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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한제국의 순종황제 그리고 영친왕의 기록

윤여설 2012. 5. 4. 18:39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그리고 황태자를 아시나요? 제목에 나온 것처럼 순종황제 그리고 영친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까지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겪을 때도 순종의 지위를 계승하고 이어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황태자인 영친왕입니다. 영친왕은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입니다. 『고종실록』1900년 8월 17일에 영왕으로 책봉된 기사가 보이고 이후 실록에서는 영왕과 영친왕 호칭이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황태자 영친왕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왕세자'로 격하되고, 1926년 순종이 붕어한 뒤 '이왕'의 지위를 계승했습니다.  

 

▶ 순종황제(김은호作)와 영친왕

 

 순종은 조선의 제27대 왕(재위 1907~1910)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입니다. 고종의 둘째 아들이자 명성황후의 아들입니다. 1875년(고종 12) 2월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 다시 황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사건의 책임을 진 고종을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가 519년 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에 머물게 하고 황제 대신 이왕(李王)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순종 뒤를 이으신 분이 바로 마지막 황태자이셨던 '영친왕'입니다.

 

 1897년에 태어난 영친왕은 순종황제의 이복동생입니다. 영친왕은 1900년에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다 가 1907년 황태자에 책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12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11살 때입니다. 강제로 일본에서, 일본의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본 나시모토노미야의 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하게되었습니다. 계속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은 8·15 광복 후 귀국하려 했지만 국내 정치 실세들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였고 56년 만에 환국을 하였습니다. 환국을 하였을 당시 영친왕은 뇌혈전증 증상이 심해졌습니다. 병상생활을 이어온 영친왕은 1970년 생을 마쳤습니다.

 

 영친왕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분이 바로 '이방자' 여사입니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비입니다. 영친왕이 돌아가시자 창덕궁 낙선재에 남아 많은 사회활동을 하시다 1989년 4월 30일에 생을 마치셨습니다. 우리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를 비운의 왕과 왕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방자 여사의 글을 보면 힘들었던 시간 속에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행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11년 11월 22일부터 2012년 1월 31일까지, 우리가 모르고 있던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일생 그리고 순종황제의 서북순행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하정웅 기증展'에서 순종황제의 서북순행과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일상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하정웅 기증전에서는 순종황제의 서북순행과 영친왕과 왕비의 일생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재일교포 하정웅씨가 주일본한국대사관에 기증한 자료를 인수 받아 소개하는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09년 순종황제의 서북순행 전체 일정을 기록한 사진첩과 영친왕·왕비의 일대기별 주요 사진 및 영친왕의 수첩, 영친왕비의 친필 일기 그리고 가족 및 지인들에게서 받은 편지, 엽서 등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국립고궁박물관 1층에 있는 하정웅 기증전과 고종이 사용했던 자동차

 

 

순종황제의 서북순행과 영친왕 그리고 영친왕비의 일생을 전시하고 있는 하정웅 기증전을 미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순종황제의 서북순행

 

▶ 순종황제가 임시로 머무는 평양행재소 전경, 정주역에 마중 나와 있는 신하들

 

 

 1909년 1월 초순 6박 7일간 경상도와 충청도 등 남쪽지역을 순행하고 돌아온 순종황제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서북부 지역의 순행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정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추진 된 서북순행은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평양-의주-신의주-평양-개성 등지를 거쳐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서북순행을 기획하였을까요. 고종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 등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반일 의병 항쟁이 격화되자, 황제의 순행을 통해 국내 반일감정을 무마하고 일본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순종황제의 서북순행은 가는 곳곳에서 일장기 게양 거부 및 훼손 사건이 일어나고, 황제페하 만세를 외치는 등 도리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2. 영친왕 그리고 영친왕비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유년시절

 

 

 하정웅 기증전에서는 영친왕과 왕비의 유년시절, 결혼 그리고 가족, 그들의 장년기를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재학중이던 영친왕은 1916년 8월, 일본의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의 약혼기사가 '매일신보' 1면에 보도되었습니다. 영친왕은 이미 10여년 전에 민갑완과 약혼한 상태였으나, 일제에 의해 1916년 1월 파혼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접한 국내의 백성들은 일제히 거부감과 분노로 들끓었습니다. 국민들의 분노를 산 두 사람의 결혼 발표 후 두 사람은 약혼하였고, 1919년 1월 25일 결혼식이 예정되었으나, 1월 21일 고종이 갑작스레 승하하여 결혼이 연기되었습니다. 고종이 삼년상이 끝나기도 전인 1920년 4월 28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1921년 8월 장남 이진이 출생했으나 다음해 사망했고 1931년 12월 둘째 아들 이구가 태어났습니다.

 

▶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결혼식, 둘째 아들 이구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 영친왕은 이왕의 지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영친왕은 일본 보병 59연대의 연대장과 오사카 유수의 사단장을 지내고, 1941년에는 제 1항공 사령부에 부임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왕이 일본 육군준장을 지냈다는 사실은 아픈 역사의 비극이라 생각됩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함과 동시에 영친왕의 왕족 지위는 박탈되었습니다. 때문에 영친왕과 영친왕비는 평민으로 강등되었습니다. 또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무국적자 생활을 하며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1960년 4.19로 정권이 교체되어 정부에서는 영친왕에서 돌아오기를 권유하였습니다. 또한 구황실 사무국와 이은선생 환국추진위원회 등이 나서서 각종 편지보내기와 서명운동을 벌여 그의 환국을 촉구하였습니다. 이에 영친왕은 강제로 일본에 가게 된지 56년 만인 1963년 11월 22일에 영친왕비와 함께 환국하게 됩니다.  

▶ 영친왕의 환국을 촉구하는 편지와 환국 알림문 및 서명장부

 

 

 그러나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환국했을 때, 영친왕은 뇌출혈로 혼수상태에 있었고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1970년 서거하였고 영친왕비는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며 사회활동에 힘쓰다 1989년 서거하였습니다. 

 

 하정웅 기증전을 통해서 순종의 서북순행과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일생과 우리 아픈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 또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과 실제 유품 중심으로 전시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분들이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시는 2012년 1월 31일까지 진행되니, 꼭 방문하셔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를 다시 기억하시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제3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구지영 기자

 

출처 : 문화재청 공식 블로그
글쓴이 : 문화재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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