진일 것이다. 즉, 구도가 고정된 피사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변화가 가능한 크레이티브적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사진의 고전적 정의인 사실의 전달과, 피사체 모양 그대로를 변형으로 표현하는 일일 것이다.
(2018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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