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불협화음

윤여설 2005. 12. 25. 15:22
 

(단편소설 82매)


                          불협화음  



                                                                 윤  여  설




그녀는 말이 없다. 커피숍 천장의 샹들리에를 바라보는 듯하지만, 눈은 초점을 잃는다. 지난 번만해도 교태스러움을 잃지 않고 애교를 부리던 그녀였다. 태도가 한 달만에 갑자기 돌변했다. 그가 그동안 연락을 못해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했으나 막무가내다.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힘없이 고개만 좌우로 흔들 뿐이다. 그의 갖은 추스름에 실낱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유를 알아맞히기 힘들 거라며 한숨을 쉬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더욱 궁금해진다. 그가, 그녀 앞에서 수다를 떨기는 처음이다. 좋은 일이냐는 물음에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납빛으로 굳어진다.

                                         


‘도움이 필요하면 TV에 노란 버튼을 오른쪽으로 돌리세요.’ 라고 벽에 적혀 있었다. 그는 비커를 왼손에 들고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붙들고 흔들어도 좀처럼 발기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침대에 누운 일본 여인의 자위행위가 선명히 화면을 가득 메웠다. 이번에는 아무리 채널을 조정해도 찌지거리며 브라운관에 잔주름만 비 오듯 가득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마음속으로 섹스에 관한 갖가지 상상을 해봤다. 앞이 캄캄하다. 밖에는 아내가 초조하게 기다릴 것이다. 또한, 다른 남자가 대기할 것이다. 오늘은 천장에 형광등빛도 더욱 칙칙하다. 잠시 간이침대에 앉아 숨을 돌렸다. 일어나서 다시 비커를 왼손에 들고 안간힘을 썼다. 다소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발기가 되었다. 다행이다. 언젠가 보았던 외국영화의 배드신 장면을 상상해 본다. 계속 상상해 본다. 이제 오른손 놀림을 빨리해 본다. 더욱 빨리해 본다. 순간! 화산이 폭발하여 비커 속으로 들어가듯 사정이 되었다. 짜릿한 쾌감을 느낄 여유도 없이 다리가 후들거린다. 며칠을 금욕한 정액은 밤꽃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연노란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등이 땀으로 후줄근하다. 그는 음경을 휴지로 닦았다. 그리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수고했어요.”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내가 그에게서 비커를 받아 들고 검사실로 갔다. 대기하던 남자가 겸연쩍은 듯이 외면하고 들어갔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0여분이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그는 병원문을 나서자,  문뜩, 그녀가 머리에 스쳤다. 그녀는 외모부터가 알맞게 곡선미를 이루는 아내와는 달랐다. 아내의 굳은 표정에 비해 그녀는 항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매우 큰 키에 야윈 듯해도 힙은 풍만하며 미니스커트를 입은 다리는 늘씬해 폭포처럼 시원했다. 얼굴도 아내는 둥근형인데 비해 그녀는 갸름했고, 코도 아내보다 오똑하여 매부리코처럼 날카로웠다. 그녀는 언제나 피부가 탄력 있고 부드러웠으며 향기로웠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내서 단축 다이얼을 눌렀다. 언제 들어봐도 달콤한 목소리.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그녀. 사람을 끄는  특유의 미소는 처음 보았을 때와 변함이 없다. 그는 만날 것을 약속했다. 

밖엔 스모그가 포고령처럼 짓눌러 연일 황사현상이 벌어졌다. 앞에 건물도 희미할 정도로 심했다. 그는 우울한 마음이 달아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약속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유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추적을 받는 건 아닐까? 그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해 야지. 몇 번을 다짐해 보지만 만날 때마다 되풀이되는 헛구호에 불과했다. 그 짜릿한 황홀감을 떨치지 못해 반복되는 불안한 행위. 그는 모텔 이층의 객실 창가에 서성이며 밖을 내다봤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창문을 몇 번 열었다가 닫았다. 멀리 밤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가 모델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고혹적인 품위에 세련된 모습이다. 그녀는 건물 앞에서 잠시 멈춰서더니 간판을 확인했다.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그는 이 순간, 도덕적 자책감도 가정의 근심도 모두 잊는다. 언제 봐도 그녀는 그 표정 그대로 였다.

