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국제적 한류열풍을 일으킨 시인
- 허난설헌 묘에서
- 윤여설 시인
제비는 처마 비스듬히 짝지어 날고/ 지는 꽃잎은 어지러이 바단 옷 위를 스치네/동방에서 보는 것마다 마음 아프기만 한데/ 봄풀이 푸르러도 강남가신 님은 이직 오지 않네 「기부강사독서寄夫江舍讀書」 1)- 허난설헌
짝지어 나는 제비를 보면서 과거 공부를 하러 간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을 나타냈다. 남편은 공부보다는 기방을 자주 출입했다고 전해진다. 매우 서정성 짙은 시이다. 원작은 한시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으나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요절한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그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29-5번지이다 앞에는 중부고속도가 시원하게 지나간다. 안동김씨 문중 묘에 맨 앞에 홀로 누워 있다. 묘지 왼쪽엔 먼저 여윈 두 자녀의 봉분이 나지막하게 조성돼 있고 외삼촌 허봉이 쓴 비문에 세계져 있다.
허난설헌은 7살 때「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신선세계에 있다는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면서 이 글을 지었다고 한다. 대단히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이다. 당시엔 문맹율이 90%가 넘던 시대이다. 궁궐의 공주에게도 한문교육은 시키지 않고 한글만 가르치던 시대였다. 여성인 허난설헌에게 교육을 시킨 매우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 그리고 동생 허균도 중국에 사신을 다녀온, 지금으로 보면 외교관들이다. 당시에 외국을 드나들며 국제적 감각익힌 허엽은 딸에게도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오빠 허봉은 당대의 거목 삼당 시인 손곡 이달을 난설헌의 스승으로 모셔 시를 지도하게 했다. 허균도 이달의 지도를 받았다.
손곡 이달은 뛰어난 문장가였고 양반의 후손였지만 첩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설헌에서 가끔 현실 참여시를 쓰고,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서 길동이 서자인 것은 스승인 이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당시에도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 과거에 급제한 양반이면서도 승복을 입는 등의 파격적인 행보를 하다가 파직당하기도 했다..
난설헌의 묘를 잘 살펴보면 부군인 김성립은 난설헌 뒤에 후처인 홍씨와 묻혀 있다. 난설헌이 죽던 해에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하고 재혼을 한다. 난설헌은 죽고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립은 출병을 해서 전사했다고 한다. 본부인인 난설헌은 홀로 앞에 묻혀 있는 것으로 봐서, 김성립이 죽자, 두 번째부인 홍씨는 남편을 난설헌과 합장을 하지 않고 홀로 묘를 쓴 것같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 홍씨가 죽자, 후손들은 두 번째 부인을 김성립과 합장한 것으로 보인다. 27세에 요절한 허난설헌도 임란에 출병해 전사한 남편 김성립도 결혼 후에 2년만에 독신이 된 두 번째 부인 남양홍씨도 모두 불행한 삶을 산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부인도 아이가 없었다. 아마? 당시의 풍속에 따라서 양자를 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성의 삶에서 가장 큰 변화가 그렇듯이 난설헌의 삶에 가장 큰 변화는 결혼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유교가 완전히 정착되기 직전이라서 여성은 결혼을 하고 처가에서 몇 년을 더 사는 경우와 결혼 후에 직접 시댁에서 사는 경우가 혼재해 있었다.비슷한 시대의 신사임당의 경우는 전자였고 허난설헌은 결혼 후에 시댁에서 곧바로 신혼생활이 시작됐다.
15세에 결혼한 난설헌의 신혼생활은 순탄치가 못했다. 시어머니가 시를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혹독한 시집살이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또한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에 비해서 문장력이 떨어지며 아내에대한 열등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과거를 준비하면서 기방에도 출입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난설헌은 매우 고단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결혼생활이었을 것이다. 난설헌이 결혼생활을 견디었던 것은 두 자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자녀도 돌림병에 결려 잃게 된다. 당시 난설헌은 임신한 상태였다. 아이를 읽고 시 곡자(哭子)를 남긴다.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는데/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앞세웠구나//슬프디 슬픈 광릉 땅이여!/두 무덤이 마주보고 솟아 있도다//백양나무엔 소슬한 바람이 부는데/도깨비불이 소나무와 가래나무 사이에 밝았구나//지전(紙錢)을 사르며 너희 혼을 부르고/한 잔 술을 너희 무덤 앞에 놓는다//너희 넋은 응당 오누이임을 알 테니/밤마다 서로 좇으며 어울려 놀겠지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나/어찌 장성하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황대사를 읊조리고/피눈물 흘리고 울음 삼키며 슬퍼한다 – 「곡자哭子」2) 난설헌
난설헌 묘지 우측엔 곡자가 적힌 시비가 서 있다. 전국시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비이다.
