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조명받는 화가
이인성의 묘에서
누굴 기다리는 걸까? 아이를 업은 흰색 한복바지의 소년은 멀리 언덕을 응시하고 있다. 또 다른 소년은 웃옷을 벗고 바지차림으로 돌 위에 걸터앉아 깊은 상념에 잠긴듯하다. 멀리 첨성대가 보이고 개(犬)도 아기를 업은 소년이 응시하는 곳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황토색이 짙다 못해 붉은 빛을 띠며 우리의 정서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그렇다, 저 황토빛! 농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시절의 우리 주변의 상징적인 색이다. 더욱이 웃옷을 벗은 소년도, 아이를 없고 응시하는 소년도 모두 피부가 황토빛이다. -「경주의 산곡에서」를 보며
(이인성의 묘 전경)
한 예술가의 작품을 논할 때 과대평가되는 경우가 있고, 과소 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둘 모두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근대화단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고도 그동안 과소 평가되었던 화가가 있다. 이인성 화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초등학교 외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각종 공모전을 휩쓸었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화가들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화가였다. 이인성 화백을 보면 재능은 타고난 능력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당시 일본수채화 회화전의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까지 알려졌으며 그는 제도권 화단을 모두 석권한 샘이다.
(가을 어느 날 1934년 캔버스에 유채, 96×161.4cm)
이인성의 묘는 망우리 공원묘지 관리사무소에서 좌측 순환도로를 따라서 1킬로미터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문명훤 선생의 묘 안내석이 서 있는 곳에서 150여미터 정도 산으로 올라가서 능선에서 오른쪽으로 5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인성의 묘를 알리는 안내석이 없으므로 찾는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인성의 묘가 있는 망우산 능선은 서울의 동쪽과 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조망권이 매우 우수한 곳이다. 묘는 남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묘번호는 203574번이다. 이인성기념사업회에 의해서 다른 작가들의 묘보다 비교적 잘 단장되어 있었다. 타원형의 검은색 묘비석에 앞면은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의 묘”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은 약력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의 묘 아래로 20여미터 지점의 비탈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가 있던 자리가 있다. 지금은 이장했으며 아래의 사진처럼 묘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누구라도 이인성의 작품을 보면 ‘우리의 정서를 이렇게 잘 그리는 화가가 있었구나’ 라는 마음이 들게 된다. 그 만큼 평안하고 즐거움을 준다. 그의 작품의 핵심은 우리 정서의 표현과 정확한 데생이다. 어떤 상황의 구도에서도 그는 그리고 싶어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포착해서 화폭에 옮겼다. 언뜻 쉬운 듯하나,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프로다움이 화폭 가득하다. 당시 추상화가 유행하던 시절, 모범적이고 교과서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훗날 지금의 그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성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오고 당시 대구의 병원장의 딸이며 일본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한 신식여성과 결혼을 한다. 그리고 “이인성 양화 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고, 대구에서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아루스”라는 다방을 개업하기도 했다. 1936년부터 1939년경에 절정을 이뤄 당시 문인, 화가들이 모여 담소하던 예술 카페 역활을 했다.
(이인성의 해바라기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61× 50.5cm)
그의 작품은 고호의 정물화와 고갱의 풍경화를 조합한 듯하다. 고호의 「해바라기」와 이인성의 「해바라기」를 비교 감상해보자. 두 작품 모두가 비슷한 색감에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도 비슷하다. 그러나 주위 깊게 살펴보면, 단순한 고호의 작품에 비해 이인성의 「해바라기」는 화병 옆에 고구마와 사과가 놓여 있다. 고호의 「해바라기」에 비하면 매우 풍성한 가을의 정취를 맛볼 수가 있다. 또한 고호의 작품이 매우사실적인 데에 비해 이인성의 작품은 붓놀림이 굵어 질감이 넘친다. 인성과 고호의 「해바라기」를 보고 있으면 똑 같은 소재의 서양화일지라도 ,누구라도 이인성의 작품이 우리의 정서가 깊게스며 있는 것을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인성은 그만큼 풍부하고 한국적 정서가 가득한 작품을 그렸다.
