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망우리를 찾아서)

『님』을 향한 염원 -만해 한용운의 묘에서

윤여설 2007. 3. 2. 13:22

                                    

        

                                         (만해의 묘 근처에 서 있는 어록을 적은 비)

 

 

                                               

                                          『님』을 향한 염원

                                                               - 만해 한용운의 묘에서


 

 

 

                                                                                                                           윤 여 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우리(4050)가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님의 침묵>을 배웠으며, 시험엔 이 시에서 (님)은 누구인가?의 정답은 늘 “조국”였다. 작품은 작가를 떠나면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님)을 조국으로 이해하든지, 연인으로 이해하든지, 관계가 없다. 참으로 우스웠던 권위주의 시절의 기막힌 국어 수업이었다. 그런 방식의 국어 교육이 시를 독자들로부터 멀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만해도 잘 알고 있었다. 만해는 시집 <님의 침묵> 서문의군말』에서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른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라고 말했다.

  

                                                 (만해의 묘비 안내석) 

 

   몇 안되는 민족 시인으로 남은 만해 한용운!

  그의 묘는 망우리 공원묘지 순환도로가 시작지점에서 왼쪽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면 약 2.3키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만해의 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석(만해 한용운 선생 묘 입구)이 서 있다. 묘번호는 204411번이다. 부부 쌍분묘이며 전망이 매우 좋다. 만해의 묘에서 바라본 서울 동쪽의 풍광은 아름답다. 멀리 예봉산과 검단산이 잡힐 듯이 다가오며, 가까이에는 한강이 용트림하며 굽이굽이 물결치고 흐른다. 그 한강 건너로 천호동과 고덕지구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약500여미터 쯤의 거리에 3.1운동 33인중의 한분인 오세창 동지가 누워 있다. 또한 33인 중의 가장 젊은 분이자, 감리교 대표로 참석한, 변절자 박희도의 묘와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왼쪽 아래로 100여미터 쯤에 위치하고 있다. 언젠가! 만해의 생가를 방문한 일이 있다. 생가의 가까운 거리에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었다. 만해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늘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과 함께하고 있나보다.

 

 

                                     (만해의 묘에서 바라본 서울 동쪽의 전경)

 

    만해는 출생당시는 매우 부유했으나 어려서 부모가 돌아가시신 후에 가난한 농가로 전락해 우울한 성격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18세의 나이에 동학란에도 가담한 것으로 봐서. 그의 역사의식이나 시대 정신은 매우 투철했던 것 같다. 그의 수필<나는 왜 중이 되었나>에서 위승(偉僧)된지 30년에 출가의 동기와 그 동안의 파란과 현재의 심경을 밝히고 있었다. 만해는 이 수필에서 “어린 소년의 몸으로 선친에게서 나의 일생 운명을 결정할 만한 중요한 교훈을 받았으니, 그는 국가 사회를 위하여 일신(一身)을 바치는 옛날 의인들의 행적(行績)이었다. 그래서 마냥 선친은 그러한 종류의 서책을 보시다가 무슨 감회가 계신지 조석으로 나를 불러다가 세우고 옛사람의 전기(傳記)를 가르쳐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사상(史上)에 빛나는 그분들의 기개(氣槪)와 사상(思想)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기어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나 하는 것을 늘 생각해 왔다.”라고 적고 있다. 만해가 3.1운동으로 수감 당시 일제는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해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거절했다. 당시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참회서를 내고 풀려났다. 만해의 그러한 정신은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받은 교육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만해의 굳은 기개와 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본이 되고 있다. 유학과 불교 그리고 도일하여 서양철학까지 섭력한 만해는 그 당시의 최고의 사상가이자며 철학자요, 정신적 지도자이며 위대한 작가이기도 했다.   

 

                                 (만해의 묘 전경)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당신에게는, 복종한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한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만해 한용운의 <복종>.

  누군들 복종을 좋아하겠는가? 만해는 위의 시 <복종>에서 자유와 복종, 그 중에서 복종을 좋아한다고 했다. 참선을 하며 승려생활을 한 만해는 역설(逆說)에 대하여 깨쳤을 것이다. 모든 종교의 경전은 역설(paradox)로 가득하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중생의 본성이 불성이다.”라는 말도 사실은 역설이다. 자유/복종, 중생/불성, 모두 대립적 조화를 이룬다. 어찌보면 인간의 삶은 사는 것이 죽는 것이요, 앞으로 가는 것이 뒤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를 살았다면 하루만큼 그 삶은 사라진 것이다. 삶이 죽음인 것이다. 그 죽음의 시간들이 점점 누적되어 우리의 삶은 최종적으로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생기귀사(生寄死歸)란 말도 있다. ‘산다는 것은 맡겨진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된다. 이를 풀어 보면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잠시 맡겨진 것이며, 죽음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된다. 만해의 많은 작품들이 역설로 되어 있다.「나는 잊고자」「사랑하는 까닭」「반비례」등등…….

 

                                                      (만해의 묘에서 바라본 구리시) 

 

  일제 치하에서 만해만큼 시대에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믈 것이다. 타민족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모두들 침묵했고 살기 위한 동조(생계형 친일)를 했다. 그러나 만해는 종교적 신념과 예리한 필력으로 겨레의 자존심을 일깨워줬다. 3.1운동을 주도했고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민중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창씨개명과 조선인 학병 출정을 반대했다.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동지들 중 친일파가 되어 변절의 길을 걷던 자들도 있던 시기였다. 또한 광복운동의 선구자 일동 김동삼 선생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 오일장을 지낸 일화로 유명하다.

  만해의 개인적인 삶을 어떠했을까! 당시 조혼의 풍습에따라서 14세에 결혼을 했고 아들을 한명 두었다. 그러나 아들의 소식은 전해진 기록들이 없다. 환속 후에 유숙원 씨와 재혼했으며 딸을 한명 낳았다. 지금 이 묘지에 쌍분으로 모셔진 분이 재혼한 유씨이다.

  평생 방랑의 길을 살았던 만해! 그가 그토록 바랐던 조국은 해방이 되었고 다시 분단이 되었다.  지금 나라는 전시작전권 환수 혹은 전환 문제로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이 심각하다. 또한 북한은 핵을 개발했고 6자회담으로 대외 외교와 주민들의 내부 다지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 만해가 살았더라면 어떤 논리를 전개했을까?

                                                                  (만해의 묘비 뒷면)

 

   만해의 시 한편을 더 보며 끝을 맺는다.<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노래는 목맺힌 가락이 묘합니다./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로 볼 수가 없을만큼 어여쁠 것입니다.//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도 야속한 듯하지마는,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거웁게 할 수가 없습니다.//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 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 만해 한용운의 <떠날 때의 님의 얼굴>. 

                                                                                                                                                                                                                                                                                              (2007년 2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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