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시대의 시와 이모티콘의 세계
박 혜 숙 (건국대 교수, 시인)
1. 문자 메시지의 시들
맥루한(M. McLuhan)이 이미 설파했던 ‘매체가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명제는 이 시대에 와서 급속도로 변화하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증명하고 있다. 거기다가 인터넷을 통한 쌍방향 통신은 감정을 담은 무수한 기호들, 다시 말해서 이모티콘(imoticon)을 탄생시켜 우리 시대 젊은 영혼들의 교신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그 젊은 영혼들은 컴퓨터에서 뿐만 아니라 휴대폰을 들고 다니며 손가락으로 이모티콘을 포함한 문자를 자유자재로 날려 보낸다. 소위 말하는 엄지족이다. 이 시대의 이러한 미디어들은 우리의 의식마저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자유로운 사고의 수평적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권위적 시대의 일방적인 의사 전달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글을 쓰면 수없이 달리는 댓글들이 이를 증명한다.
시공을 초월한
가장 확실하고 아름다운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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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혁명의 꽃!
- 문자메세지1.(♥o♥*)
윤여설 시인은 이 시집의 자서에서도 밝혔듯이 IT 문화와, 특히 이모티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실제로 이모티콘을 이용한 시를 쓰고 있다. 이에 관한 연작시 ‘- 문자메세지1.(♥o♥*)’는 다양한 아이콘으로 현란하게 그려져 있다. 웃고, 사랑하고, 그래서 또 키스하는 모습까지 그려진다. 이런 다양한 그림들을 통해서 자기의 생각을 문자 메시지로 통신하는 세태에 대하여 가장 첨예한 언어를 다루는 시인으로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소통을 위한 언어는 음성을 기호화한 문자에서 메시지를 담은 아이콘에게 빼앗겼단 말일까? 더 ‘빠르게’와 더 ‘재미있게’를 추구하는 인터넷 채팅족이나 휴대폰의 엄지족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오늘도 이모티콘을 즐긴다. 여기에 이런 현상을 외면할 수 없는 시인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결국 윤여설 시인은 오늘의 이런 현상들을 과감하게 자신의 시쓰기에 끌어들인다. 문학이 시대를 외면할 수 없다면 윤시인의 이러한 시쓰기는 어찌보면 타당한 실험 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반갑게 폴더를 열면
LCD화면 가득 어린
슬픔
“황화초고38회동창아
무게부친노환으로별
세발인:05년0월00일
논산某某장례식장”
다량 배달되는
초고속 디지털부고장이다
부음도 시대따라 변하는구나
- 문자메세지4.(TmT )
또한 문자메시지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화현상을 창출하기도 한다. 위 시에서도 말하고 있는 다량 전송의 초고속 디지털 부고장은 이러한 현상 중에 하나일 뿐이다. 한 생을 살다간 한 인간의 장례식을 엄숙하게 알려야 할 것 같은 부고치고는 빠른 속도만큼이나 가볍게 느껴진다. 왠지, 디지털 부고장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정은 사라지고 차가운 LCD에서 손을 내미는 고지서의 냄새만 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그러나 시인은 “부음도 시대따라 변하는구나.”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시인의 이번 시집엔 때론 디지털 문화에 대하여 비판적인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이미 현대시에서는 기호나 문자를 통한 의사전달의 시들이 실험적으로 씌어졌던 바 있다. 소위 포말리즘(formalism)시가 그렇다. 정지용도 그의 ‘슬픈 인상화’나 ‘파충류동물’ 등의 시에서 이미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정지용의 이런 방법은 이상이 <조선중앙일보>에 이와 같은 형식의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했을 때보다도 앞선 시기이다.
침울하게 울려오는
築港의 기적소리●●●기적소리●●●
이국 정조로 퍼덕이는
세관의
깃발
깃발
- 정지용, ‘슬픈 인상화’ 에서
이와 같은 포말리즘의 시들은 후대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심심치 않게 씌어져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윤여설 시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모티콘의 시들은 ‘문자메세지1.(♥o♥*)’에서처럼 거의 모든 문장 자체가 아이콘들로 도배되어 있다. 글쓰기의 새로운 혁명, 아니면 전통적 글씨기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한 시대의 반영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시의 등장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눈이 되지 못한 침묵의 언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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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雨冬雨冬雨冬雨冬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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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나는 귀머거리!
강- 겨울비 소리
윤여설 시인의 위 작품의 아이콘들은 눈이 쌓인 겨울인데도 때 아니게 겨울비가 오고 또 우산까지 받고 다녀야하는 날씨를 전경화(前景化, foregrounding)하지만 그 배후엔 다양한 의미들이 내포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운 겨울엔 마땅히 비가 아닌 눈이 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겨울에도 비가 자주 온다. 지구 온난화 현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눈이 되지 못한 침묵의 언어들”을 위와 같이 아이콘으로 그려놓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는 귀머거리라고 딴청한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문명화 시대, 기상마저도 변화를 일으키는 이 시대에 디지털을 통해서 씌어진 시구들엔 이렇듯 다양한 내용들이 후경화(後景化,backgrounding)돼 시인이 겪고 있는 갈등을 읽을 수 있다.
2. 사물을 꿰뚫어 보는 미학적인 힘
윤여설 시인의 이번 시집엔 이와 같이 디지털 시대의 자기 표현 방식을 문자 메시지, 그 중에서도 이모티콘을 통한 표현 방식에 관심을 두고 쓴 시가 상당히 많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래서 시인은 “시공을 장악한 / 디지털 네트워크의 / 투망 속 // 낚시바늘 꿰인 물고기처럼 /모니터 앞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들(‘인터넷 네트워크’)"이라고 말한다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실험적인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시집의 모든 작품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예리한 관찰력이 언어를 통한 미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 작품은 한 편의 시로서 성공한 것이리라. 사물을 꿰뚫어보는 미학적인 힘, 그것이 시인이다. 詩人은 그래서 視人이라고 말함직하다.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를 보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詩人을 視人이라고 할 때만이 가능하다.
