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베레모

윤여설 2006. 2. 12. 07:01

  

 

  산에 오르려고 등산복 차림에 운동모를 썼다. 이 운동모는 나의 것이 아니다.

 

  얼마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부터 이마의 상처를 감추려고 베레모를 쓰고 다녔다. 상처가 보기도 흉하지만 또한 의사가 퇴원할 때에 약 육개월간은 상처에 직사광선을 피하라고 말했다. 직사광선을 쬐면 흉터가 검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모자를 쓴다는 것은 나이로나 외모로 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사실 평소에는 모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산에 오를 때에 쓰는 빨간색의 운동모 한개가 유일한 내 모자의 전부이다. 생각 끝에 검정색 운동모를 쓰려고 했으나 또한 나의 과체중의 외모로는 차라리 중절모가 낫을 것 같았다. 그러나 중절모를 써 봤더니 뒷골목에 무슨 어깨들의 티가 풍겨났다. 운동모를 쓰면 마치 레슬링 선수나 되는 것처럼 보였다. 모자는 나에게는 어울리는 복장이 아니었다. 아내는 내가 이마의 상처를 가릴 모자를 선택치 못해 갈등을 겪는 것을 보더니 선뜻 베레모를 선택해 주었다.


  베레모는 대머리가 이마를 감추려고 한다든지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나 예술가들이 써야만 어울릴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나이도 젊고 대머리는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예술가라고 으시댈 처지도 아니다. 그러나 아내가 골라준 검정 베레모를 썼더니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사람들은 내가 몸이 좀 비대해서 안정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모자와 조화를 이루려고 검정 바지에 검정 사파리를 입고 다녔다. 그러니까, 검정 베레모에 검정 사파리 안에는 검정 티를 받쳐서입고 검정바지에 검정 구두에 검정 양발을 신었다.


  언뜻 보기에는 예술가보다는 어느 특수부대의 나이 지긋한 일등 특수전 요원처럼 보였다. 가끔 TV에서 진압을 하는 장면에 비치는 경찰 특공대의 복장과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것과 나의 머리가 좀 길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수술한 오른 팔이 불편할 때는 팔걸이를 매고 다녔다. 언뜻 보면 상당히 다부지다든지 강인한 인상을 주는 복장이었다. 그래도 남들에게 과히 혐오감이나 불편을 주는 모습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모습이 부상당한 나의 어색한 표정을 감추기에는 앙상맞춤이었다. 아내나 친구들은 내가 군인같다고 했고 교통사고를 당하더니 외모에 신경을 쓴다며 놀려대기도 했다. 가끔 어색하기도 했지만 복장이 즐겁기도 했고 나의 급격한 복장의 변화가 교통사고의 충격을 다소나마 완화해 주기도 했다.


  어느 날 베레모를 쓰고 외출을 했다. 집안에서의 지루한 요양이 따분하기도 하고 또한 바깥세상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날 따라서 볕이 따가와서 색안경까지 썼다. 그리고 모처럼만의 나들이라서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단정하게 잘랐다. 그리고 오른 팔에 팔걸이를 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정말로 단정한 특수부대의 요원처럼 보였다.


  나는 택시를 탔다. 목적지를 말하고 뒷좌석에 앉아서 조금 시간이 지나자 운전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손님 군인이신가요? 라고 물었다. 아니다고 대답했다. 기사는 검정 운동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화가세요? 나는 아닙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며 반문했다. 그리고 운전기사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봤다. 이십대 후반의 외모에 둥그런 눈이 시원했고 약간은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표정은 매우 밝고 천진했다. 기사는 모자가 멋있어 보여서요. 라며 뒤를 흘끔 바라다 봤다. 악의가 없는 솔직한 표현인 것 같았다. 나는 몸이 조금 불편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사는 한참을 가더니 다시 말했다. 손님 제 모자도 이거 좋은 건데요. 손님 모자하고 바꾸지요. 라고 불쑥 말했다. 나는 조금은 당황했으나 순간! 저 청년이 이 베레모를 얼마나 쓰고 싶었으면 저런 말을 할까라고 생각하며, 그럽시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기사의 모자를 바라봤다. 기사는 이 모자가 백화점에서 샀으며 꽤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모자를 벗어서 기사에게 주었다. 기사도 정중히 모자를 나에게 주었다. 면으로 된 여름 모자로써 상당히 값이 나가 보였다. 나의 베레모는 사실! 시장의 난전에서 산 모자였다. 기사의 모자에 비해서 가격도 별로 나가지 않는 그저 세일품이었다. 나는 기사와 적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차마 베레모가 난전의 제고품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 베레모를 쓴 기사의 표정인 너무도 순수했고 즐거워 보였다. 기사는 베레모를 이리저리 돌려 써보기도하고 룸밀러에 자신을 비춰보기도 했다. 그리고 상당히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명함을 한 장을 달라는 것이다. 서점에서 나의 책을 한권 산다는 것이다.


  나도 차에서 내려 거울에 비춰봤더니 검정 운동모도 복장에 잘 어울렸다. 그 후로 모자를 몇 개 마련했다.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교통사고가 나의 패션마저도 바꾸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와 맞바꾼 이 검정 운동모를 즐겨쓴다.

(1997년 10월)

 

 

 

 

 

www.poet.or.kr/youn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름밤의 수박  (0) 2006.02.14
가을의 문턱에서 -윤여설  (0) 2006.02.13
문명의 고통  (0) 2006.02.09
산을 오르며  (0) 2006.02.07
-영화【실미도】를보고 - 윤여설  (0) 2006.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