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의도에서 잠실까지(단편소설)

윤여설 2007. 7. 13. 16:44

 

 

(원고지 89매)    

                     여의도에서 잠실까지


                                                          윤  여  설


   땅거미가 지자 강물은 금빛으로 찰랑대고 멀리 네온사인이 손짓하듯 반짝인다. 어둠에 휩싸인 도시는 조명들로 황홀하다. 둘러봐도 불빛이 불빛을 부르듯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는 지금 나의 왼손을 깍지끼고 있다. 한 번 뿌리쳤으나 빠져나오기는 어려웠다. 아니, 그냥 형식적이었는지 모른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고 푸근하다. 중매를 서 준 적이 있는 그가 사준 장미 한 다발이 내 옆에 놓여 있다. 
   유람선은 고동을 울리더니 선착장을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간다. 그는 양복 상의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여의도 선착장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선착장은 떠나가는 유람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주위를 밝히던 가로등이 아쉬운 듯이 배웅한다. 잘 가라는 듯이...... 곧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리없는 울음을 조용히 삭이는 것일까. 나도 약혼자가 떠날 때 저렇게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서른다섯 해의 정열을 고스란히 바쳤으나 이 유람선처럼 조용히 갔다. 지금 그가 내 손을 깍지끼듯 다른 여자가 약혼자의 손을 깍지끼고 떠난 것은 아닐까. 그의 손은 뜨겁기도 하다. 난로 옆에 있는 것 같다.
자원봉사가 끝나면 그는 가끔 저녁을 사기도 했다. 나는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결손가정을 돌보지만,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는 그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뒷풀이 때에 술을 한 잔 마시면 어린 시절을 털어놓기도 했다. 결손가정에서 자랐다며 어린 시절의 사회의 냉대와 설움을 얘기했다. 그리고 아직도 교사를 혐오하고 있었다. 나는 친척집에서 자란 때도 있었습니다. 내 어린 시절 가장 큰 적敵은 교사였지요. 늘 수업료 때문에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눈은 우수에 젖여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교실에서 없어진 물건들이 있으면 모두들 나를 의심했습니다. 그는 결국 목에 가득한 울음을 참느라 말을 못했다. 그리고는 술잔을 입에 댔다가 놓았다. 그는 소주 몇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자주 토했다. 가볍게 맥주를 몇 잔 한다든가 아니면 음료수를 마셨다. 건강한 체격에 묵묵한 그는 술이 매우 약했다. 나는 소주 반 병정도는 거뜬하고 한 병도 어렵지 않다.
   오월의 밤은 피부에 스치는 공기부터가 야릇하다. 조금 아릿하고 푸근해 솜에 얼굴을 묻은 것 같다. 불을 밝힌 가로등이 강물로 내려와 촛불놀이를 하고 있다. 간간이 빌딩의 불빛도 강물에 얼굴을 내밀고 놀고 있다. 모든 불빛을 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저 강물이 답답한 내 마음도 싣고 갔으면 좋겠다. 서른다섯의 여자나이, 지금은 마땅한 남자도 없다. 가끔 재취자리만 혼담이 오갈 뿐이다. 너무 눈이 높았을까. 초등학교 교사라는 것만을 내세운 자만심이 나이만 먹게 만들었다. 외모를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는 아버지를 닮았는지, 작은 키에 굵은 허리, 큰 얼굴에 가는 눈. 그러나 나도 이십 대 초반에는 인기가 있었다. 그때는 내가 생각해봐도 쾌 귀여웠다. 
   은비늘처럼 빛나는 강물은 너무도 아기자기하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린다. 휴일날 노처녀의 일상은 따분하다. 할 일이 없다는 말이 맞다. 평일에도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돌아가면 오후 2시부터 퇴근하는 5시까지 빈교실에서 우두커니 먼 건물을 바라보거나 멍하니 앉아 있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퇴근하려면 혼자 사는 아파트에 갈 일이 암담했다. 가끔 결혼한 동창들의 집에 가서 저녁을 먹거나 후배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었고 영화관을 기웃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일 년에 두 번씩 찾아오는 심한 우울증. 그 우울증이 찾아오면 나는 짜증을 동반하며 음색이 변했다. 그리고 만사에 의욕을 잃고 가슴이 답답하다. 사람이 싫고 가르치는 일도 귀찮으며 작은 일에도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도 예전만큼 성의가 없다. 그리고 불면에 시달리며 한숨과 눈물만 흘린다. 배란다에 가득한 술병들. 불면에 시달릴 때마다 위스키를 마셨다. 잠이 안와서 한 잔 마시고, 서러워서 한 잔, 고독해서 한 잔, 배심감에 한 잔 마시고...... 혼자 취해 잠이 들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면 침대머리 위 전기스텐드 옆에 술병과 잔이 놓여 있었고 오징어나 과자부스러기가 배드에 어지럽게 널려, 나와 동침하고 있었다. 어떤 날 아침은 술이 깨지 않아 결근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내가 교사라는 직업만 아니었으면 벌써 결혼을 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사표를 내고 싶었다. 그 우울증이 지난지가 며칠 되지 않았다. 

