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에서
(아사카와 다쿠미 묘소 전경)
한일관계는 아직도 묘연하다. 이웃이면서 가장 원만치 못한 사이이다. 더욱이 일본의 정치인들이 잊을만하면 이어지는 망언은 한국인을 더욱 분노케 한다. 문제는 일본 소수의 극우파들이 한국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아직도 그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상이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합병하고 타민족에게 수난을 가한 범죄행위에 대한 단 한번도 진실한 반성이 없었다.
한일합방의 한겨레 말살통치 속에서도 한국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다가 이 곳 망우리에 누워 있는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가 있다. 그의 묘는 망우리 공원묘지 관리사무소에서 좌측 순환도로를 따라서 1킬로미터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문명훤 선생의 묘 안내석이 서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50여미터 떨어진 곳의 길 바로 위에 있다.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묘번호는 203363번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묘지는 한국임업시험장에서 세운 추모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혀 있다.
(임업시험장에서 세운 묘비)
아사카와 다쿠미는 1891년 일본 야마다시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기독교를 믿는 성실하고 엄격한 어머님의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늘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 주고 노인들을 집에 초대하는 것 등을 보며, 봉사정신이 강한 가풍을 이어받아 낙천적인 인도주의자로 성장했다. 어머님을 따라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자연을 사랑하며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나무를 좋아했으며 명석했다고 한다. 1909년 3월 농림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고 아키다현의 영림서에 근무했다.
먼저 조선에 온 친형인 노리다카를 따라서, 그는 1915년 24세의 나이로 조선에 건너온 후 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소의 용원(傭員)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묘목을 기르는 일을 했으며 조선을 돌아다니며 수종을 검토하고 종자를 채집하며 많은 조선 사람들과 접촉했다. 조선 생활이 깊어지면서 당시의 식민지 조선을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뒤에서 본 묘소 전경_ 한식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했다)
그의 친형인 노리다카와는 조선 도자기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아사카와 다쿠미도 형을 따라서 조선 도자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훗날 조선 도자기를 비롯한 민간 공예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를 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우리말을 거의 배우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는 우리말을 할 줄을 알았으며, 한복을 즐겨 입었고 우리의 물품을 애용하며 온돌방에서 조선 장롱을 놓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선 사람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매우 가정적인 사람이었으며 여행을 하면서도 아내와 딸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는 등, 가족들에게도 매우 헌신적이었다.
(묘비 뒷면)
그가 조선에 와서 살던 3년째 되던 1916년 친형으로부터, 처음으로 조선에 온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을 소개받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매우 가까워졌으며 두 주일동안 골동품가게를 뒤졌다. 이 때부터 야나키 무네요시 선생은 아사카와 다쿠미가 모아 놓은 조선의 민예품에 반하게 되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힘을 모아 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이 미술관에서 1925년 4월에 모쿠지키 불상 사진전과 1927년 10월에는 조선의 미술공예품전이 열렸으며 1928년 7월에는 조선시대 도자기전이 열리는 등, 해마다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렇게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민족미술관」은 2차대전 중에 집경당에서 근정전 복도 한쪽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해방을 맞으며 일부가 훼손되어 다시 민족박물관에 보관되다가 한국국립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
그의 업적 가운데 중요한 것은 조선 민예에 관한 연구였다. 그가 1929년에 지은 「조선의 소반」과 1931년에 저술한「조선도자명고」는 많이 알려진 훌륭한 저서이다. 그는 「조선 소반」에서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점차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것임으로 어떤 의미에서 사용자는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라고 자신의 공예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봉사하고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멋을 더해 감으로 올바른 공예의 표본이라 해야 할 것이다”라고 소반에 대한 의미를 강조했다. 이 밖에도 그는 일본의 각종 잡지에 조선의 도자기와 민예품에 대한 많은 글들을 기고했다.
그는 1931년 4월 2일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던 중에 급성 폐렴으로 41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그는 한국문화에 대한 많은 글들을 준비 중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임업시험소의 평직원 신분임에도 높은 인문적 소양과 기독교적 인격의 소유자로 조선의 민예품의 고아하고 지극히 편리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성실한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타민족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의 어린 아이들을 사랑했고 조선의 자연을 사랑했다. 그의 도움으로 공부를 한 조선의 젊은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몸은 일본인이었으나 마음은 진정한 조선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는 “조선의 아름다움을 훼파하고 방해하는 일본을 부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빈다” 라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사람의 인격은 유전과 환경에 의해서 결정이 되지만,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종교이다. 신 앞엔 종족도 평등하고 사람도 평등하며 인간 모두는 신과 한 핏줄이다. 그러나 당시는 제국주의가 횡행하며 조선은 일본의 합방 아래에 놓여 있었다.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우리말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사실 상의 조선말살 정책이었다. 심지어 조선 사람들 중에도 일본의 앞잡이노릇을 하며 조선 사람들을 핍박하고 수탈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인으로써 우월의식에 젖지 않고 어떻게 타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아사카와 다쿠미는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다.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적 사상이었다.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엔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가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하고 이 땅의 흙이 된 분들이 많다. 선교사들은 종교의 전파를 목적으로 이 땅에 와서 묻혔고 아사카와 다쿠미는 선교를 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기독교 사상을 손수 실천하다가 조선에 흙이 된 것이다. 그는 조선의 문화를 말과 글로 예찬했고 정신과 삶으로도 예찬했다. 또한 조선인으로 살고 조선인으로 죽어 조선의 흙이 되었다. 그의 삶은 사랑과 봉사 그 자체였으며 진실한 휴머니스트였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죽은 다음날 많은 조선 사람들이 몰려왔고 한다. 그의 시신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을 했다. 조선옷을 입혀 입관을 했고 그가 살던 이문동 뒷산에 묻었다. 그의 관을 서로 매겠다며 30여명의 조선 사람들이 나섰다고 한다. 장의행렬이 지나는 청량리 일대에 인파들이 몰려와 길이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죽은 지 11년이 지난 1942년 묘지 근처에 도로가 생기게 되자, 망우리 공원묘지로 이장했다. 1964년도에 옛동료인 “한국임업시험장” 직원들이 그의 묘를 다시 단장하고 1966년 그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에는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한국의 도자기가 조각되어 있다. 그는 살아서는 마음으론 조선인이 되었어도, 육신은 될 수가 없었던 조선인을 죽어서 흙으로나마 조선인이 되어 이곳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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