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망우리를 찾아서)

3.1민족대표33인 겸 변절과 성추문, 박희도묘 발견

윤여설 2006. 8. 28. 06:59

 

박희도의 묘는 망우리에 있다. 더욱이 한용운 선사와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묘비의 "기미독립선언서삼십삼인중"이라는 문구가 참으로 어색하기만 하다.  묘는 매우 잘 관리되고 있었다.

 

 

묘비의 뒷면. 육군정훈학교 장병일동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묘지 번호

 

 

 

 

                  독립운동과 변절

 

                               - 친일파 박희도의 묘 앞에서

 

 

 

 

 

  박희도의 묘를 발견한 것은 매우 우연한 계기였다. 망우리를 산책하면서 어딘지 좀 특이한 느낌이 들어 확인했더니 그의 묘였다. 묘비번호는 109628번이다. 아마도 그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의 묘는  함께 3.1운동 민족대표인 한용운 시인과는 순환도로를 건너 왼쪽 아래도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한용운 선사의 참배객은 많으나 그의 묘는 다른 애국지사들과는 달리 안내석(石)도 없으며 "망우리묘지 애국지사 묘역안내서" 에도 빠져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중 가장 어린 31세의 나이로 감리교회 대표로 참석한 박희도!

   그는 채포되어서 판사의 심문에도 젊은 독립운동가 답게 "나는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당당하게 답하여 다른 이들보다 무거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옥한 후에도 교육과 출판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자신이 창립한 중앙유치원의 원감을 맡기도 했고, 1922년 {신생활} 잡지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신생활제창과 자유사상 고취를 외치다가 마침내 1922년 11월에 발간한 제13호 기사를 트집잡아 박희도를 비롯한 편집진들을 검거되기에 이른다. 박희도는 이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함흥감옥에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말경에 출옥하였다. 


  이렇게 투철한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주의자였던 그가 어떻게 변절을 했을까?

  그가 일제의 회유 공작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인지는 확실지 않다. 그가 본격적인 친일로 변절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1월 일문으로 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부터였다. 이 잡지가 창간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을 표방했기 때문이었다. 박희도는 {동양지광}의 창간사에서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중략...... 일본 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루아침에 독립운동가에서 골수 친일파로 변절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태평양전쟁의 일제 학병독려에 나서서 "황군병사로  ......중략...... 목숨을 헌납할 때 ......중략......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라고 하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하도록 촉구하였다.  또한 중앙보육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여제자들과 키스내기화투를 치다가 정조를 유린했다는 대형 성추행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 당시는 친일행각보다 성추행이 더욱 금기된 시기였다. 그의 성추행 기담은 얼마전 출간된 경성기담<전봉관지음2006년 살림출판사>에 소개되어 화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친일행각은 끝없이 이어지다가 해방을 맞는다. 그리고 반민특위에 채포된다.

 

   사람의 소신과 신념 그리고 양심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가 있을까?

    나는 박희도의 묘앞에서 조용히 사색에 잠겨본다.  그 똑똑하고 정의감 넘쳤던 박희도가 이렇게 추악하게 변절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그도 사람인지라, 일제라는 환경에 지배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박희도보다 더욱 어려운 환경에서도 굳굳하게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많다. 그러나 그는 소신은 있었으나 상당히 기회주의자였던 것같다. 그 당시의 대다수 민중들처럼 침묵으로만 일관했어도 박희도는 지금처럼 변절자의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친일행각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서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배가 더 길어졌다면 과연 몇명의 애국자가 남았을까?라는 개인적인 생각도 잠시 가져본다.

 

    해방후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그의 행방은 기록에 별로 나와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 그의 묘비를 살펴보니 육군 정훈학교에 근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는 수완이 좋게 6.25동란이 나자, 국군에 근무했던 것이다. 그는 1951년 6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잠시 이 망우리에 묻혀 있는 그의 동지 33인중의 한분들인 위창 오세창님과  만해 한용운 선사를 생각해본다. 아마! 그 두분들과 박희도는 지금 만날 것이다. 박희도는 그 동지 두분들께 과연 무엇이라고 자신을 변명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