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파트의 입춘

윤여설 2006. 3. 24. 17:37
 

                                                                                          (유재호작  백운산에서)

 

 

 


                                  아파트의 入春



                                                             윤 여 설



누가 자꾸만 부르는 것 같아 창문 열면 온기 어린 바람만 애교스럽게 스치고 간다. 어쩐지 서재에서 책을 읽기에는 사춘기 소년으로 되돌아 간 것처럼 답답하고 컴퓨터에 앉아 그 동안의 글을 정리하기에는 무언가 아쉽고 좀 따분하다. 방에만 있기에는 손해보고 물건을 판 상인마냥 허전하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지가 있어 외출할만한 곳도 없다.

몇 번을 실내에서 서성이다가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려고 일어났다.


                                            *


                                       1. 이삿짐차


도시의 봄은 이삿짐차로부터 오는가 보다.

고층 아파트 창턱에 걸치고 분주히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다리차에 얹혀 가재 도구들이 운반된다. 오늘이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여러 곳에서 이사를 간다.

나도 일곱 번의 이사를 했다. 언젠가 이사할 때였다. 전세 계약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잔금을 받아 바삐 떠나는데, 후사등에 무엇이 어른거려 자세히 봤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옆집 앞니 빠진 아이와 차를 쫓아 뛰어오는 그집 검둥이가 보였다. 그들과 친숙하게 든 정과 눈감고도 훤한 그 골목의 역겨운 추억들은 싣지 못하고 떠나왔다. 근무처와 거리가 멀어 빨리 이사가기를 원한 동네였는데도 막상 떠날 때는 허전했다. 지금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라도 이삿짐차가 떠나는 것을 보면 조금은 쓸쓸하다.

이사 들어 오는 짐차에 봄이 실려오는 것 같다.


                                            *


                                        2. 놀이터


어디선가 아침햇살같이 아이들 웃음소리가 울려퍼져 뒤돌아 보면 그동안 허전하던 놀이터가 모처럼 아이들로 가득 넘친다.

지금 IMF시대라고 나라가 어수선하지만 저들의 환한 얼굴과 밝은 웃음소리를 대하면 우리 나라의 미래는 밝기만 하다.

지난 겨울. 아내가 운영하는 학원에 난방기구를 설치하러 갔더니, 아저씨 나라 경제가 어렵대요, 우리는 추워도 견딜 수 있어요. 라고 말하던 아이들이다. 국가 경제사정 때문에 아이들이 위축될까봐 나름대로 염려를 했었다.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 근심걱정이 모두 사라진다.

같이 뛰어놀고 싶구나!

분주히 뛰는 아이들과 같이 움직이는 그림자에 봄이 어려 있다.

  

                                           *

                                     3. 산수유 나무


오늘 따라서 어쩐지 남풍에 자꾸만 몸을 뒤척이는 화단의 나무들에게 눈이 간다. 저들은 지금 분명히 요 며칠 전과 다르다. 아주 천천히 생동감 있게 그러나 약간 푸른 색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그 어느 해보다 추웠던 한파를 알몸으로 견디더니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나무는 겨울에 옷을 벗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면벽하는 수도승처럼 전혀 변화 없이 한겨울을 견디는 걸까.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늘의 별을 우러러 마음을 닦고 언 땅속에 실뿌리를 뻗어 진리를 찾아 해탈을 했을 것이다. 저들은 그렇게 체력단련을 했기에 건강하게 봄을 맞는가 보다. 팔을 벌린 가지마다 하늘을 우러르는 눈들에게서 벌써 봄이 머물고 있다.

바짝 다가서자 산수유가 초경을 하는 아이의 젖몽오리마냥 노란 꽃봉오리가  부풀어 올랐다.


                                          *


                                  4. 자꾸만 움직이는 내 마음


좀 진부한 말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봄은 여인들의 옷자락에서 온다.

분명히 엷어지고 밝아진 색상들이 시선을 끈다. 사십 대 이전에는 여자가 여자로만 보일뿐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분명 정신 연령은 아직도 삼십 대를 헤매는 걸까. 아직도 젊고 화사한 여인들에게 눈길이 자주 가는 걸 보면. 그러나 한해가 다르게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를 어쩌겠는가. 젊은 여인을 보면 그저 아름답구나로 끝나지 예전처럼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자신도 잃어간다. 이것이 철이드는 걸까? 늙어가는 걸까? 그러나 오늘도 살며시 꿈꾸어 보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 아직은 사십 대 초반의 가슴에 피는 여전히 덥구나. (1999년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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