그녀와 헤어지고 오는 도로가에 개나리가 만개해 있었다. 노란 모자를 쓰고 소풍가는 유치원생들 같았다. 그 곁으로 아이 하나가 앙증스럽게 걸어간다. 한 번 안아보고 싶은 저 아이...... 걷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새로 개업한 그림 판넬점에 유난히 표정이 밝은 여자아이의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게로 들어갔다. 그녀는 가게의 주인이었다. “어서 오세요.” 하며 반갑게 맞았다. 정말로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아이. 알맞게 큰 눈에 뚜렷한 이목구비. 유연한 살색의 귀여운 표정을 한 여자 아이였다. 르느와르 작품의 ‘라꼬 양의 초상’ 이었다. 복제화가 아닌 원작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그 작품 앞에서 얼마를 서 있었는지 모른다. 누가 다가 왔다. 주인 여자였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세상에서 처음 대하는 미소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나즈막하게, 약간은 흐느적이는 음색으로 말했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드시나봐요?” 그는 순간 당황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엉겁결에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녀는 그 작품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이 작품으로 르느와르는 그 성가가 높아지기 시작했어요. 아카데믹한 각고의 수련을 쌓은 흔적이 엿보이는 초기작입니다.” 미술을 전공했다는 그녀. 그는 “저런 아이를 길러보는 것이 평생 소원입니다.” 라고 말했다.

몇 달 후에 그는 아이의 초상화가 생각나서 다시 갔다. 실은 그녀의 미소가 떠올라서 갔을 지도 모른다. 그림이 많이 바뀌었을 뿐, 그 작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반갑게 맞았다. 어쩐지 다시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냥 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라꼬 양의 초상’ 을 샀다. 그리고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명함을 주고받았다.

정액검사 결과를 보러 병원에 다녀온 아내는 시무룩해 있었다.

“결과가 어떻대?”

“......”

“오늘 병원에 안 갔어?”

아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양이 완전한 정자가 하나도 없대요. 꼬리가 잘리는 등, 모두가 기형이래요. 이제 인공수정은 그만하고 시험관아기를 해야겠어요.”

그는 순간, 앞이 캄캄하고 무엇으로 뒤통수를 크게 맞은 것 같았다. 그동안 정액검사를 해보면 모두 정상이고 다만, 활동성만 25%정도로 낮다는 말만 들었다. 결혼생활 십 년이 되면서는 이혼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애가 없어서 헤어지고 재혼한 경우에는, 남자쪽도 여자쪽도 모두 아이를 갖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의 결혼생활은 불붙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불임 이상의 갈등의 세월이었다. 그는 표정이 항시 굳어 있었다. 즐거운 일을 봐도 객쩍은 웃음뿐이었다. 그는  깊은 한숨소리만 늘어갔다. ‘다른 여자와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야.’ 하고 자위하며 기다린 세월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려고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반찬이 없었다. 덩그러니 놓인 밥하고 국 그리고 김치가 전부였다. 그는 “반찬은 왜 안 내놓아.” 하고 물었다. 갑자기 아내는 화를 벌컥 냈다. “그냥 주는 대로 드세요! 내가 지금 반찬 만들 여유가 어디 있어요!” 그는 수저를 놓고 그냥 일어섰다.  결혼하고 처음 듣는 성난 목소리였다. 요즘 아내는 그를 바라보는 표정이 전과 같지 않다. 눈빛이 점점 차가워진다. 가끔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을 부린다. 매우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다.

그동안 네 번의 인공수정은 모두 실패했다. 확률이 20%정도라면 한 번은 남은 셈이지만 정액검사 결과를 알고 난 뒤부터, 아내는 풀이 죽어 있었다. 입은 특유의 한일자로 다물고 쇳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아내는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듯이 기도를 마치고 입을 열었다.