 


   오늘도 그랬다. 혼자 먹는 식사의 따분함.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우유와 햄버거로 때우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자니 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를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낼까. 한참을 생각 끝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대하기 가장 편하고 친절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들고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번호판을 눌렀다. 아득히 물결치듯 신호가 갔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제가 오늘 시간도 있고 해서 선생님좀 한 번 뵐려구요." 무척이나 궁금해 하는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온다.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요."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리고 상당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오전에는 교회에 다녀와야 됩니다. 오후 두 시까지 을지로 입구역 만남에 광장 벤치로 나오세요.
나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앞머리를 치켜 세웠다. 그리고 검정티에 롱스커트를 입었다. 립스틱도 좀 진한 밤색으로 칠했다. 얼굴의 화장도 화사함보다는 무거운 느낌이 들도록 했고 검정구두를 신었다. 악세사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을지로입구역에 약속 시간보다 10분정도 일찍 나갔다. 내 앞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활기차 보였다.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도 모두 기쁨에 들떠 있는 것 같다. 기다리던 연인들이 서로 만나면, 몇 년동안 헤어졌던 것처럼 손벽을 마주치며 환호성하는 경우도 있다. 휴일이라서 신랑 신부측의 하객으로 참석했던 남녀들이 오늘 처음 만나서 제 이의 미팅 장소를 정하느라 잠시 서서 얘기하는 광경이 많았다. 나도 남자를 기다린다는 기대에 조금은 들떠 있었다. 손거울을 꺼내서 자주 들여다 봤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5분 늦게 도착했다.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으며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휴일이라서 꽃을 사기가 힘들었습니다. 가게가 모두 문을 닫았나봅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그는 어딘지 진실해 보이기만 하다. 
   배가 방향을 바꾸어 잠실쪽을 향하자 선실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여의도에서 승선하셔서 서울의 야경을 즐기시는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희 문화유람선 한별호는 여의도 선착장을 8시에 출항하여 약 10노트의 속도로 항해하겠습니다. 그리고 뚝섬 선착장을 경유하여 잠실 선착장에는 9시에 도착하겠습니다." 이어서 구명복 사용법이 선실 정면에 설치된 TV를 통하여 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약혼자와도 이 배를 탄 일이 있었다. 내가 약혼자를 만난 것은 대학원에서 였다. 그도 나와 같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유망 중소기업 경영자의 막내 아들이었으나, 어딘지 옹졸해 보이는 남자였다. 약혼자는 제기간 내에 학위를 취득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자 지도교수 밑에서 여자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논문에 대한 까닭없는 지적과 수용할 수 없는 핀잔, 노예 다루듯 하는 꾸지람. 잘 대해 주는 척하며 옆으로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감싸안거나, 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브래지어 끈을 만지는 것 등은, 징그러워도 어쩔 수 없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호텔에서 논문을 지도해 주겠다는 데는 아연 질색했다. 논문을 들고 연구실을 나올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상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도 교수가 완전한 지식의 견공으로 보였다. 학위취득을 위해 외국으로 유학간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요정으로 모시고 가는 횟수와 주머니에 넣어주는 수표의 양에 따라서 어렵잖케 학위를 취득할 수가 있었다. 학위를 취득해서 힘들게 강의 자리를 얻었어도 지도교수의 입김이 필요하다. 학계가 좁은 우리나라는 출신학교에 조회를 해서 지도교수가 노코맨트하면 그것으로 물 건너가는 것이다.
   배는 어둠을 가르며 한남대교를 지나고 있다. 그는 약혼자에 비해 학력은 뒤지지만, 믿음직하리만큼 건장한 체구에 진실해 보였다. 가끔 우수에 젖은 듯 해도 눈은 항시 총기가 있었고 약혼자보다 경제력은 약했지만 남을 도울줄 아는 남자였다. 지금 그와 보내는 이 시간이 아주 영원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유람선은 강의 중심에서 강남쪽에 가까이로 운행되고 있다. 저 강 건너 불밝힌 아파트들. 아직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나 아이들을 기다리는 여인이 마음을 담아서 내 건 등이라서 저리도 황홀할까. 나는 그때가 언제쯤일까. 나도 사랑하는 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놓고 알맞은 화장과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실내에 가족이 좋아하는 음악을 흐르게 하고 아이를 어르며 남편을 반기고 싶다. 그때가 언제쯤일까. 
   나와 동갑였던 약혼자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집안에 며느리들은 모두 박사출신들이야. 나만 박사가 아닌 아내를 얻을 수는 없잖아. 요즘까지 아버지는 나와 말도 하지 않아. 그 말 뒤에 약혼자는 알 수 없는 야릇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너는 처녀가 아니었어.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잊여줘. 약혼자가 떠나면서 남긴 말이었다. 사실 약혼을 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았었다. 특히 그의 부모와 형제들의 반대가 심했다. 내가 나이가 많고 집안 배경이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 교직을 발령받던 해에 회식자리에서 였다. 그 학교에서 가장 어린 나는 교장 옆에 앉게 됐다. 자연스럽게 교장에게 술을 따라주고 나도 한잔 받았다. 그 뒤로 교장이 저녁을 사겠다고 제의해 왔다. 직장에 장이고 또한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그리고 식사중에도 깜찍하게 애교를 부렸다. 이차를 사겠다는 교장을 따라가서 양주를 마셨다.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알몸이었고 교장과 함께 여관에 누워 있었다. 간부 선생들의 호의를 조심하라는 선배들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

