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99년 1월 문화인물 선정 기념 이중섭 특별전(일기)

윤여설 2006. 1. 28. 00:03

   

 

 

 

 

 

                     99년 1월 문화인물 선정 기념 이중섭 특별전
                                               
                                             -1999년 1월 30일 토요일 맑음


                                                                    윤  여 설        

    정말로 모처럼 아내와 외출을 했다. 아내는 직장과 종교생활로 거의 시간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도 또한 불규칙한 근무 때문에 같이 쉬는 날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공교롭게도 토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우리 시간이 맞으면 이중섭전을 꼭 보러 가자고 약속했다. 삶에 최우선을 종교에 두는 아내와 나와의 의견일치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중섭전을 보자는 데는 쉽게 동의했다. 아마 아내는 내가 이중섭을 가장 존경하는 화가인 줄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평소에 아내와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리고 나는 그의 평전도 읽었으며 언젠가 꼭 이중섭의 작품을 관람할 기회가 있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전시회는 1986년 이후 처음이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현대 갤러리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부부도 있었고 노부부도 있었으며 외국인도 있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밖에서 30분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스컴의 영향도 컷을 것이나. 이중섭이 이 정도로까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줄을 처음 알았다. 마침 토요일이고 방학이라서 아이들의 현장학습을 오기도 했으나 거의 성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것이 조금 짜증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씨가 매우 추웠다. 비록 IMF의 영향하에 있다지만 우리 민족의 높은 문화 수준을 엿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국제무대에서도 손색없는 문화 민족이며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도 쉽게 극복할 것이다.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전시장 안은 모두들 질서 있게 줄을 서서 관람하고 있었다.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도록(都錄)을 통해 접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화첩에서는 봤으나 이 전시회에는 빠진 작품도 있었다. 또한 그가 6 . 25 때를 기점으로 부산 피난 시절 이후의 작품이 주를 이루는 것도 아쉬웠다. 그의 모든 작품을 전시하기는 어렵지만 주최측이 너무 서두른 감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품을 직접 눈으로 보는 기쁨은 영상으로만 접하던 관광지를 직접 가보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붓이 닿은 필치마다 예술가의 혼이 배어 있었고 질감을 환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사진으로 볼 때는 우선 작품의 크기가 실물보다 작고, 칼라의 색도에 따라 작품의 밝기를 조절할 수 있어서 사실감이 매우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중섭의 작품은 가히 인간적이며 민족적이고 우주적이다. 우선 작품을 보면 그저 우리적인 편안함이 닿으나 결코 가볍지 않고, 전통을 지키려는 민화적 해학이 스며 있다. 그의 작품안에 소재들은 늘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어 어떤 문학작품을 읽는 것 같다. 각기 다른 아이의 표정에서 중섭은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을까. 그냥 영감이 떠올라 그렸을까? 정말로 작품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렸을까? 아마 내 생각은 그냥 그림이 좋아 그렸을 것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안으면 그게 어디 화가이겠는가? 그러나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의 그림이 그저 좋고 지금 보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그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떠났다. 내가 지금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이렇게 행복감에 취해 있는 것을 지하에서라도 알면 그는 나보다 더욱 행복하리라. 그가 그림만을 위해 살다가 요절한 것을 결코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을 소재로 한 작품과 피난 시절 주로 새나 물고기 게 등을 소재로 그린 것이 많았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를 주재로 한 작품은 과연 압권이었다. 소는 그 시대의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운반 수단이며 경작을 도와주고 재산적 가치가 가장 컸다. 그의 어진 성격으로 봐서 늘 가까이 있는 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또한 그는 아내를 일본으로 떠나 보내고 쓸쓸한 삶을 살고 있을 때의 심정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의 여백에 그린 그림에서 그의 심성과 진한 가족애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중섭!
 그는 우리 현대 미술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화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와 괘를 같이하는 비극의 삶을 산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림을 위한 그림에 의한 그림의 삶을 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팜플렛에서처럼 그의 작품을 과대 평가한 나머지 {소는 민족의 상징이라고 여겨져 왔으나 더  많이는 이중섭 자신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되었다.}는 등의 다분히 단정적인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 {소는 이중섭 자신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정도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생활이 어려워 화폭을 구할 수가 없어 담배를 싼 은박지에 그린 매우 독창적인 그림을 분청사기에 적용된 상감기법을 느낄 수 있다는 등은 다분히 작위적이다.


  과장된 해석은 감상자의 다양한 몫을 빼앗을 뿐 아니라 작가에게도 누가 되기 때문이다. 일반 관람자들이 다른 화가의 작품들처럼 그냥 편안하게 감상하면 될 것을, 필요 이상의 상징성을 부여하여 혼란을 주는 것은 억지 춘향이일 뿐이다. 또한 보통 소시민들로부터 그림 감상은 어려운 것이다라는 부담을 주어, 미술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평론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부담을 준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야! 잘 그렸다, 나는 뭐가 뭔지모르겠다라는 것도 중요한 감상법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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