“생리가 시작되면 시험관 아기를 시작해야 겠어요.”

“시험관아기는 성공률이 있다고 해?”

“우리 같은 경우는 특이한 경운데 벨기에에서 성공한 경우가 있고 우리가 다니는 병원에서 한 번 성공했대요. 우리가 성공하면 세계에서 세 번째래요.”

아내는 즐거운 표정으로 보기 드문 애교를 부리고 그에게 다가와 안기며 위로했다.

“확신이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버리지 않으실 거예요. 꿈에서 우리 아이 얼굴을 선명히 보았어요. 쌍동이였어요. 얼굴은 당신을 닮았어요. 우리가 드린 기도가 헛되지 않을 거예요.”

그는 내리 오 대 독자다. 결혼 때에 식장은 썰렁했다. 직원들은 그와 악수를 하고 카운터에 축의금을 전한 뒤 모두 식당으로 가버렸다. 친구들의 결혼식에 비해서 너무도 허전했다. 신부측 자리에 앉아 있던 아내의 가족들이 신랑측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도 아내 측에 비해 하객이 너무도 없었다. 그저 돌아가신 어머님 형제 몇 분뿐이었다. 눈가에 기쁨의 눈물이 맺혔던 부친에게서도 쓸쓸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요즘도 가끔 결혼사진을 보면 그때의 허전함이 되살아난다.

아내는 불임문제를 왜 종교로만 해결하려고 할까? 그간 몇 번에 걸친 아내의 백일기도와 금식기도는 신의 허락을 받지 못했을까?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주를 믿지 않는 가정은 어떻게 아이를 가진다는 말인가? 짓누르는 회의가 새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거실의 벽에 적혀 있는 성경구절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다시 가져본다. 그는 벽을 다시 한 번 크게 뜨고 바라본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돌아오는 믿음의 기대. ‘이번에는 우리 가정도 애를 가질 수 있겠지. 아내의 확신을 믿어야지.’ 그는 가슴이 가볍게 잔물결 쳤다.

“요즘도 두통과 불면에 시달리십니까?”

“아뇨. 조금 낫습니다. 하지만 작은 일에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되물었다.

“어떤 갈등인데요?”

“옆집 부인이 저 집에는 왜 애가 없지? 혹시 남편이 이상이 있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 등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별로 말이 없고 그저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이번 달로 진료를 종료하고 지방 의대 강의 자리가 났다며 그동안 치료했던 약 이름을 적어주고 다른 정신과를 소개해 줬다. 그리 몫이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개원한 지 1년정도가 지났어도 환자가 없어 파리가 날리는 곳이었다. 

그는 약국에 갔다. 약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처방전을 보고는 “이 약은 신경안정제인데 일반 약국에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습관성 의약품을 취급하는 약국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보세요. 대학병원 근처에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큰 약국이 몰려 있는 종로 5가를 갔다. 마찬가지였다. ‘브로마졔팜’ 이 약을 구하기가 정말 힘들 줄을 몰랐다. 어떤 약사는 처방전을 보고는 없습니다. 이 말뿐, 대꾸도 않는 경우도 있다. 겨우 대학 병원 근처의 한 약국을 찾아냈다. 약사는 “주소와 이름을 말하세요. 그리고 이틀 분 밖에는 팔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이틀 후에 다시 오세요.” 라고 했다. 약을 복용하면 두통이 씻은 듯이 가라앉고 담배를 피우면 쓴맛이 감소가 되었다. 약의 효능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것이 마취효과라고 약사는 말했다.

병원은 초현대식 건물로 대형 크리스털이 장식되어 잘 꾸며져 있었다. 내부에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화분에 심어진 대나뭇잎이 고통스럽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대기실의 원탁 의자에는 삼십 대 초반부터 사십 대 초반 정도의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무엇에 짓눌린 듯이 묵묵한 표정으로 밖을 응시하거나 내부의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을 쳐다보기도 하고 지갑을 꺼내어 돈을 세어보는 등 모두 무료한 모습들이었다. 가끔 부부들이 앉아 있었지만 별로 다정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는 목이 타고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그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 왔다. 그리고 조용히 한 모금씩 마시며 따분함을 달랬다.