 


   멀리 남산타워가 등불을 이고 서울의 밤을 지키듯 내려다 보고 있다. 강변도로의 가로등들이 모두 강물로 내려와 촛불놀이를 한다. 지금 영원히 놓지 않을 듯이 내 손을 깍지끼고 있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그가 왜, 남 같은 느낌이 안드는 걸까. 어째서 몇 년쯤 살을 맞대고 산 기분이 드는 걸까.  
   배가 제일 한강교 아래를 지나고 있다. 그가 갑자기 말을 건다. 저기 저 교각 아래를 보세요. 한 쌍의 새가 앉아 있습니다. 저 새가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희미한 보안등 빛 속의 교각턱에는 새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저 새가 원앙입니다. 앞쪽에 앉아 있는 뒷머리에 뿔같은 털이 있고 날개 안쪽이 부채처럼 펴져있는 아름다운 놈이 수컷이고요, 저 곁에 그냥 앉아 있는 오리같은 놈이 암놈입니다. 이 남자는 원앙에 대해서 왜 설명을 해주는 걸까.
   휴일이라서 선실은 시끌벅적했다. 거의가 연인들이었고 모두가 우리보다 젊어보였다. 간간이 일본 단체승객들의 말이 들렸다.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먹으며 다정히 어깨를 감싸고 즐겁게 웃는 연인들이 나는 너무도 부러웠다. 승객들 중에는 일어나서 선실 밖에 나갔다가 오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많이 밖에 나가네요."
   "예, 밖에서 보면은 새로운 느낌이 들 것도 같습니다."
   "우리도 밖에 나가볼까요."
   "예, 그럽시다. 하지만 바깥 공기가 차지 않을까요. 괜찮겠습니까."
   그는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모임에서 어디를 가거나 행사 때에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남자였다. 
배의 후미에 나왔다. 스크류가 감아내는 물들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뒤로 밀려나고 있다. 그의 양복 상의를 내가 걸치고 있었지만 밤의 강바람은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옆에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도 왼팔로 나의 허리를 감았다. 주위의 많은 남녀들이 밤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언젠가 약혼자와 낮에 이 유람선을 탔었다. 혼자만 감탄하고 즐거워 계속 얘기하며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너무 지루한 나머지 다른 생각을 했다. 약혼자는 해박한 것은 사실이자만 자기가 제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 외에는 없었다. 그 때도 선실 밖에 나왔었다. 약혼자는 주위에 여자들을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유전이 안되는 것은 없대. 나는 키가 큰 여자를 원했는데라고 말하며 내 머리에 손을 살짝 얹고는 그 높이를 자기 가슴 부위에 가져다 대보았다. 나는 매우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관계가 끝나면 꼭 다른 여자 이야기를 했다. 이마에 땀이 마르지 않은 채로 약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알몸으로 말했다. 지난번 여자는 아버지가 안계셔서 부모님이 반대했지. 아니면 그녀는 얼굴은 예뻤지만 음성이 너무 크고 거칠었어. 그래서 그만 두었지.
   강바람이 매우 차갑다. 자동차들의 불빛들이 흰실처럼 이어진다. 강변도로의 교각들이 야간 행군을 하는 전투병들처럼 강가에 서 있다. 내 머리가 바람에 날리어 그의 얼굴에 닿았다. 그는 내 허리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실까요"
   "......"
   나는 아쉬웠다.
   "박인혜 선생님, 감기드시겠어요. 지금도 상당히 피곤한 음색인데"
   "우리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요. 기분이 너무 좋은데요."
   한편으로는 나도 몸이 떨려왔다. 그가 손을 잡고 끄는데로 선실로 다시 들어왔다. 우리 앞 좌석에 시골에서 올라 온 듯한 노부부가 앉아 있다. 나의 부모뻘되는 연세다. 나보다도 걱정을 더 많이 하는 부모님들. 그러나 내가 결혼이 늦은 것은 부모님들 때문이다. 젊었을 때 두분 사이는 너무 안좋았다. 너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잠이 번쩍 깬다고 상이용사인 아버지는 말했다. 네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걸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너만 결혼시키면 죽어도 원이 없다는 부모님들. 동생들은 모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동생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축하는 해주지만 시기도 샘도 아닌 묘한 질투감.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휩싸여 부모님에게 까닭없는 화를 냈다. 

