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남연군묘(南延君墓) - 윤여설

윤여설 2021. 7. 29. 19:11

남연군묘 앞에서

 

 

 

남연군묘(南延君墓)

-두 황제가 나온 자리

 

 

- 윤여설 시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 산 5-28번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묘이다.

가야산(678m)이 둘러 감싸안고 있어서 이 곳이 한눈에 길지임을 알 수가 있다.

오늘 답사를 했을 때 이 명당터의 묘가, 곡장은 헐렸고 봉분 뒤까지 파헤쳐저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다. 지금 묘가 자리한 곳은 절 안에 탑이 서 있던 곳이다.

남연군묘에 도착했을 때 가야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이하응은 왕족이면서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전국을 떠돌며 저자거리의 시정잡배와 어울려 생활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파락호(破落戶) 생활을 하며. 또,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하응은 매우 영특하고 비범했다. 남연군은 4남인 그를 알아보고 일찍 추사 김정희에게 공부하게 했다. 대원군은 추사의 서체와 그림솜씨를 이어받아 글씨와 그림에 능하다. 또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10년동안 전국을 떠돌면서 지리와 풍수를 공부했다. 이 때 만난 지관 정만인으로부터 두 곳을 소개받았다고 전해진다. 2대의 왕이 나올 자리라며 이 곳 가야산 자락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와 광천 오서산에 만대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塋華之地)를 소개받는다. 흥선군은 미소를 지으며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7년 뒤에 아들 고종이 태어난다. 철종이 승하하고 후사가 없자, 오래 전부터 교분을 유지하던 당시 궁중의 실력자였던 신정왕후와 합력하여 13살의 고종을 왕위에 앉힌다.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19년만이다. 그리고 신정왕후는 2년정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다가 흥선군에게 전권을 주고 물러난다.

남연군묘 앞 전경. 주작에 해당한다.

당시에 대원군에게는 20살의 장남이 있었으나 13살의 고종을 왕에 앉힌 것은 어린 왕을 대신해서 신정왕후 조대비나 자신이 대리정치를 하며 권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에 둘의 암묵적인 계산이 맞아 떨어졌다.

가야사터를 발굴하기 위해 봉분 뒤가 헤쳐져 있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아들 고종을 수렴청청하며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왕권의 강화였다. 1800년 정조의 승하 후에 안동김씨의 세도에 휘둘리는 조정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또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정궁이었던 경복궁을 중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국에 650여개의 서원 중에, 임금으로부터 노비와 토지를 받은 사액서원 47개를 제외하곤 모두 헐어버렸다. 대단한 개혁이었다

묘소 뒤에서 바라본 전경. 어쩐지 곡장이 파헤쳐져 묘한 느낌이다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서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일어난다. 흥선군은 앞날을 염려해 묘를 조성할 때 많은 강화석회를 비벼넣어 묘의 도굴을 면했다. 이후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고 천주교박해를 시작했다.

묘소 아래서 바라다 본 관경.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 올린 것같다.그러나 자연지형이다.

 

 

대원군과 고종이 집권할 때는 국제정세가 왕정이 끝나가며 팽창주의로 이해관계에 얽혀 소용돌이칠 때였다. 사실! 국제적 감각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은 아무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오직 외척의 세도와 왕권강화의 권력투쟁에 모두가 몰입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곳의 남연군묘이고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이다. 국제 정세엔 무지했고 러시아, 청나라, 일본 등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린다. 왜군이 궁궐을 점령해서 무장해제시키는 일도 있었고 민비를 살해하기도 했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리고 황제로 즉위했다. 자주권은 좋으나 세계는 공화정으로 가고 있는데도 본인이 전권을 행사하고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는 선포였다.

앞에서 올라가는 계단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미 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29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였으며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기로 약속을 한 뒤였다.

국제 정세는 지금도 그 때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지금도 당파싸움에만 열중인 것같다. 아무도 우리의 자주권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또한 이 냉혹한 국제정세와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우리가 다시 그 때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외교력으로 해결이 안 될 때, 우리가 세계 1위가 되지 않는 한은 힘으로 국제정세를 이길 수는 없다.

해방이 됐지만 우리의 뜻과는 달리 외세에 의해서 분단이 돼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언제까지 외국군대에 우리의 국방을 의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외세가 어떻게? 어떤식으로 또 작용할지는 모른다. 서해는 중국이 자기네 바다라고 주장하고 있고, 동해는 중국의 함대는 물론 소련의 전투기도 몰려오곤 한다.

다만, 한가지 우리가 확보할 주권이 있다. 그동안 우리가 포기한 핵주권이다.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하면 어느 정도의 자주권을 확보할 수가 있다. 물론 다소간의 국제적 마찰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핵무기는 꼭 보유해야 한다. 남북한의 세력균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금 북에게 핵을 포기하라는 것은 백기투항하라는 것과 같다.

 

둘러봐도 이 지형은 참으로 아름답다. 묫자리가 아래에서 바라보면 조산(造山)처럼 솟아올라 있다. 첨 바라볼 때는 흙을 쌓아 올린 줄로 알았다. 그러나 원래의 지형이다. 묘 앞에 바위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올해의 여름은 유난히 덥다. 한낮을 피해 오후에 이 곳을 답사했다. 도착하니 해가 가야산을 조용히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자, 산 그림자에 덮인 이 곳이 더욱 푸르름으로 일렁이며 하얀구름이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궁성모양을 만든다. 노을이 구름에 어려 붉은 빛을 연출하다. 그리고 바람에 흔적없이 사라진다. 권세란 저리 구름같은 것일까

 

고종도 분명히 이 곳의 할아버지(남연군묘)에게 다녀갔을 것이다. 고종은 광무황제가 됐고 그의 아들 순종도 황제가 됐다. 고종은 국제적 감각이 부족했고 순종은 선척적 성불구자였다고 한다. 고종의 서양인 주치의였던 에비슨 박사는 순종을 정박아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 양위했고 순종은 즉위 3년만에 조선은 멸망했다.

남연군신도비

이 명당의 기운은 여기까지였다. 원래 양택(집)이나 음택(묘)이나 풍수는 동일하다. 흥선군 이하응은 10년공부를 하며 놓친 것이 있다. 본인이 헐어버릴 정도의 절이 있는 자리이면 명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발굴 안내판

 

지금 사진에서처럼 가야사터를 발굴하기 위해 남연군묘 뒤는 파헤쳐저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봤으면 혼절할 일이다.

 

명당이란 얼마나 허구한가?

 

산사태 안 나고, 물에 안 잠기고, 양지바른 곳이면, 저리 발굴한다고

파헤쳐지지 않을 곳이면

모두가 이 곳보다 명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