그는 대기실 벽에 있는 공중전화에 눈길을 돌렸다. 얼마전까지 동창모임에서 미혼이라며 애교를 부리던 여자가 생각났다. 그는 수첩을 꺼내서 전화번호를 뒤졌다. 약간 기분이 야릇하다. 전화기를 들고 카드를 넣었다. 전화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드를 받아들였다. 우웅ꠏꠏ 하고 전화음이 떨어졌다.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먼 파도소리처럼 신호가 간다. 그와는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여보세요하는 동창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냥 끊었다. 학창시절 그녀와는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나온 아내는 지쳐 수척한 얼굴이지만 생긋 웃으며 “기다리느라 수고했어요.” 라고 말하며 그를 위로했다.

신호대기에 차가 섰을 때에 그는 아내에게 가벼운 포옹을 했다. 후사경에 비친 뒷차의 운전자가 야릇한 미소를 띠며 비웃는다. 조금이라도 지친 아내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순간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이 분위기를 깼다. 그가 “여보세요.”하고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다. 그는 재빨리 끊었다. 아내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잘 못 걸려온 전화라고 말했다. 그녀에게서 요즘 연락이 뜸한 상태여서 그는 일시에 달아올랐다. 옆의 아내를 망각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와의 살을 섞는 일에만 생각이 팔려 신호가 진행으로 바뀌었지만 차를 움직이지 못했다. 뒷차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으르렁댔다. 아내가 놀라 그에게 무엇을 생각중이냐고 물었다. 그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피곤을 이유로 아내에게 핸들을 맡겼다.

공중전화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음성은 초조함에 지쳐 있었다.

“왜 안 나오는 거야?”

“지금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약속이 틀리잖아, 자기 그러지 말고 나와줘라, 응?”

그녀는 교태로운 음성으로 애교를 부렸다. 그는 아쉬웠다. 시험관 아기시술 때까지 관계를 억제하라는 의사의 지시가 괴롭기만 했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지속될 수 있고 가정의 책임이 없다면, 차라리 그 순간을 영원히 택하고 싶은 눈먼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실에는, 몇 명씩 조를 이루어 들어간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들로 가득했다. 신문을 이유 없이 만지작거리거나 비치된 월간지를 뒤적이기도 하고 무료와 초조를 달래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는 이도 있었다. 난자채취의 경우 남편이 꼭 기다려야 한다. 그 뒤에는 남편의 정액이 필요했다. 옆에 젊은 남자들이 같은 심정으로 앉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철조망이라도 쳐 있듯 서로 말이 없다. 

간호원이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배우자를 찾고 있었다. 그는 간호원이 내주는, 아내 이름과 번호가 적힌 비커에 정액을 받아다가 주었다. 간호원은 매우 사무적인 음성으로 “잠시 더 기다리세요. 정액이 시험관 아기를 하는데 부족하면 한 번 더 받아야 됩니다. 결과는 삼십 분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옆자리에 시어머니인 듯한 여인과 아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가 자신에 찬 표정이다.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면 새장가를 들이겠단다. 여자 측의 결함이다. 한켠에도 장모와 사위인 듯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벌써 세 번째의 시도라며 여인은 산이 무너지는 한숨을 내뿜는다. 남자 측에 결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누가 불임인지 스치는 공기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아내는 초주검이 되어 수술실을 나왔다. 지금처럼 고통스러울 때면 더욱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는 병원을 나와 전화를 걸었다. 다시 듣고 싶은 음악같이 젖어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산뜻한 감미로움이 어렸다. 선천적이었다. 약속된 모텔에서 일을 치른 후 나른한 만족감에 젖은 그녀는 “자기야? 나 지금 위험한 시기야, 어떻하지?” 라고 말하며 뱀눈처럼 흘기고 바라보았다. 달콤히 미치지 않을 수 없는 흡입력이 강한 여자, 침실 안과 밖이 전혀 다른 여자. 하지만 나긋나긋한 매너에 흘러넘치는 교양미는 언제 보아도 요조숙녀였다.