 


   나는 지방에서 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일 등을 놓쳐본 일이 없었다. 자연히 여자로는 안정되고 괜찮은 직업을 택하기 위해 교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초등학교 여교사라는 직업이 그렇다. 대학시절에는 남학생들이 적어 거의 여대와 마찬가지고 발령을 받아서도 교사의 75%정도가 여교사들이다. 조금 있는 남자들은 모두가 나이가 많은 기혼자들이다. 배우자감 정도의 남자들과는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또한 품위를 요구하는 일반인들 때문에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다. 지방 출신인 나의 경우는 중매도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지간한 자리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나는 교수와 결혼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옆에 이 남자럼 멋진 사람이 나타나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결혼하고 싶다.
   그와 한팀이 되어 제가복지 자원봉사를 했다. 결핵을 앓는 지하방에 사는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얼마후 사망했다.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후원자들로부터 들어온 약간의 기부금을 찾아오던 내가 수표를 소매치기 당했다. 나는 즉시 은행에 가서 분실신고를 했다. 소매치기는 아직 찾아가지 않았다. 다음날 은행에서 연락이 왔다. 수표를 바꾸어 갔다는 것이다. 신고접수를 받은 담당자가 지급정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은행측은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분실자의 실수라며 어쩔 수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항의를 하자 반반씩 손해를 보고 반절만 되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아니면 은행감독원에 민원을 넣든지 재판을 청구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점장을 찾아가서 항의를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우리는 개인돈이 아니라고 사정을 설명했다. 장례비용이라는 말도 했다. 통하지 않았다. 
은행의 셔터를 내릴무렵, 그는 상가喪家로 돌아와서 혼자 어깨에 관을 매고는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지점장실에는 관에서 나오는 포로마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은행측의 차장은 즉시 사과를 했고 돈을 모두 되돌려 주었다. 과묵하기만한 그는 어떤 일을 계획하면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힘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에 우리는 그를 코뿔소씨라고 불렀다. 
   배가 뚝섬 선착장에 도착했다. 일부 승객들이 내리고 탔다. 우리 옆에 앉았던 젊은이들도 내렸다. 인생에서 모든 일들이 이렇게 배에서 타고내리듯 수월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린 사람보다 승선한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 대부분 연인들이었고 가족동반인 사람들도 많았다. 선실은 활기가 넘쳐 약간은 소란했다. 그는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며 나의 왼손을 여전히 깍지끼고 있다. 나도 말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아이 음성이 들린다. 내가 머리를 옆으로 돌리려는 순간. "어머 선생님 안녕하세요" 우리반 여자 아이였다. 그는 손을 재빨리 놓았다. 교사라는 직업은 늘 조심해야만 한다. 언제 어느 곳에서 아이들과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교사에 대해 엄격한 도덕을 요구하지만 교직이 성직도 아니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 외에는 똑 같은 생활인일 뿐이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희 누구랑 왔어?" 내가 물었다. "엄마랑 아빠랑 왔어요." 옆에 있는, 한 번 찾아왔던 학부형이 연희의 엄마였고 같이 서 있는 남자가 아빠였다. 그들이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는 연희가 성격도 명랑하고 학습태도도 좋다고 말했다. 연희 아빠는 잘 부탁한다면서 음료수를 사왔다. 연희 부모님들은 미안했던지 멀리 떨어진 앞자리로 갔다. 