난설헌은 두 자녀를 잃고 깊은 아픔에 빠진다. 더욱이 친정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 관찰사(도지사)로 부임했다가 질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다가 상주의 객사에서 죽고 만다. 오빠 허봉도 파직을 당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죽고 만다.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던 동생 허균도 그의 자유분방하고 진보적인 성격탓에 자주 파직을 당하곤 했다. 이제 난설헌은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푸른바다가 구슬 바다를 적시고// 푸른 난세는 오색 난새에 기대네//아리따운 연꽃 스물일송이//붉은 꽃은 떨어지고 서릿달은 차갑구나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3) 난설헌
그는 27세에 삶은 마감한다. 동생 허균에게 자신의 작품을 남기지 말고 불사르라고 말했다고 한다. 허균은 누이의 뜻대로 모든 작품을 태웠다. 그러나 안타까운 나머지 그 이듬해에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누이의 작품과 친정에 남아 있던 작품 210편을 모아서 「난설헌고」를 편집해 놓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정유재란 때 중국원군 장수로 온 오명제 시인은 조선에서 시를 모아가지고 돌아가서 「조신시선」을 펴낸다. 그 책엔 신라 최치원부터 허난설헌의 시까지 실려 있었다. 그리고 8년뒤 조선에 사신으로 온 중국의 유명 시인 주지번을 허균이 영접한다. 허난설헌의 시를 읽고 온 주지번은 허균에세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싶다고 요구한다. 국내에서는 허난설헌의 시집이 발행되지 않았다. 허균은 본인이 모아놓은 누이의 원고 난설헌고((蘭雪軒稿)를 넘겨준다.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 난설헌의 시집이 발행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또한 일본에서 소개돼서 또 다시 인기를 얻는다.
예쁘고 고운 자태 누구에게 뒤지랴/바느질도 능하고 길쌈도 잘 하지만/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에서 자라/좋은 중매자리가 나오지 않네//밤늦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네/삐걱삐걱 베틀소리 차갑게 울리는데/베틀에 있는 한 필의 옷감/결국 누구의 옷이 되려나//손에 쇠붙이 가위 잡고 있노라니/밤 추위에 열손가락이 다 곱아지네/남을 위해 시집갈 때 입는 옷 지으며/정작 나는 해마다 독수공방이라오-「빈녀음貧女吟」 4)
빈녀음은 가끔 수능에서 출제되는 작품이다. 가난한 집에서 혼기를 넘긴 처녀가 자신의 생각을 실어 쓴 시이다. 가난한 집이라서 중매가 들어오지 않아서 시집도 못가고 베틀에 앉아 남의 혼수감을 짜는 처녀의 마음을 금방 느끼게 한다. 난설헌의 작품 중에는 현실참여 시도 가끔 보인다. 부유하고 유복하게 자란 난설헌이 사회참여시를 쓴 것은 어떤 이유일까? 스승 이달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신분 때문에 벼슬을 하지 못하고 소위 재야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며 현실이 공평하지 않고 본인처럼 모두가 부유하지 않다는 것도 느꼈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사회여건 때문에 살아서는 작품이 알려지지 않았고 죽어서, 그것도 외국에서 한류열풍을 일으킨 시인 난설헌!
그는 지금 시원하게 달리는 중부고속도를 바라보며 누워 있다.
가끔은 찾는 사람도 있다. 5월의 아카시아향이 향기롭게 묘소 주 위에 잔잔히 물결친다.
지금 난설헌은 무엇을 생각할까? 지금 저 고속도로를 바라보며 발전한 한국을 뿌듯한 마음으로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같다.
그의 묘에서 잠시 난설헌의 3가지 한을 생각해 본다.
난설헌은 본인이 왜 여성으로 태어났을가? 왜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 태어났을까? 왜 김성립이라는 남자를 만났을까? 그를 여성이라고 폄하하며 작품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남성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난설헌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지금은 남녀차별이 없고 여성상위시대를 넘어서 여성주도시대로 변하고 있다. - 끝
인용시 원문
1)燕掠斜簷兩兩飛 落花撩亂撲羅衣 洞房極目傷春意 草綠江南人未歸.
(연략사첨양량비 낙화요란박나의 동방극목상춘의 초록강남인미귀)
[寄夫江舍讀書] - 강사에서 글 읽는 남편에게 부치다
2).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紙錢招汝魂(지전소여혼)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 [哭子 許蘭雪軒]
3)壁解浸瑤海(벽해침요해) 靑鸞倚彩鸞(청란의채)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夢遊廣桑山詩( 몽유광상산시)
4)빈녀음(貧女吟)
豈是乏容色 개시핍용색
工鍼復工織 공침복공직
少少長寒門 소소장한문
良媒不相識 양매불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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