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식장을 다녀와서
아름다운 봄이다. 천지에 꽃들이 수놓더니, 새싹들이 입을 뾰죽이다가 이제는 나뭇잎들이 푸르름을 덧칠한다. 봄은 희망이며 새출발이다. 봄은 사람에게도 사랑이 무르익게 하는가 보다.
약동하는 계절 덕분에 자주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다. 혼례는 이성지합(二姓之合)요, 새로운 가정의 출발이다. 가정은 가족을 형성하고, 가족은 사회의 가장 최소 단위이기도 하다. 결혼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축복이다.
그런데 이렇게 뜻 깊은 결혼식에서 가끔 참으로 희한한 장면이 연출되곤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젊은이들이 재기발랄한 것 같고 또한 코믹하기도 하다. 성혼선언문과 주례사가 끝나고 신랑신부의 행진 전에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서 신랑은 노래를 부르고 신부는 춤을 추는 경우도 있고, 거꾸로 신부는 노래를 부르고 신랑은 춤을 추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회자는 신부가 노래를 부르지 못하거나 신랑이 춤을 잘 추지 못하면, 신랑이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선정적인 구호를 외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결혼식이 두 사람의 사랑을 공개하는 첫장소이라곤 하지만 그 구호가 또래들끼리만 있을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노인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앉은 장소에서 외치기는 거북한 어휘들이다. 마치, 할아버지와 며느리 손자가 함께 보던 TV에서 낯뜨거운 장면을 보는 것 같이 이상한 기분이 든다.
결혼식이 종교행사처럼 엄숙하거나 구식혼처럼 무거울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한편의 코믹물이나 개그처럼 경망스러워도 안될 것 같다. 요 며칠전 어느 결혼식에서 혼례를 마치기 전에 주례가 새로 탄생한 부부들에게 뽀뽀를 시켰더니, 이 부부들이 지나친 행위를 연출해서 하객들이 매우 어색했다. 주례도 민망했던지! “저 부부는 늘 저렇게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하고 주위를 환기시켜 또 한번 하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해서 갖갖으로 분위기를 무마했다.
결혼식에서 재치는 어디까지 허락해야 할까?
예전엔 신부는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하고 신랑은 너무 굳어진 탓에 얼굴이 발개져서 어색했었다. 그것에 비하면 요즘 결혼식은 매우 자유롭다. 축가를 부를 때 신랑신부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마주 웃는 등의 장면은 보기에도 매우 밝고 좋다.
결혼은 인생의 제 2의 탄생이다. 예전엔 70년대만 해도 허례허식이나 청첩장 난발, 혹은 축의금 등이 문제가 됐다. 지금도 문제가 되는 계층이 있을지 모르나 최소한 나 같은 보통사람이 하객으로 참석하는 결혼식은 그 절차가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이제 전통혼례는 민속촌이나 특수한 예식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사회가 되고 디지털화가 되었다고 해서 결혼식마저 품위를 잃어 경망스럽고 천박해서는 안된다. 식장에 참석한 하객들이 뒷맛이 어쩐지 씁쓸하고 어색했다면 참석한 하객들에게 문제가 있어서일까? 진부한 말이지만, 좀 더 엄숙하며 즐겁고, 더욱 축하해 주고 싶은 예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예전엔 축가를 부르면, 신부가 부끄러워하며 하얀 면사포 아래로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요즘의 어떤 결혼식의 축가를 부를 때에 뮤지컬이 연출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신랑신부도 배우가 되어 뮤지컬을 진행한다. 신랑신부가 춤을 추는 즐거움! 좋게 봐줘서 재밌지만, 어떻게 보면 가볍게 비칠 수가 있다. 뮤지컬의 주인공 배우가 되길 원했으면 아예 뮤지컬의 극중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면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말하는 것은 천박하게 진행되는 결혼식의 풍경을 말한다.
80년대엔 개성이 있는 결혼식이 가끔 치러져 화재가 되곤 했다. 스쿠버다이버들이 물 속에서 동호인들의 축복 속에서 혼례를 올린 경우도 있고, 등대원이 자신의 일터인 낙도의 등대에서 동료와 섬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혼례를 올린 경우도 있다. 또한 농촌의 젊은 후계자가 마을 회관에서 주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자신의 취미나 직업을 배경으로 한 혼례식은 백번 화재가 돼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본인들의 삶에 자신이 있고 또한 부부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올리는 결혼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자리이게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보기가 드물어졌다.
만약 내가 청년시절로 돌아가 결혼식을 올린다면 나는 전통혼례를 치루고 싶다. 식이 끝난 후에 폐백을 올릴 때만 입어보는 사모관대가 아니라 사모관대를 착용하고 식을 올리고 싶다. 지금 신랑신부가 입은 서양식 양복과 면사포 대신 사모관대와 원삼족두리를 쓰고 신식결혼식을 올린다면 어떤 분위기가 연출될까? 아니, 내가 믿는 기독교의 예배당에서 사모관대와 원삼족두리를 쓰고 식을 올려도 전혀 어색치 않을 것 같다.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눈높이로 사물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결혼식의 난삽한 난센스는 그들도 지나치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사회자의 수준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결혼식의 사회를 맡은 진행자는 어떻하면 개성 있게 진행해서 오래도록 신랑신부와 하객들의 기억에 남게 할 수 있을까를 의식한 나머지 신랑신부에게 도를 넘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혼례식 전에 신랑신부와 혼주 그리고 사회자가 잘 조율을 해야 할 것 같다.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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