 


   배는 잠실에 가까이 향하고 있다. 그는 아무 말이 없다. 노처녀의 혼자 뒤척이며 잠 못드는 봄밤의 아리함. 독신의 밤은 너무도 아린 상처였다. 어떤 때는 벌떡 일어나, 길에 가는 두목같이 건장한 사내와 한몸이 되어,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 하나를 낳고싶은 맘이 한 두 번 아니었다. 선실에서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이 유람선은 종착지인 잠실 선착장에 도착되겠습니다."
   언젠가 약혼자에게 등산을 가자고 했을 때에 그는 거절했다. 산은 옷이 젖어 끈적거리는 것이 싫다며 차라리 핼스클럽에서 땀을 한 번 확끈하게 흘리는 것이 더 개운하다고 했다. 시골보다는 도시의 뒷골목이 더 정감 있고 자연의 경치보다는 한 편의 삼류 비디오가 더욱 값지다고 말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맹인의 바구니에 동전을 넣으면, 그러니까 습관이 돼서 또 나온다며 다음부터는 주지 말라고 했다. 
   약혼자와 같이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를 걸었다 모두들 나보다 젊고 늘씬한 여인들이 지나갔다. 갑자기 약혼자가 없어졌다. 주위를 둘러 봤다. 불과 얼마전까지 내 곁에 있었다.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가며 찾아봤다. 약혼자는 어느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건물 안에는 늘씬한 키에 초미니 스커트,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인 우윳빛 피부의 여인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약혼자는 그 여인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내가 시험삼아 앞에 몇 번을 스쳐 지나가 봤다. 나를 의식하지 못했다.
   배가 잠실 선착장에 도착했다. 연희가 다가와서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연희 부보님도 와서 인사를 했다. 연희의 가족들이 멀어지자 그는 오른팔로 나의 허리를 끼고 걸었다. 너무나 안락하다. 세상에서 가장 푸근함을 맛보는 것 같다. 지금이 천국이 아닐까. 나는 집에 돌아가서 특별히 할 일도 없다.
우리는 고수부지를 따라 잠실철교쪽으로 걸었다. 강변에는 어둠을 틈타서 젊은 연인들이 앉아 진한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에게는 저런 추억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그가 나에게 키스라도 한 번만 해 줬으면...... 나의 허리를 잡고 말없이 걷고만 있었다. 강건너 별빛보다 화려한 불빛들. 어둠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그동안의 그 고통스럽고 끔찍하가만한 밤들이 언제였을까라는 느낌이들도록 상쾌하다.

 


