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및 유적답사

을축년홍수기념비와 암행어사 이건창의 비

윤여설 2006. 8. 20. 15:43

 

 

두 비석은 송파구 송파동의 송파 1치안센터 왼쪽에 있다. 그 옛날 송파장터가 위치하던 곳이다.

 

 

  을축년 홍수는 대단했다. 한강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홍수전에는 지금 한창 재개축 사업을 하는 시영아파트 자리와  석촌호수를 거쳐 곡선을 이루며 한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광나루에서 강변역쪽으로 직선의 한강물줄기가 형성되었다.

 

 

       을축년 홍수 전의 잠실 주변! (조선일보)

 

 

 

암행어사 이건창의 학문과 사상

 

   그는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을 계승한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에 속했다. 그의 선대인 이광신(李匡臣)·이광사(李匡師)가 정제두의 제자였으며, 이들의 학문은 그의 고조부인 이충익(李忠翊) 및 종형제 이긍익(李肯翊)·이영익(李令翊), 할아버지 이시원 등을 통해 그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성대영(成大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순 이래 마음을 떠나서 도를 말한 자가 없고, 공맹 이래 도를 떠나서 경을 말한 자가 없다"고 하여 유학은 진실로 심학(心學)임을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도(道)와 심의 일치를 주장했고, 자획·음운의 고증을 기본으로 하는 청대의 고증학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홍승헌(洪承憲)과 의리의 출처를 논하면서 우리 몸이 의리를 결정하는 것이며, 우리 마음이 의리를 밝히는 것이라 하여 양지론(良知論)의 요체로서 의리를 설명했다. 또 성(誠)은 실리(實理)이고, 실리의 소재는 곧 실사(實事)가 말미암은 바가 되므로, 실리가 내심에 없다면 실사가 성립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그는 양명학파의 전통대로 실심(實心)·실리를 강조하고 허명(虛名)을 배격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철저한 척양척왜(斥洋斥倭)로 일관했던 밑바탕에는 이와 같이 실을 강조하는 사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의 실심이 부강실효(富强實效)의 바탕이 되는 것이지, 다른 나라에서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그른 일이라고 하여 개화사상을 극력 반대했다. 그의 문필은 당대의 청나라 문장가들이 극찬할 만큼 뛰어났다. 한말의 문장가이며 시객(詩客)인 김택영(金澤榮)은 그를 여한9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기사문(紀事文)에 능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당의통략〉·〈명미당집 明美堂集〉 등이 있다.

 

 

<두 비석 모두 길가의 화단에 보는 이 없이 쓸쓸히 서 있었으나,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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