치마가 뒤집혀 아우성인
나무(林)들!
열망으로 잃은 분별력은 무섭다
누구도 몰라주는
애정사태
서러운 울음의 하모니는
밤새 가슴을 파고들어
끝내 잔잔한 아침
밑둥 부러진 느티나무가
질펀히 누워 있다
- ‘상처’ 중에서
밑둥 부러진 느티나무, 간밤에 태풍이라도 왔나보다. 거센 비바람 때문에 나무들은 치마가 뒤집혀진 듯 아우성이었고, 모든 상황이 끝난 다음날 아침엔 나무는 질펀히 누워있다. 그러나 이렇게 문맥 자체만 보는 것은 이 시의 외연만 보는 것이리라. 시인은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를 통해서 분별력을 잃어버린 인간의 애정까지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이처럼 표현할 수 있음은 사물을 꿰뚫어보는 미학적인 힘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 시만이 아니라 이 시집에는 유독 ‘사랑’에 관한 시가 많이 띈다. 더군다나 만남과 헤어짐의 문제는 그의 시들에서 주목을 끌만한 모티프들이다.
아무리 결별이 두렵다지만
먹이를 또아리 튼 뱀같이
층층 동여매면 견딜 수 있을까
건장한 소나무 한그루
헐떡이며 안색이 누렇다
밑둥부터 감아올라 뒤덮고
만족한 애정을 확인한 듯
덕지덕지 핀 칡꽃
편집증에 걸려든
나무들은 모두 초주검이 된다
저 맹목의 에로티시즘
- 칡꽃 -
아름다운 이 순간이
영원할 수 있다면 차라리 택하겠다
황홀한 결별의 시각
영원할 수 없음을 아는
하나 되었던
낯선 시간들을 남겨두고
- ‘눈먼 행복’ 중에서
소나무 한 그루에 칭칭 동여매듯이 감아 올라간 칡덩굴을 보고도 시인은 결별을 두려워하는 맹목의 에로티시즘을 상상해 낸다. ‘상처’라는 시에서 보여준 분별력 잃은 사랑과 ‘칡꽃’에서 보여주는 맹목의 에로티시즘은 동일한 상상력이다. 위에 인용한 시, ‘눈먼 행복’ 또한 그렇다.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사랑은 짜릿한 행복을 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이러한 사랑에 대하여 시인은 ‘절해고도’라는 시에서 누추한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결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그런 사랑은 허망하다. 결국 이 시인의 이런 모티프들은 사랑 자체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삶의 허망함들에 대한 알레고리일지 모른다. 사실 시인이 나이를 들어간다는 것은, 부질없음과 허망함에 대한 성찰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시를 더 잘 쓸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 시인의 시들에서도 그런 점들을 엿볼 수 있다. 가령 ‘가을밤’이라는 시를 읽어보면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뜰에 가득 찰랑대는 귀뚜리 울음은
떠나려는 것들의 쓸쓸함이 배어 있다
가로등불 사이 춤추며 지는 잎들도 아쉽다
모두 잡고싶다
말 없이 떠나려는 것들
귀가하는 자동차들은 쏜살같은데
가장을 맞는 정겨움이
골목 가득 젖어 있는데
공기의 감촉은 사체처럼 싸늘하다
강하자 다짐할수록
눈물겨워지는 결별의 축복들
올해도 덧없이 보내는구나
즐겁게 산책을 해도 서럽다
상주가 따라주는 한 잔의 술처럼
- 가을 밤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함, 화자는 그래서 모두 잡고 싶다 말한다. 그러나 잡는다는 것 자체가 허망함이다. 화자는 결국 결별의 축복을 깨닫는다. 그것이 인간사의 일이든, 세월의 흐름이든 만남이 있으면 또 헤어짐도 있다는 깨달음이 있을 때, 그 결별은 축복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는 이렇듯 사랑에 대한 시인의 시각이 담겨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결별을 비유하는 다양한 표현들로 장식돼 있다.
3. 글을 끝내며 - 다양하게 펼쳐 보이는 세계들
윤여설 시인은 앞서 말한 것처럼, 시대를 표상하는 실험적인 시들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무거우면서도 진지한 주제에 대해서도 사물을 바라보는 예리한 관찰로 형상화한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이 시집의 특징을 나타내는 두 가지 양상을 살펴보았지만 그러나 이 시집에는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그의 시에서도 시인의 독자적인 눈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비유적 해석은 읽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죽음을 말하되, “비로소 찾은 완전한 자유다 / 모든 권리와 의무에서 / 해방되었구나!”와 같은 ‘무덤’이라는 시나, ‘비릿한 붉은 조명 아래 / 유혹하며 밤을 밝히는 여인들’즉 밤거리의 여자들을 달맞이꽃이라고 한 것은 이런 예들 가운데 하나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는 작고하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청상이 된 누이의 한숨과 같은 가족애, 재건축 문제를 비롯한 부조리한 현실문제까지 다양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비록 이 시집에서는 디지털 시대가 상징하는 이모티콘의 세계를 실험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 인식의 폭은 그만큼 넓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윤여설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을 묶어 상재함으로써 시인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또다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첫 번째 시집과는 다른 실험적 요소의 시까지도 선을 보인 것은 시세계의 또 다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필자는 윤시인의 시세계가 앞으로도 또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기대하면서 더욱더 활발한 활동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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