   어제도 결혼식에 다녀왔다. 나와 매우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시집을 갔다. 하나씩 떠날 때마다 축하는 해주지만 시기와 질투가 났다. 특히 심할 때가 그들이 연애기간에 남자를 데려와 인사를 시킬 때다. 또, 직장에 총각이 부임해 와서 다른 여선생들과 다정히 대화를 나눌 때는,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그 여선생이 죽이고 싶도록 밉다. 남자를 접할 기회가 없는 나로서는 그들 앞에 서있면 얼굴이 벌개진다. 
   나는 드문드문 있는 매점에 가서 캔맥주 몇 개와 안주를 사왔다. 그리고 우리는 강물이 바라다뵈는 벤치에 앉았다. 나는 오징어를 찢어놓고 캔맥주를 따서 그에게 주며 말했다. "우리 건배해요." 그는 약간 당혹스런 듯했으나 캔을 부딪쳤다. 그는 마시면서도 말이 없었다. 그저 구의 터미널쪽에 보이는 아파트의 불빛만 바라보며 시계를 드려다 본다. 내가 말했다. "아직 아홉시밖에 안 되었어요." 그는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그렇군요." 그는 맥주를 조금씩 훌쩍이며 마셨다. 
나는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 앉았다. 그리고 애교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저기 강건너 불빛이 보이죠? 그는 사관생도보다 더욱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보입니다. 나는 결혼해서 저런 아파트에서 살고싶어요.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뒤에는 저렇게 산이 있는 곳에요. 오늘같은 봄밤에는 실내에는 잔잔한 클래식을 틀어놓고, 아니 약간 생동감있는 모짜르트에 세레나데 13번도 좋아요. 그때에 남편과 아이와 나는 즐겁게 얘기를 해도 좋고요. 아니면 남편은 책이나 신문을 보고 나는 아이들의 공부를 지도하거나 아니면 차를 끓이거나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할 거예요. 아니 가족 모두가 TV 앞에 모여 있어도 좋아요. 그렇게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이 남자가 대답했다. 그 꿈을 버리지 마세요. 곧 실현될 것입니다. 배우자가 없어서 결혼 못한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미래는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는 별로 말이 없다. 나는 어쩐지 이런 묵직한 스타일이 좋다. 내가 약간 수다스럽기 때문일까. 그의 가슴에 살짝 안겨봤다. 그는 양손으로 가볍게 끌어안더니 한 번 살며시 키스했다. 그의입은 달콤했다. 그리고 가슴은 넓고 더웠다. 아, 그와 사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어색했던지 나에게 말했다. "제가 휘파람을 한 번 불어볼까요?" "네 좋아요." 라는 대답이 무섭게 휘파람이 봄밤을 수놓는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따러 가고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주오.' 박자 하나도 틀리지 안고 정확하게 불었다. 한밤에 퍼지는 피리소리처럼 그의 휘파람이 강변을 풍요롭게 장식한다. 그때였다. 아래쪽에서 야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라는 야유가 들려 왔다. 아직 이십 대 초반의 남자 목소리였다. 그는 불던 휘파람을 중단했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 강가에 다정히 앉았다. 바로 발 아래 강물도 즐거운 듯이 출렁거린다. 그는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강물에 내려와 노는 불빛들도, 잠실철교에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들리는 바퀴소리까지도 나를, 우리를 축복해주는 것 같다. 아, 꽃같이 행복한 이 시간. 그와 오늘밤을 같이 지낼 수는 없을까. 나는 담배를 꺼내서 그에게 권했다. 
   "한 대 피우시겠어요."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 피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럴 때를 위해서 배웠어야 하는데." 
나는 불을 붙여서 연기를 깊숙히 들어마셨다가 내뿜었다. 다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더라. 아마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 일 것이다. 한 개피 피우고 출근하면 첫시간 수업이 끝날 때까지는 참을 수 있다. 그 뒤부터는 눈치를 봐야 한다.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교직원들은 모르고 있다. 연기를 내 뿜을 때마다 느낀는 이 후련함.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수업 끝 종이 울리기 일분 전에 화장실에 가야 한다. 한 대 피우고는 수업시작 종이 울릴 때까지 나올 수 없다. 언제 교사들과 마주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수업시작 종이 울리면 양치를 하고 구취 제거제와 향수를 뿌린 후에 교실로 간다. 아이들이라서 담배냄새를 용케도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 소풍을 갔을 때였다. 담배를 피우고 왔을 때, 여자 학부형들은 알고도 말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어느 한 아이가 "선생님 담배냄새가 나요."라고 말했다. 나는 당황에서 어쩔줄을 몰랐다. 학부형의 전화로 교장이 알게 되었다. 결국 학년이 바뀌기전에 전출 신청을 해서 학교를 옮겨야 했다. 
몇 달전에 그가 직장 선배와 선을 보여줬었다. 나와 동갑네기였다. 그 총각에게 보기좋게 퇴짜를 당했다. 사실 일찍 결혼만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한참 줏가가 오르는 이 십대중반에 시집을 갔을 것이다. 나를 걱정하고 있을 부모님들.
   여고시절 집에 오면 늘 아버지는 한숨만 쉬거나 매일 어머니와 심하게 다퉜다. 안방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고철에 불과한 무공훈장.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었으나 월남전에서 총상을 입고 제대했다. 척추에 손상을 입었으며 휠체어에 의지해서 생활했다. 키가 크고 흰 피부에 항시 단정한 어머니는 음식솜씨가 좋고 노래를 잘 불렀다. 마을의 잔치집이 있을 때마다 불려다녔다. 찾아가 보면 어머니는 늘 다른 남자와 다정히 앉아 있었다. 한참 곤하게 잠들었을 때였다. 이마가 계란처럼 부풀어오른 어머니는 나를 깨웠다. "인혜야, 공부 열심히 하고 동생들 잘 보살펴라." 이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술로 날을 보냈다. 장녀인 내가 집안 살림을 했다. 또래 계집애들의 차가운 시선과 밥짓고 빨래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외가에 가서 어머니를 찾아달라고 했다. 갈 때마다 모른다며 외할머니는 울었다. 내가 동생들을 데리고 외가에 같다. 외할머니는 수척한 동생들을 보더니 어머니를 데려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인줄 알았다. 어머니는 눈썹을 진하게 그리고 뽀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인혜야! 너 꺼칠해 졌다."
   "엄마, 같이 살아요. 동생들이 찾아요."
   "알았다. 언젠가 곧 너희들을 데려올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라."
   "엄마, 집에 돌아와요."
   "집에는 안가겠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손에 상당히 많은 돈을 쥐어줬다.
   얼마가 지난 뒤 나는 다시 외가에 가서 어머니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떼를 썼다. 외할머니는 나를 데려다 줬다. 어머니는 주점을 하고 있었다. 방에는 어머니보다 젊은 남자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나에게 "네 아버지가 될 분이다. 인사해라."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곧 아이들을 데려와야겠어요." 라고 말했다. 나는 기겁을 하고 뛰쳐나왔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에 쓰고 울었다. 다시는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낯선 여자 구두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왔다. 삼 년만이었다. 그 뒤로도 부모님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부모가 다툴 때마다 나는 무섭게 결심했다. 결혼이 저런 것이라면 나는 시집가지 않아. 나는 혼자서 행복하게 잘 살 것이다. 
   내가 시집을 가려고 생각한 때가 서른한 살이었다. 감기라도 앓는 밤이면 무인도에 유배된 느낌이 들었다. 서서히 사람이 그리워지며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친구들이 애를 안고 올 때마다 부러워 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정에서 풍겨나오는 사람 사는 훈훈함이 나도 모르게 마음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제 맞선을 보면 상대방이 나를 보이콧트를 놓겠나 안놓겠나를 먼저 생각한다. 결혼상담소를 통해 겨우겨우 찾아낸 동갑의 총각들과 선을 보면 거의 딱지를 맞는다. 그럴 때마다 죽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너무 늙어보인다는 것이다. 지금은 최소한 나보다 넷, 다섯은 더 먹은 남자와 선을 봐야 하며 그들은 거의가 결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 눈가에 느는 잔주름, 공처럼 굵은 허리,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입맛이 당겼다. 토할 정도로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주로 오징어나 햄버거를 먹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배도 고프지 않다.  
   전화로 죽고싶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괴로울 때마다 생각나는 그는 속으로는 뻔히 알면서 위로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밖을 내다 보세요. 나무들이 파랗지않습니까. 하늘이 파랗지요. 어제는 폭풍우가 지나갔잖아요. 견디지 못했으면 나무가 어제보다 더 파랗겠습니까. 침착하게 나를 다독여 줬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풀어졌다. 
   내가 앞으로 결혼을 하더라도 애가 딸린 사람과 해야 할 것 같다. 어쩐지 나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남자는 나에게 누나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나보다 두 살이 아래다. 나는 이 남자 곁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앉았다. 그 때였다. "찌르릉 찌르르응"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 지금 친구를 만나고 있는 중이야. 여기 한강시민공원이야. 모처럼 강바람이 산뜻하구먼. 바로 들어갈께. 걱정마, 술은 한잔도 안했어, 자기 나 술 약한 것 잘 알잖아. 알았어, 바꿔줘. 지운아, 그래 교회는 잘 다녀왔어, 오늘 교회에서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쳐 주셨어? 응응, 그래그래, 우리 지운이가 뭘 갖고싶지. 알았어, 아빠가 곧 들어가면서 사다주지. 그래 끊어." 
   "선생님! 집에서 온 전환가봐요."
   "예 아내한테서 온 전홥니다."
   안돼. 그를 보낼 수는 없어!
   "선생님 맥주캔이 한 개가 더 남았어요. 이것 마저 마시세요."
   "맥주라 괜찮키는 하지만 정신이 얼떨떨한데요."
   "선생님 이것가지고 왜그러세요. 겨우 맥주인걸요. 저도 같이 마실께요. 우리 나눠 마셔요."
   나는 몇 모금을 마시고 건넸다. 그는 나머지를 마시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박 선생하고 봄밤에 강바람을 쐬며 앉아 있으니까 십 년은 젊어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늘에 별도 보고 젊은 연인들 데이트하는 것도 보고 하니까 밤이라도 세울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집에서 부르네요. 이제 돌아갑시다."
   그래,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구나. 내가 그의 부인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내가 공부도 더 많이 했고 직업도 좋을 텐데. 나는 그의 허리를 꼈다. 그도 내 허리를 잡았다. 우리는 다정히 걸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서 잠실역이 가깝습니다. 선생님은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세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호젓이 강변도로 밑의 지하도를 빠져나왔다. 


