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의 외침!
대향 이중섭 화백의 묘에서
대향 이중섭의 작품 <흰소>
다부진 근골의 흰소! 코를 벌름거리며 치켜든 오른쪽 앞다리,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하지만 퍽이나 안정감이 있다. 붓놀림이 매우 굵고 거친 듯 차분하다. 커다란 음낭이 힘이 넘쳐 더욱 항소의 기백이 넘쳐난다. 저 소가 만주벌판을 달릴 것도 같고 대마도도 누빌 것 같다. 대향 이중섭의 “흰소”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중섭이 즐겨 그렸던 주제는 “소”였다. 농경사회였던 당시의 소는 두말 할 것도 없이 한국인의 삶을 드러내는 가장 향토적인 주제였다.
중섭의 묘는 망우리 공원묘지의 순환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걷다보면 약70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의 길 아래로 약100미터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묘번호는 103535번이다. 중섭의 묘를 알리는 안내석이나 어떤 표시도 없었다. 근처에는 약수터와 배드민턴장이 있으나 누구에게 물어봐도 중섭 화백의 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관리사무소에 문의해 겨우 찾았다. 그처럼 우리는 화가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그의 묘는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북한산 오봉을 바라보고 있다. 묘 앞 왼쪽엔 조각가 차근호가 중섭의 그림 가족화를 오석으로 제작해 세운 묘비가 서 있고 오른쪽엔 노송이 한그루 서 있다.
대향 이중섭 화백의 묘 전경
한국 화단의 불멸의 일등 존재!
대향 이중섭 화백은 이렇게 쓸쓸히 누워 있다. 그의 그림은 6.25동란 전과 후로 나눠 볼 수가 있다. 중섭은 식민지시대에 일본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그 시절은 창씨개명과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할 때였다. 그런 단말마시기에 민족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그림마다 “ㅈㅜㅇ서ㅂ”이라고 한글로 서명을 해서 발표했다. 몸에 밴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동란 전의 작품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중섭은 동란 중에 피란을 하면서 그 때까지의 그림을 일체 두루마리로하여 노모에게 맡기고 원산을 떠나 부산에 왔다. 지금 해방 전의 작품은 중섭의 아내 이남덕(일본명:마사코)이 연애시절 친정에 보관했던 작품들이다.
묘 앞에 차근호가 조각해 세운 <가족화>
비교적 부유한 집 안의 유복자로 태어난 중섭의 그림은 어딘지 쓸쓸한 면이 스며 있다. 어린 시절의 영향이 아닐까? 아무리 부유하고 환경이 좋아도 편모슬하의 중섭은 어쩌면 늘 허전하고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서양화를 한국화처럼 그렸다. 아마 그 시대에 유화를 가장 한국적으로 그린 화가였을 것이다. 때론 해학적이고, 혹은 좌절한 느낌의 소들, 서로 노려보며 적의하는 닭들, 그의 그림은 볼수록 구수하고 한국미가 넘쳐난다. 중섭은 조선백자나 항아리 등, 우리의 전통적인 골동품을 매우 좋아했다. 먼저 그는 우리적인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며 그 특징을 전형적으로 그렸다. 아이 얼굴, 소, 까마귀, 닭 등의 민화풍이 모두 그렇다. 그래서 중섭을 ‘국민 화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아내 이남덕이 중섭을 처음 만날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쉬는 시간에 남학생들이 배구 경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청년이었죠. 그 때는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그는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요. 권투도 잘했고 철봉, 뜀박질 등을 멋있게 해냈죠. 그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다른 여학생들도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눈치였습니다.” 유학 시절의 중섭은 준수하고 미남인 청년이었다. 그의 아내는 당시 일본 제일의 재벌인 삼정물산 중역의 딸이었다. 아들이 없는 집안의 부호의 딸이라서 풍요한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자랐다. 그들의 사랑은 예술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 의식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예술적 일치감이 있기에 이뤄졌을 것이다.
