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망우리를 찾아서)

서해 최학송의 묘에서

윤여설 2007. 5. 8. 07:12

 

 

 

                   일제 강점기의 빈궁을 파 해친 작가

                                   - 서해 최학송의 묘에서

 

 

 

                                                (묘 입구의 최학송 문학비)



  빈부의 격차는 사회가 존재하는 한은 영원할 것이다. 다만, 그 간격을 좁힐 수는 있어도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유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고 판자촌이나 비닐하우스 혹은 노숙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본인이 아무리 성실히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빈민 구조적 모순이 있다면 우리 모두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1920년대 일제 치하의 하층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가 서해 최학송!

  그의 무덤은 망우리 공원묘지의 순환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1300여미터 지점에 있으며 묘번호는 205288번이다. 도로 왼쪽에 서해의 묘가 있음을 알리는 「작가 崔鶴松 문학비」가 서 있다. 2004년7월9일 서해 서거 72주기에 우리문학기림회원들이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원들이 서해의 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망우리에 묻혀 있는 것은 알았으나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묘는 문학비 위로 10여미터 지점에 있다. 봉분은 북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중랑구와 노원구, 강북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이 꽤 좋다. 원래는 미아리에 있었으나 이 곳으로 이장해 왔다. 묘비의 뒷면은 “「그믐밤」「탈출기」등 명작을 남기고 간 서해는 유족의 행방도 모르고 미아리 공동묘지에서 누웠다가 여기 이장되다 위원회 일동”이라고 적혀 있고, 옆면엔 한자로 “단기 4291년 9월25일 건립 고 최학송 선생 이장위원회”라고 적혀 있다. 서해 최학송은 너무 가난해서 가족들과 헤어진 후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서해가 숨을 거둘 무렵에는 궁핍에서 벗어난 때였다.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서해의 묘 전경) 

 

 

  서해는 함경북도 성진에서 한방의(韓方醫)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가출로 성진보통학교 5년 중퇴가 그의 최종 학력이다. 모친과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1917년 간도로 이주해서 온갖 고생을 한다. 두부장수와 노동판의 십장 등을 하며 유랑을 했으며 한때는 절망에 빠져 마약중독에 걸리기도 했다. 1923년 빈곤 때문에 가족들과 흩어졌다.

  그의 문학 활동은 15살 때 〔학지광(學之光)〕에 투고한 산문시가 게제되고 본격적인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고국〉이  추천되면서 부터였다. 서해의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체험문학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묘비 뒷면)

             

  “아이구 어머니! 왜 울 어머니를 잡아가요? 응응……흑.”

  용례는 어머니의 팔목을 잡은 중국인의 손을 물어뜯었다. 용례를 본 인가(지주)는 문 서방의 아내는 놓고 문 서방의 딸 용례를 잡았다.

  “이 개새끼야! 이것 놔라 응응……아이구 아버지 ……엄마!”

  억센 장정 인가에게 티끌같이 연연한 처녀는 몸부림을 하면서 발악하였다.

  “용례야! 아이구 우리 용례야!”

  “에이구 응…… 너를 이 땅에 데리구 와서 개같은 놈에게…….”

  문 서방 내외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낯빛이 파랗게 질린 흰옷 입은 사람들은 쭉 나와서 섰건마는 모두 시체같이 서 있을 뿐이다. 여편네 몇몇은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었다.

                                             (「홍염 紅焰」)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흉년으로 인해서 소작료를 내지 못하자, 중국인 지주 인가는 문 서방의 아내를 데려가려다가 딸을 보곤, 처녀인 17살의 딸 용례를 데려간다. “그 장면을 목격하는 조선인들은 시체처럼 서 있을 뿐이다”라는 서술이 참으로 간도로 이주해 간 소작인들에 대한 지주의 착취와 서러움이 가득 배어 있다.

  어느 때 어느 시절이라도 가난한 자는 서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제치하 조선의 대다수 민중들은 저렇게 처절한 삶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간도로 이주해서 잔혹한 삶을 손수 체험한 서해는 이 소설 외에도 <탈출기> 등, 간도를 소재로 한 여러 편의 소설들이 있다.