   아파트가 도로 양옆으로 즐비하다. 그는 잠실역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었다. 내가 말했다. 우리 그냥 걸어요, 거리도 얼마 안되잖아요. 집에 가서 누울 일이 끔찍하다. 아니, 이 상태로 집에 가면 며칠 밤은 불면으로 지새울 것 같다. 
   내 몸에도 어머님의 피가 흐르는 걸까. 얼마전, 공허감에 몸부림치던 밤, 잠깐 눈부친 사이 그와 격렬한 사랑을 나눴다. 나는 온몸이 땀에 젖여 있었다. 너무나 짧고 아쉬운 꿈속이었다.
   언젠가 동창들과 야유회를 갔었는데 나와 친한 동창이 남자 친구와 동행했었다. 동창의 남자 친구는 외모나 직업 등이 나무랄 데가 없는 남자였다. 그는 동창의 눈치를 보며 나에게 더 호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학교로 전화를 해 왔다. 그는 끈질기게 만나자고 요구했다. 너무도 끈질긴 요구에 그를만났다. 그는 너무도 근사해 보였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충동을 억제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는 전화하지 마세요. 친구의 애인을 이렇게 만난 것도 양심적으로는 용서가 안됩니다."
   "저는 선생님이 더욱 정이 갑니다. 한 번 뵈었지만 꼭 사귀고 싶은 형이었습니다."
   아, 저렇게 멋진 남자. 나는 마음이 떨리고 숨이 가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내 친구가 싫으세요.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요."
   "선생님이 만나주신다면 그 여자와는 관계를 끊겠습니다."
   "그럼 내 친구가 싫으세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정이나 그러시면 친구에게 지금 전화하겠어요."