중섭에게 그림은 그의 생존과 생활의 전부였다. 피난 시절 판잣집 골방에서 그렸고, 대포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맨 종이, 담뱃갑의 은박지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외로워서 그렸고 먹을 것이나 잘 곳이 없어도 그렸다. 그의 그림을 보면 대단히 시(詩)적이다. 모든 예술은 즉, 언어의 예술 문학이나, 소리의 예술 음악이나, 색체의 예술 그림이나, 영감(inspiration)은 같다.
중섭의 <은박지 그림>
중섭은 시를 무척 즐기며 애독했다고 한다. 그이 부인의 회고에 의하면 발레리, 릴케, 베를렌느 등의 시를 암송으로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소설보다 시를 아주 좋아했고 어떤 때는 릴케의 시를 아주 정갈하게 베껴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중섭은 시를 사랑했을 뿐 아니라 자작시도 썼다. <높고 뚜렷하고/참된 숨결//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철철 넘치소서//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아름답도다 여기에/맑게 두 눈 열고//가슴 환히 헤치다> -중섭이 지은 시 「소의 말」이다. 이 시는 1951년 봄 피난지 제주도의 빙벽에 붙어 있던 것을 조카 이영진 씨가 암송하여 전한 것이다. <나의 사랑한 사람이여/한가위달을/혼자 쳐다보며/당신을 가슴 하나 가득/품고 있소> -1954년 한가윗날에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추석날 홀로 떨어져 보름달을 바라보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 배어 있는 글이다.
이중섭의 작품 중 은박지 그림이 모던 아트 뮤지엄에 소장되기도 했다. 1957년 2월2일자 뉴욕타임즈에는 전년도의 모던 아트 뮤지엄의 신구입 작품의 전시회평이 나와 있다. “이중섭이라는 한국의 미술가가 색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답배갑의 은박지 위에다 긁는 방법으로 자신의 드로잉을 고안해냈다. ‘라고 적고 있다. 그 그림은 화선지를 구할 돈이 없어서 은박지에 그린 그림이다. 그 어렵게 그린 그림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중섭의 <투계>
가족들을 일본에 보내고 혼자 남은 중섭은 극심한 외로움과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서울과 대구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그러나 극도의 쇠약과 정신분열증을 보이기도 한다.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던 중섭은 1956년 9월 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1세이다. 그는 홍제동 장제장에서 화장되고 그의 뼈는 나눠져서 일부는 이곳의 망우리에 뭍히고 일부는 구상 시인에 의해 일본의 부인에게 인계되어 일본에도 그의 묘가 있다.
중섭은 그렇게 쓸쓸히 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미술이 무엇인가? 가르쳐 준다. 또한 그의 예술혼은 부활했다. 1978년 문화훈장이 수여되었고 1986년 그의 서거 30주면을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1999년 1월 문화 관광부에의해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작품을 세상(1972년)에 처음 알렸던 서울 갤러리 현대(종로구 사간동)에서 이중섭 특별전이 열렸으며 엄청난 호황을 이뤘다. 또한 그가 피난 시절 머물렀던 제주도 서귀포의 옛집도 이중섭 기념관으로 복원되었다.
중섭이 그린 <자화상>
중섭이 간 후에 생전에 그와 교류가 있었던 김춘수 시인과 김광림 시인이 “이중섭”의 소재로 연작시를 써서 발표했다. 그 중에 김광림 시인의 「이중섭 생각6」을 소개한다. <살아서 못 누린 주거를 망우리에 와서 지녔구나//따분함도 배고픔도 그리움도 모르는/그곳에서/다시는 맥나는 일도 없을/무덤 속에서/그는 소나무로 환생하여/남몰래 자라며 크고 있구나//세상에 떠도는 수다한 말씀 따윈 아예 귓전에도 없구나//다만/비명에 간/청년 조각가 C씨가 져나른 묘비가 두꺼비마냥 우두커니 그를 지며보고 있구나>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그는 갔어도 그림만은 앞으로도 영원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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