아내는 침실에서 항시 통나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아내의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침실에 아늑하게  촛불을 켜 놓고 감미로운 음악도 틀어 놓았다. 그러나 아내는 그의 손길이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있다. 어느 날이었다. 그가 요구하자 “예수는 동정녀의 몸에서도 태어났어요. 오늘은 임신 가능한 때가 아니에요.” 라며 거부했다. 뒤이어서 “자기는 몸이 좀 약하므로 모든 것을 억제해야 해요. 나는 자기의 완전한 아내가 되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 정숙한 아내라는 명분을 앞세워, 배란기 이외의 잠자리를 상당히 불결한 것으로 생각했다. 관계를 가질 때도 아내는, 늘 다른 생각을 했다. 한창 달아오른 그가, 가슴 아래서 초점이 풀린 시선으로 옆을 응시하는 아내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 거야?” 아내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을 생각했어요.” 하고 말했다. 아내의 일상은 늘 기도였고,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신이었다. 

배아의 이식은 성공적이었다. 아내는 병실로 옮긴 후 곱게 잠이 들었다. 창밖의 건물 화단에 늦철쭉이 불을 지른 듯 붉기만 하다. 그는 신에게 간절한 기도드렸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주 하나님!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내가 시험관 아기를 무사히 마치게 하신 주님. 저희 가정에도 믿음의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아이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가정에 기적보다 더한 기적이 임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내를 만나서 기독교에 입문했지만 지금처럼 진실하게 기도를 드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새옷을 갈아입은 듯 마음이 한결 가뿐하다.

회진을 온 여의사는 오십대 초반의 희뜻희뜻한 머리에 매우 권위적였다. 사무적인 음성으로“잘 됐어요.” 라고 말하며 난자는 열 개가 채취되었으나 수정은 한 개만 되어서 한 개만 이식을 했다는 것이다. “배아를 세 개정도는 이식을 해야 되는데.” 라고 말하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또한 수정이 많이 됐으면 냉동보관을 해서 이번에 실패했으면 다음에 다시 이식할 수가 있다며 난자가 아깝다는 것이다.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수정이 한 개라도 된 것으로 봐서, 그는 마음이 조금 놓이고 가슴이 후련했다.

환자들은 대부분 시험관아기를 두세 번씩 시술을 하고 있었다. 어떤 환자는 다섯 번째 시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순간 불안한 마음이 머리를 스쳤다. 그의 표정을 보던 아내는 도리어 위로했다. 잘 됐으니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며 신을 믿어보자고 말했다. 간호원은 여러가지를 부탁했다. 주사는 매일 빠지지 말고 맞을 것이며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말고 편안히 누워 있으라고 했다.

집에 온 아내는 밝은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아내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을 것같았다. 가끔 아내의 배에 귀를 대어보면 아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는 기대에 들떠 있었고 모처럼 미소를 잃지 않았다. 베란다에 나와 밖을 내다보며 “결혼생활이 늘 이렇게 행복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부친이 상경했다. 누워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오늘은 며느리가 한결 대견스러워 보인다며 가져온 보약을 다려 주었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임신반응 검사를 받으러 아내와 같이 병원에 갔다. 임신을 확신하는 아내는 첫 직장을 나가는 회사원처럼 들떠 있었다. 배 한 번 불러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아내. 간호원의 호출을 받고 아내는 검사실로 갔다. 그때였다. 이 병원에 올 때부터 유독 두리번거리며 눈길이 마주쳤던 중년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다가왔다. 그에게 꼭 할 말이 있다며 메모지를 주고 갔다. ‘아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연락하세요.’ 라는 말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내는 검사가 내일 나온다고 기뻐하며 출산과 아이의 양육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왠지 머리가 무겁고 불안하다. 부친도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쫓기는 범인처럼 두근거렸다.