(고호의 해바라기 1888년경 캔버스에 유채, 91× 72cm)
작품은 대구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많이 눈에 띤다. 1929년 8월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계성중학교 정문을 그린 「수채화 그늘」을 출품하여 입선하며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지금 원작은 전해지지 않고 당시 흑백사진으로 찍은 작품만 전해진다. 그림 속의 계성중학교 정문은 덧문이지만 현재의 정문은 덧문이 없는 상태다. 정문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은 당시 서문시장의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들로 추측된다.
대구의 계산동 성당 오른편에 카톨릭학교재단의 전신이 된 “혜성학교”가 있었다. 1930년 그 위쪽에서 바라본 「계산동 성당」이란 작품을 그렸다. 그 때 그림에 나오는 감나무가 지금도 서 있다. 현재는 가지가 많이 상한 상태이지만 열매를 맺고 있다고 한다. 대구시에서는 “이인성의 나무”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있다. 한 화가의 예술혼의 소재가 된 나무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아주 소중한, 살아있는 자료이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 1936년, 종이에 수채, 75× 60cm)
그의 작품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은 매우 세련된 여인이 모자에 노란옷을 입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오른손을 가볍게 쥐어 턱을 괴고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초상화에 가까운 매우 사실적인 작품이다. 그 작품의 모델이 이인성의 첫부인이라고 한다. 그 당시로는 대단히 독특한 빛깔의 의상이다. 또한 의자의 붉은 커버와 잘 조화를 이룬다. 매우 밝으나 결코 가볍지 않고 안정감이 넘친다. 화가들은 자신의 부인을 그리는 작품들이 많다고 한다. 로댕의 작품에 자주 나온는 모델도 그의 부인이었으며 샤갈의 작품 속의 여인도 그의 아내였다. 자신의 아내가 화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 그만큼 그리기가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인성은 첫부인과 사별하고 중매로 만난 간호사인 당시의 인텔리 여성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리고 해방이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서 현 이화여고에 미술교사로 부임해서 미술부를 창설한다. 그리고 이화여대의 서양화부에 시간강사로 출강을 했다. 「이화의 오후」가 그 당시의 그린 작품이다. 인성은 두 번째 부인의 가출로 배화여전을 나온 여성과 세 번째 결혼을 한다.
이래도 저래도 나의 천직은 그림을 그리는 신세인 만큼 그림 속에서 살고 그림 속에서 괴롬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은 새삼르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누구에게도 내 개성을 짓밟히기 싫다.
「화방수필 - 흰벽」중에서
화가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그래서 일까? 그의 삶을 마치는 순간도 그의 자부심고 긍지가 넘치는 행동을 이해 못한 경관과의 사소한 충돌로 생을 마감했다. 1950년 6.25동란 중에 피란하지 못하고 북아연동 자택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모자 쓴 자화상 1950년 나무판에 유채)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 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다. “누구냐. 정지”돌연 길을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경찰)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길을 막아 세운다.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요.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요.”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고위층의 인물인가 은근히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재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경비초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치안대원은 뛰쳐나간다. 그리하여 씩씩거리며 종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이 옷도 채 입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한방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최인호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중에서
조선의 보물, 화단의 귀재 이인성은 그렇게 갔다. 이제 갖 태어난 두 달도 되지 않은 아들을 두고…….
사실! 그의 죽음은, 예술가(창조가) 이인성의 대한민국 제일의 독특한 자존심과 - 당시의 예술가 경시풍조의 충돌이 만든 비극이었다. 그가 정말로 고관대작의 자제였거나, 아니면 저자세로 나왔으면 꼭 멜로드라마같은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술이 그 자체가 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꽃은 왜 가꾸는가? 이 사회가 실용성으로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모든 제품의 포장지도 실제로 필요한 문구만 검정색글자로 빼곡하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예술 - 즉, 아름다움은 삶을 더욱 풍요하고 여유롭게해주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각 가정에 그림이나 사진이 한점이라도 없는 집이라면 매우 을씨년스러울 것이다. 지금도 전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예술가들은 5%미만이다. 나머지 작가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작품활동에 전념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의 작품 「경주의 산곡에서」가 1998년 월간미술 주관 한국근대유화 베스트10의 선정작업에서 1위로 선정되었다. 또한 2003년 문화관광부에 의해서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작품을 그리고 있었을까? 아마! 세계 화단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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