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여름밤의 수박

윤여설 2006. 2. 14. 09:00

   

 

    올 여름의 무더위는 유독 맹위가 심하다. 건성장마가 지나간 뒤에 게릴라성 폭우가 전국을 순회하며 강타하더니 폭염이 몇 주째 계속 된다. 말복이 지났지만 올 들어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다.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열대야가 온 도시를 계엄령처럼 짓눌러, 잠들었다가도 그 짧은 밤에 몇 번씩 깨곤 한다. 낮에 열을 흡수해 비축한 콘크리트 건물들은 밤에는 마치 축전지처럼 열기를 방출한다. 그 정도가 지나쳐서 냉방기가 없이는 잠들 수 없을 정도이다. 한강변에 나가보면 강가에서 돗자리를 펴고 잠든 경우도 많다. 또한 밤이면 공원이나 골목의 구멍가게 앞의 파라솔 아래라든지, 어느 곳이든  가족끼리 이웃끼리 연인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음료수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눈다. 사못 그 모습이 정겨움을 넘어 안타깝기까지 하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줄줄 흐르는 땀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온 도시가 거대한 사우나탕 속 같다. 냉방기를  켜고 자면 우선은 시원할지 모르나 자고나면 몸이 찌부둥하고 영 기분이 상쾌하지 않다. 또한 매년 반복되는 냉방병을 올해라도 피해보고 싶다. 차라리 그냥 자는 편이 낫다. 잠시 일어나 앉았다가 다시 누웠다. 간간히 밖에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어둠을 흔든다. 
  
    눈만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짓누르는 더위를 어쩔 수 없어 다시 일어나서 아파트 단지 주위를 산책했다. 자정이 지난 한강변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 뒤를 따라 모처럼 나온 강아지가 즐겁게 뛰어놀고 있다. 가볍게 걷기만 해도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다. 난생 처음 맞는 더위 같다. 이 상태로는 집에 가도 잠을 잘 수가 없을 것만 같다. 차라리 강변의 벤치에 앉아 좀 졸다가 가면 어떨까! 잠시 앉아서 꾸벅였다. 조금 뒤에 한 무리의 중년들이 돗자리를 펴고 내 앞에 앉아 음주 파티를 버렸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음담에 가까운 말들을 떠들어 댔다. 모처럼 더위를 식히려 했던 것이 외려 스트레스까지 받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다. 아내는 곱게 잠들어 있었다. 겨울보다 여름을 잘 견디는 아내이다. 아내는 여름이 오면 제 철을 만나 것처럼 생기가 난다. 다른 계절에 비해 피부도 윤기가 돈다. 나도 이 더위에 저렇게 평안하게 잠들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에겐 체질이 분명 있나보다. 이재마(李濟馬)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서 나누어 놓은 사상체질이 새롭게 떠올랐다. 어느 한의사가 나의 맥을 짚어보더니 태음인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태음인이 어떤 체질인지 잘은 모르지만 정말이지 더위만은 참지 못하겠다.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고 수박을 꺼내어 놓고 앉았다. 그 놈을 칼로 반을 딱 자르자 불그스름한 단면이 둘로 나뉜다. 수박 특유의 단내에 군침이 돈다. 적당히 먹을 만큼만 다시 잘라놓고  남은 부분은 냉장고에 넣었다. 잘 익은 수박의 단면은 붉은색답지 않게, 강렬하지도 징그럽지 않은 벌건 바탕에 검정 씨가 수를 놓은 것처럼 박혀 있다.  한 입을 베어 먹자, 온 몸이 서늘해진다. 달작지근한 맛이 더욱 구미를 당기게 한다.

  내가 여름에 가장 많이 즐기는 과일이 수박이다. 복숭아는 어쩐지 조금 딱딱한 느낌을 받고 포도는 조금만 많이 먹어도 속에 부담이 간다. 그러나 수박은 언제 먹어도 지루치 않다. 우선 많이 먹어도 소변 한번이면 배가 푹 꺼진다. 또한 수분이라서 더위를 식히는 데에는 제격이다. 여름을 견디는 나의 건강식은 오직 수박인 것 같다. 또한 수박을 먹는 것이 이 도시에서 나의 유일한 피서법이다. 수박을 먹는 동안만은 더위가 물러가고, 물러가지 못한 더위는 친구처럼 다정하기까지 하다. 수박이 없었다면 나의 여름나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 그 모습을 보는 것부터가 시원하다. 커다랗게 푸른색에 세로로 굵게 쳐진 검푸른 무늬가 바닷가의 파도를 연상케 하며 청량감을 준다. 과일 중에서 가장 크고 둥글고 커다란 것이 여유가 있다. 

  지금 곱게 잠든 아내는 내일 냉장고 문을 열다가 수박을 거의 다 먹은 것을 보면 또 한통을 사다가 넣을 것이다. 아내가 무거운 수박을 사서 나르는 걸 보면 조금은 미안하다. 또한 매년 나에게 더위를 식혀주고 희생하는 수박을 보면 고맙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수박을 칼로 자르기 전에 큰절이라도 올려야 겠다. 올 여름을 잘 견디게 해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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