정신과 의사는 제시한 처방전을 본 뒤 첫내원환자에게 의례적인 가족관계와 병력을 묻고 기록한 다음에 증세를 물었다.

“가슴이 답답치 않으십니까?”

“예, 그리고 입술도 하얗게 탑니다.”

“한숨이 자주 나오지요?”

“예, 또한 현기증도 심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시험관 아기의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 적어 온 약은 어떻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약은 졸음을 동반하지 않는 약이라서 직장인에게는 적합하지만 최근에 개발된 신약이 있다며 그 약을 주겠다고 말했다. 일단 삼 일정도 복용하고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있으면 다시 오라고 했다.

그의 정자가 정상이 아닌 것은 정신적인 영향이 많은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노이로제 증세를 비뇨기과 의사들은 많이 지적했다. 신경증 증세는 어려서부터 시작됐다. 홀로 쓸쓸하고 허전한 것이 소아성 노이로제라는 걸 안 건 최근이다.

그가 최초의 소외감을 느낀 건 초등학교에 가기 직전인 일곱 살 때였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아이들은 흔적이 없었다. 형들과 함께 읍내에 극장구경을 갔다는 것이다. 그날 아이들을 기다리며 동자석처럼 동구 밖만 응시하던 허전함이 그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의욕적이고 적극적이지만 중요한 서류를 주면 찢여버리는 버릇이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그가 찢은 건 사실이다. 고 2때, 어느 날 수업료 미납 학생들을 방과후 따로 모아 놓은 담임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납부 독촉 통지서를 만들어 주었다. 창피한 설움과 열등의 반항심이 엉켜 담임 앞에서 영웅스럽게 찢었다. 그때 담임의 눈빛이 두고보자는 듯이 이글거렸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업을 마칠 때까지 납부금은 매번 꼴찌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동급생들의 눈길 또한 곱잖았다. 요즘 동창들을 만나면 너 참 많이 변했다. 그때는 이상했잖니? 라고 말하며 반문한다. 그는 동창모임에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열등의식이 되살아난다.

또 그의 정자가 정상이 아닌 이유 중의 하나는, 군에서 화공약품을 취급했다. 취급지침이나 설명서 없는 외국 약품으로 장비들을 방부처리했다. 그 약품 중독으로 몇 번을 군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장비를 세척할 때 쓰던 솔벤트가 불임을 유발한다는 것을 안 것도 얼마 전이다. 그때 맨손으로 물을 만지듯 다루었다.

그는 매우 짜증스럽다. 잡생각이 선율이 흐르듯 물결친다. 약기운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복용하고 몇 시간이 지났다. 그는 이번 약이 처음이라 그런지 깰 때에 머리도 아프고 몹시 나른하다. 한 번만 더 복용해 보고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다시 약을 바꾸어야 겠다. 술취해 실수한 다음날 후회할 때의 기분이다. 어쩐지 짜증스럽고 괜스레 고함이라도 치고싶다. 이번 약은 정도가 매우 심한 것 같다.

아내는 퇴근한 그를 보고도 누워 목례만 할뿐이다. 방마다 벽에 가득한 성구들만 희망으로 환할뿐, 냉기가 집안 구석구석 가득했다. 부친은 풀이 죽어 있었다.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반응이 없다며 주사를 중지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예상이나 한 것같이 무덤덤하다. 그는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며 아내를 위로했다.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몇 군데 친우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잊혀졌던 몇 년만의 동무들도 있었다. 그들은 반갑게 좋은 일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모두 그가 아이가 있어서 전화를 한줄 알고 반가워 했다.

부친은 시골로 내려가기 전에 그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나즈막하게 말했다.

