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망우리를 찾아서)

망우리 공원묘지를 찾아서......

윤여설 2007. 4. 5. 07:03
 

 

 

 

 

 

                                망우리 공원묘지



  광주 산맥의 한줄기인 수락산(683미터)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불암산(507미터)을 거쳐 검암산(179.5미터)에 이른다. 이 검암산에는 조선왕조의 군왕들이 잠들어 있는 동구릉이 조성되어 있다. 이 검암산 줄기가 남서쪽으로 내려와 망우산(281.7미터)을 이루고 남쪽으로 용마산(286.8미터)과 아차산을 형성하며 한강의 광나루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망우산과 용마산을 거쳐 아차산 능선엔 삼국시대의 유적인 고구려 토성이 있다.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망우리 정상에서 바라본 북쪽의 수락산과 불암산 )

 

  또한 망우산 정상의 조망권은 매우 아름답다. 능선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남한산성이 보이고, 그 왼쪽의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의 팔당호에서 한강물이 덕소를 거쳐 토평지구로 굽이친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 것처럼 강물이 신비하고 은은하다. 북서쪽을 바라보면 북한산의 백운대와 인수봉이 잡힐 듯이 다가온다. 그 오른쪽으로 도봉산의 오봉과 자운봉, 만장봉이 기암괴석을 이루며 평풍처럼 펼쳐져 있다. 도봉산과 수락산 아래에 펼쳐진 아파트단지가 예전의 마들(馬野)평야이며 지금의 노원구이다. 예전엔 역(이 있었고 말들이 뛰어놀던 곳이라고 한다.

 

                                               (망우리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의 북한산과 도봉산 )

  망우리는 서울 동쪽의 중요한 관문이며 중앙선 철도와 강원도를 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지명의 유래가 전해내려 온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무덤)을 물색케 했다. 검암산 기슭에 자신이 묻힐 땅을 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며 멀리 자신이 묻힐 곳을 바라보곤 태조는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했다하여 이 고개를 망우(忘 憂, 근심을 잊음)리 혹은 망우리 고개 라고 불렀다. 옛날 태조가 넘으며 근심을 잊고 쉬던 곳이, 많은 영혼들이 근심을 잊고 누워 있는 공원묘지가 되었으니 태조가 예언이라도 한 듯하다.

 

  일제는 미아리와 수철리(현재의 성동구 금호동) 등의 공동묘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1933년 망우리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특히 일제는 조선왕조의 맥을 끊으려고 동구릉의 발치인 이 곳을 골라 공동묘지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서울시 안에 있는 유일한 공원묘지이며 총면적 49만884평에 2만8500기의 분묘가 있다. 묘지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1973년 이후는 더 이상 묘지를 조성하지 않고 있다.

 

                                                       ( 망우리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의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로 팔당댐이 보인다)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해서 볼 수가 있음

                                                

  이 곳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기여한 많은 분들이 잠들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인 오세창, 한용운 그리고 변절자 박희도가 누워 있다.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창시자 방정환 선생, 국어학자이며 천연두를 보급한 지석영, 임정 내무부서기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문명훤의 묘 등이 있으며, 동아일보 주필과 한국 민주당 창당을 주도한 장덕수,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등의 묘가 있다. 그리고 시인 박인환과 소설가 최학송,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도 이 곳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분들 외에도 많은 유명 요인들이 있으며 업적이 밝혀지지 않은 많은 분들이 계실 것이다. 또한 일본인 조림학자 아사카와도 누워 있다. 아사카와는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에서 태어나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14년조선총독부 산림과 용원(傭員)신분으로 한국에 건너와 곧바로 조선문화에 매료됐다.

 

  사람은 역사적 실체요, 역사적 주체라고 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역사의 전개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삶의 구체적 전개인 인생이 진전된다. 인간의 삶은 한순간 한순간이 역사적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생은 한 개인에 의해서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집단과  연계되어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개인인 동시에 그 시대의 역사 그 자체이다. 이런 사실을 자각하고 사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여기 망우리에 누워 있는 분들이 역사의 중심부에 있었던지, 주변부에 있었던지 관계 없이 한시대를 이루고 사신 모두 중요한 분들이다. 다만, 이 글에 언급된 분들은 보편적 삶이 아닌,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 창달에 기여를 한 분들이다.

 

                                                   ( 망우리 정상에서 바라본 남쪽의 관악산)

           

  지금 망우리 공원묘지는 거듭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90년대에 4.7키로미터의 순한도로를 조성해서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즐긴다” 라는 말처럼 주민들이 산책과 등산을 하며 일상 생활 속의 친근한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자녀들과 함께 순환도로 주위에 조성되어 있는 선열들의 묘를 답사하며 그분들의 얼을 되새겨보는 일도 중요한 역사의 산교육이 될 것이다. 또한 서울시에서는 자손이 더 이상 찾지 않은 채 방치된 묘는 이장시키고 망우리 공원 묘지를 “문화유적”으로 등록해서 젊은이들에게 고난의 역사와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근대 역사 문화 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한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많은 인걸이 잠들어 있는 파리 도심의 ‘마르셀 프루스트’와 ‘에디트 피아프’의 공동묘지를 부지런히 관광한다고 한다.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망우리 공원묘지도 파리의 공동묘지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홍보 부족과 공동묘지라는 혐오감으로 이곳 망우리에 대한 역사적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곳은 현재 우리나라의 국립묘지에 버금가는 많은 분들이 잠들어 있는 유적지이다.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야 할 또 하나의 관광 역사 교육관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원묘지도 외국처럼 중요한 광광코스로 자리매김이 되었으면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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