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망우리를 찾아서)

낭만적 고뇌의 운명적 표출 - 「박인환」의 묘에서

윤여설 2007. 1. 8. 06:45
                   

                                            (박인환 시인 1926 ~1956 )

 

 

                                                

 

                     낭만적 고뇌의 운명적 표출

                                          -「박인환」의 묘에서


<한잔의 술을 마시고/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중에서......

31살에 생을 마감한 박인환!

그의 삶은 너무 짧았으나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았다. 어딘지 창백하고 서구적인 모습, 그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사망원인도 과음 탓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과음을 하고 난 저녁 9시 자택에서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박인환의 묘가 있음을 알려주는 시비)

   인환의 묘는 망우리 공원묘지 관리사무소에서 우측으로 순환도로를 따라 400여 미터 정도 가면 그의 묘를 알리는 시비「목마와 숙녀」가 서 있다. 그 아래로 50여 미터 내려가면 된다. 봉분은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북한산과 도봉산이 잡힐 듯이 다가온다. 묘 앞엔 인환이 세상을 떠나던 해의 추석날인 1956년 9월 19일에 문우들이 세운 사각의 묘비가 서 있다. 묘비에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맘에 있어> 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 새겨져 있다. 가요로도 불리워진 잘 알려지고 친숙한 시이다. 시<세월이 가면>은 인환이 어느 모임에서 즉흥적으로 지어서 낭송한 시라고 한다. 사실! 즉흥시는 대단히 어렵다. 인환은 그렇게 재치가 넘치는 시인이기도 했다.

인환은 매우 노력하는 시인이며 낡은 것을 타파하고 나름대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이 한창인 51년 초에 김경린, 조향, 김차형, 이봉래, 김규동 시인들과 함께 『탈후반기』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탈후반기』는 당시의 기성문단과 문화계에 반격하는 문학 운동을 펼쳤다. 즉, 낡은 전통문학과 구태의연한 감상주의를 비판하고 문단 및 문화계의 왜소한 권위주의에 도전하기 위함이었다. 광복 후의 문학이 일제시대의 무기력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센티멘털리즘으로 돌아가려는 것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50년대의 문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나름대로 대안을 모색했다. 『탈후반기』동인들은 새로운 대안으로 모더니즘 노선을 택하게 된다. 그것은 30년대에서 40년대에 이르는 한국 모더니즘(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오장환 등)의 체계를 세워 진보시킴으로써 문학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하려는 의욕이었다. 그러나 현대문학사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다.

                                                                (박인환의 묘 전경)

 

인환이 시 한편을 더 보자.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용사가 누워 있었다./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비둘기는 야전 병원 지붕 위에서 울었다.//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용사는 대열을 지어/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소리를 듣는다./아 창을 닫으시오//고지탈환전/제트기 박격포 수류탄/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하늘에서 비가 내리가기 시작했다. ......중략...... 한줄기 눈물도 없이/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그는 피와 청춘을/자유를 위해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지금 찿아오는 사람도 없다. 인환의<한줄기 눈물도 없이> 중에서

그가 활동한 시기는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아직까지도 내전인지? 국제전인지? 성격이 모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어지던 시대였다. 위의 시<한줄기 눈물도 없이>는 제트기, 박격포, 수류탄 등의 현대무기가 시어로 등장하며 전쟁의 처참함으로 가득하다.

전쟁이 한창일 때(51년) 인환은 종군 기자로 활약한다. 같은 또래 젊은이들이 아무런 죄 없이 무참히 사라져가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을 것이다. 인환의 시 <검은 신이여!> <신호탄> <서부전선에서> 등등, 전쟁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이 띤다. 전쟁은 한마디로 비극과 처참한 외엔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한가운데에 놓여진 인환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인환의 묘비) 

   그의 전쟁을 소재로 한 시들을 보면 인환은 당시의 어느 시인보다 전쟁의 모순과 역사의 갈등을 뼈저리게 자각하던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역사의식과 민족적 자각이 성숙하여 표출되기 이전에 그는 떠났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쯤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참담하게 근심하며 현실을 아파하고 방황하던 인환!

그가 폭음을 한 것도 그로 인해서 심장마비로 운명을 한 것도 어쩌면 현실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은 어떤 성격이든지 시대를 반영한다. 특히 인환의 모더니즘과 허무주의, 어쩌면 그는 시대를 가장 아파한 시인일지 모른다. 다만, 서민성 내지 민족성을 획득하지 못했을 뿐이다.

처음엔 의학을 공부하다가 서점을 경영하기도 했고 종군기자생활을 하는 등등. 환경은 그가 문학에 전념하도록 허용치 않았다. 또한 해방을 전후한 혼란과 전쟁의 비극 그 와중에서도 그는 우리에게 사랑받는 시들을 남겼다. 또한 그의 작품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는 인환의 묘 앞에 서서 앞에 펼쳐져 있는 아파트의 밀림을 바라본다. 인환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모더니즘계열의 사상은 어쩌면 저런 문명의 진보한 환경을 추구한 것은 아닐까? 그 전쟁과 가난의 폐허에서 일어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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