“너 어떻게 할려고 그냥 있느냐? 심각하게 생각해라.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긴다 ...... 대가 끊겨. 다른 여자를 봐서라도 애를 낳든지, 이혼을 해라. 위자료는 내가 시골에 재산을 정리해서라도 줄테니까. 조상님께 면목이 없구나.”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죄인처럼 듣고만 있었다. 절벽 앞에 선 것처럼 암담하다. 연로한 부친의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아, 불임의 원인을 말하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의지가 된다면 붙들고 싶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어느 쪽도 빈 벽이 없이 성구로 가득 찼다. 그는 중년 여인한테서 받은 메모지를 쥐고 거실을 서성였다. 그는 냉장고에서 주스를 한 컵을 가져다가 소파에 앉아 조금씩 마셨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전화기를 들고 메모지에 적힌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몇 번의 신호가 물결치듯 갔다.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그가 몇 마디 건네자 조건 없이 만나자는 것이다.

주로 장년층이 이용하는 약간은 촌스러운 다방이다. 요즘 어울리지 않는 구식 이발소 그림 같은 풍경화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제법 품위 있는 족자가 한 점 있다. 그는 무료함을 달래려고 신문을 뒤적였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조금은 초조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중년 여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여인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도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자리를 권했다. 여인의 눈매 어디쯤 간사함이 흘러내렸고 목소리는 매우 낭랑했다. 여인이 자신 있게 말했다. “정말로 마음 고생이 심하겠어요. 일정액만 지불하면 조건 없이 애를 낳아주는 여자를 소개해 주겠어요. 대리모들은 모두 출산 경험이 있어 애를 가질 수 있어요. 그렇게라도 해서 애를 낳아 가면, 처음에는 아내가 거부하다가도 키우는 정이 들면 나중에는 아내 쪽에서 아이를 더 좋아합니다.” 이제 갓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제법 근엄한 표정이다. 자못 설득조로 말하고 돌아갔다.

그는 요즘 들어 아내가 점점 싫어진다. 옷깃만 보아도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이제는 술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 오고 집에 가기 싫은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험관 아기의 실패 원인이 나에게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녀가 요즘 더욱 떠오른다. 웬일인지 그녀에게서 연락이 없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고혹적인 눈웃음치던 그녀. 리비도가 식욕에 앞서는 것 같고, 이성보다는 감성적일 때가 매우 인간적이라고 말하던 그녀였다. 그도 그녀와의 잠자리가 제일 편안했다. 애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궁금해 전화를 했다. 그녀의 딸아이가 받았다. 아직 발음이 서툰 아이는 다짜고짜 남자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아빠 올적에 피자 많이 사 오고 껨보이도 사와야 돼” 하고 제법 응석이다. “후휴......” 그는 숨을 쉬었다. 결혼뒤 정상적으로 낳았으면 그의 아이는  저보다 훨씬 클 것이다. 그는 차마 대답을 못하고 끊었다.

그는 중년 여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중년 여인은 물고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낚시꾼처럼 매우 끈질기고 조리 있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만나자는 것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약속 장소에 이십 대 후반의 여자와 함께 나와 있었다. 그 여자는 이혼녀였고 아이를 둘 낳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개성이 뚜렷한 마스크에 키가 크고 아직은 매우 탄력있는 피부였다. 그와 둘만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중년 여인은 자리를 떴다.

그 여자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몇 분쯤 걷다가 적당히 붉게 손짓하는 레스토랑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 모처럼 대하는 신세대들의 분위기에 어색하기만 했다. 아직은 십 대후반쯤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꼬나문 담배에 자주 눈길이 갔다. 마주치는 그의 시선은 거북하기만 했다.