  서해의 문학이 그 이전의 예술 지상파들의 문학을 능가하는 장점이 있다. 즉, 기존의 문학과 달리 유독 가난한 삶을 묘사했다는 데서가 아니다. 그만큼 절실한 문제성의 토대 위에 몸으로 아픔을 실증하면서 작가로 출발했다는 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는 나무장수, 두부장수, 머슴살이 등으로 인생의 가장 낮은 삶의 체험을 했으며 저변에 가라앉은 상처들로 젊음을 태웠다. 때문에 그에겐 생존의 의미에 대한 절실하고 엄숙한 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공포, 분노, 절망,  체념 등, 이처럼 인생의 밑바닥 독소만이 그가 알고 있는 삶의 전부였다.

                                            (묘비 옆 면)


  박돌어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릅뜬 두 눈에서는 이상스런 빛이 창문을 냅다 쏜다.

                                                             (「박돌의 죽음」)


  삼돌이 그림자가 김좌수 집에서 사라지던 날부터 김좌수 집에 드나드는 것이 있었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김좌수뿐이었다……그것은 피묻은 그림자였다. 모두 착각이었다.

                                                                   (「그믐밤」)      


  서해의 소설은 빈궁이 극에 도달하면 이성을 잃고 발작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살인, 방화의 결말에 도달하기 전에 반드시 가난으로 희생된 인간의 죽음이 등장한다. 이 피해적인 죽음 뒤는 위의 두 작품의 밑줄이 쳐진 ‘이상스런 빛’이나 ‘드나드는 것’의 서술처럼 ‘환영모티브’가 나온다. 그 이유는 극심한 가난을 겪다가 종국엔 본능적으로 솟아오르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 ‘환영모티브’ 즉, 착각을 겪은 후에 다시 보복의 살인, 방화로 이어지며 자포자기의 심정이거나 심리적인 정서 이상을 겪는다. 그것은 1920년대의 식민지적 상황이 하층민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고 그로 인한 정신적 황폐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서해가 활동하던 시기는 사회주적 사상에 입각한 프로문학이 결성되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서해의 작품은 사회변혁을 위한 민중혁명을 유도하기 위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프로문학과 시기적으로 일치할지라도 다만, 서해는 학대받는 인간과 그 학대자를 인간 본연의 자세로 그려봤을 뿐이다.

  서해의 문학은 그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소재주의 문학이다. 그의 경험이 사실대로 전달해야 할 절박성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세련된 문체나 미적 결과 등은 중요시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혹자는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과 독학으로의 창작활동의 한계라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서해의 묘에서 바라본 중랑구 전경,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다가온다)

 

               

   문 서방이 여러 사람을 헤치고 두 그림자 앞에 가 섰을 때 앞에 섰던 장정의 그림자는 떵에 거꾸러졌다. 그 때는 벌써 문 서방의 손에 쥐었던 도끼가 장정 인가(지주)의 머리에 박혔다. 도끼를 놓은 문 서방의 품에는 어린 여자의 그림자가 안겼다. 용례가…….

  그 바람에 모였던 사람들은 혹은 허둥지둥 뛰어버리고 혹은 뒤로 자빠져서 부르르 떨었다. 용례도 거꾸러지는 것을 알았다.

  “용례야! 놀라지 마라! 나다! 아버지다! 용례야!”

                                                     (「홍염 紅焰」)


소설 「홍염」의 거의 끝부분이다. 소작료 대신 딸을 빼앗긴 박 서방은 딸을 구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인가(지주)를 살해하고 딸을 만난다. 그의 작품은 거의 사건의 전개가 평면적이고, 유형적인 흠이 보인다. 갈등의 양상이 단순하고 극적 효과만 노려서 빈궁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의외의 살인을 하게 되며 끝을 맺는다.

  그의 작품에서 비록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 식민지 당시의 하층민들의 삶을 리얼하게 형상화시키려 했던 점은 높이 인정해줘야 한다.


  오늘도 서해는 쓸쓸히 누워서 그가 그렇게 원했던 발전하는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서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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