 

   지금 둘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내가 그를 만났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주위에 아파트 상가에서 노천에 파라솔을 펴놓고 있었다. 언젠가 약혼자하고도 들렀던 곳이다.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무나 부러웠다. 나는 그 팔을 끌며 "저기에 앉아서 좀 쉬었다 가지요." 라고 말했다. 그는 갈등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집에 일찍 간다고 아내와 아이에게 약속했습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그걸 모르나요. 이렇게 만나기도 어렵잖아요."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잠깐만 쉬었다 갑시다."
   우리는 파라솔 아래에 앉았다. 나는 소주와 안주를 시켰다. 그는 피곤한 표정을 짓더니 "소주는 누가 마시려고요." 라고 말했다. "걱정마세요. 소주 한 병은 자신 있으니까요." 그는 마음이 놓이는 듯이 말했다. "그렇죠. 박인혜 선생님은 술이 쎄니까요." 나는 그의 잔에 술을 따르고 내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는 멋쩍은 듯이 잔을 쳐다본다. 
   내가 말했다.
   "우리 건배해요."
   "아, 나는 술을 못하는데......"
   "선생님 술 약한 것은 나도 알아요. 딱 한 잔만 건배하세요."
   우리는 잔을 높이 들어 부딪쳤다. 그리고 나는 단숨에 한 잔을 마셨다. 그도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단숨에 마셨다. 
   그때였다. 어디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을 쳐다봤다. 약혼자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못본 척했다. 약혼자의 집이 이 근처였다. 어떤 여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보다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러나 약혼자는 그에 비해 왜소하고 목소리도 어딘지 간교하고 가냘펐다. 약혼자는 우리쪽을 흘끔흘끔 바라본다. 과묵한 그에 비해 피곤하게 여전히 지껄이고 있다.
   내가 술이 먼저 취해야 하는데. 
   한 병의 소주가 거의 비어갔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따라주는데로 마셨다. 나와 똑 같은 양이다. 나도 약간 술이 오른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홍당무 같다. 나는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는 굳게 마음먹고 말했다.
   "선생님."
    그가 나를 바라본다. 몹시 취하는 표정이다.
   "예, 말씀하세요."
   나는 말을 더듬었다.
   "나...... 나......"
   그는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는, 붉으스레한 얼굴을 내게 바짝 내민다. 눈이 초점을 잃었다.
  "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세요. 걱정마시고 하세요."
   그는 발음이 서툴렀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나아, 오늘밤 선생님과 같이 있고 싶어요"
   이 남자는 나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그 붉은 얼굴이 목표물을 향하여 돌진하려는 한 마리의 코뿔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리 술이나 한 잔 더 합시다."

 


   나는 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연거푸 몇 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음" 하는 짧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탁자에 엎드렸다. 내가 흔들어 깨워도 꼼짝하지 않는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찌르릉 찌르르릉......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린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머리를 돌리는 순간. 약혼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 쪽을 계속 응시하고 있던 약혼자는 일어나더니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멀리 뱃고동처럼 기적소리가 들리고 지하철이 잠실철교를 지나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철거덕 ... 철거덕 .... 철거덕 ......철커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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