맥주를 몇 잔 마신 그 여자는 가벼워진 분위기에 마음이 놓였는지, 자연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여상을 졸업 후 상경해서 회사 경리로 있다가 직장 상사에게 순결을 잃었어요.” 그 여자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한숨을 깊이 내쉰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 미모 덕에 괜찮은 가문의 그 회사 직원과 연애 결혼을 했고 처음은 순탄했어요. 그러나 남편의 바람기는 끝내는 가정을 흔들고 말았습니다. 다른 여자를 안방까지 끌어들여 결국 이혼을 했고 낳은 아이는 돌려주었습니다.” 하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 여자는 다시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도 잔을 들어 그녀와 가볍게 부딪혔다. “쨍”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중년 여인의 손길이 닿았어요.” 그리고 애 없는 가정에 아이를 낳아 주고 사례비를 받았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해서라도 애를 낳는 것이 나을까? 애 없이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는 건가. 입양하는 방법도 있는데.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까. 아내는 믿음의 확신이 있는데, 좀더 기다려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는 몇 번을 고심 끝에 다시 그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세련된 차림으로 나왔다. 언뜻 보면은 아직 미혼처럼 보였다. 그 여자와 합의해서 일단 액수를 정했다. 반은 선불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애를 낳아 데려올 때에 지급하기로 하고 합의서를 작성했다. 그 여자는 액수에 상당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 제가 틀림없이 아들을 낳아서 안겨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도 마음이 놓이는 듯 가볍게 미소 띠었다. 중년 여인은 그 자리에서 소개비로 일정액을 양쪽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생리주기에 맞추어 가임 기간을 산정하고 약속 날짜를 정했다. 교외의 호텔을 그 여자가 제시했다.

아내는 감정을 억제하는 것 같았지만 짜증이 잦다. 또 눈에 띄게 수척해 갔다. 외출이 잦고 투정을 많이 부렸다. 아내는 그에게 말했다. “자기, 담배 한 값만 사다줘요. 속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아요.” 그는 아내가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내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기만 했다.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은 것 같다. 집안에 들어오면 담배 냄새가 독하고 역겹기만 하다. 어떤 날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내뿜으며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다가, 또 한 모금 빨고 허공을 응시하며 “자기가 너무 불상해.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자기 미안해” 하며 마음을 추스르다가 다시 울기 시작한다. “둘이만 마주보고 어떻게 살아요” 하고 하소연했다.

초인종을 눌러도 아파트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눌러도 딩동딩동만 연거푸 울릴 뿐 응답이 없었다. 그는 순간 당황했다. 아내가 분명히 있을 시간이다. 퇴근하기 전에 전화도 했었다. 그는 열쇠로 문을 열고 다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방으로 갔다. ‘구하라 얻을 것이다.’ 먼저 벽에 적힌 성구들이 눈에 들어 왔다. 아내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아내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입에서는 술냄새가 났다. 아내는 다른 날보다는 야한 화장에, 가슴이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를 보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이 탓인지 아내의 진한 화장기가 한물간 작부의 어설픈 모습같았다.


                                 


종업원이 찻잔을 가져갔다. 그는 한시간 가까이 그녀와  보이잖는 견고한 장벽이 가로놓여 무서운 침묵만 흐른다. 입을 열듯 말듯 좀 불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신화보다 현실이 더 신화적이라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는 엉뚱한 말을 하며 슬그머니 머리를 돌린다. 깊은 한숨을 쉬는 그녀.

그는 봄의 들처럼 명랑한 그녀에게 저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곁에 있으면 껴안고 싶은 충동이 드는 평안과 정감이 넘치는 그녀에게 서서히 냉기가 어린다. 눈빛만 봐도 숨소리만 들어도 기분을 파악하는 그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결별을 제의하려는 걸까? 그녀는 입이 타는 듯 물 한 컵을 더 주문했다. 종업원이 물을 가져다 놓으며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호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컵을 들고는 여러번 목을 축였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다시 굳어진다. 향기없는 조화<造花>같다. 얼마간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다소 여유를 찾던 그녀는 다시 한숨을 짓는다.

“대체 지난 한달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어?”

“있어요......”

그녀는 입을 열듯말듯 머뭇거린다. 다시 가벼운 침묵이 흐른다. 그녀는 탁자 위에 성냥개비를 몇 개 부러뜨리더니 머리를 푹 숙이고 차마 어려운 걸음을 옮기듯 입을 열었다.

“나, 실은 임신했어요.”

“응! 뭐라고?”

“나, 애를 가졌다고요.”

“그거 남편의 애 아니야?”

“남편은 둘 째 낳고 사 년 전에 정관 수술했어요.”

그는 갑자기 앞이 캄캄했다. 무엇으로 한대 크게 맞은 것 같다. 손이 가볍게 전율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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