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망우리를 찾아서)

현대 의학의 선구자 - 송촌 지석영의 묘에서

윤여설 2007. 7. 24. 22:29
 

 (서울대 병원으로 가는 길이 ‘지석영길’인데 대한의원 건물 앞에지석영의 동상이 서있다)

 

 

         현대 의학의 선구자

                        - 송촌 지석영의 묘에서



  사람의 첫인상 중에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기억에 남는다. 즉, 얼굴이 그 사람을 대변한다. 그렇게 중요한 얼굴에 콩알만한 패인 자국들이 가득하다면 매우 거북할 것이다. 지금도 60대 중반 이후의 사람들 중에 마마 자국(일명 곰보)이 있는 분들이 매우 드물게 있다. 아마! 천연두 예방접종을 맞게 전에 마마에 걸린 사람들일 것이다. 예전엔 천연두 예방접종을 “우두(牛痘)라고 불렀다. 지금 30대 이상의 성인들은 왼쪽팔에 두 개정도의 우두 자국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요즘의 천연두 예방 접종은 거의 흉터 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만큼 의술이 발달했다.

  1980년대 이후에 WHO(세계보건기구)는 천연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사라졌음을 선언했다. 한국정부도 1993년에 천연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천연두는 사람과 소 등, 동물들이 함께 걸리는 인수공통의 전염병이다. 사람에게서 발병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석영의 묘소 입구 -  안내석이 나뭇잎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연두 예방법(종두법)을 보급시킨 송촌 지석영의 묘는 망우리 공원묘지 순환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왼쪽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면 약 1.5km지점에 도로 오른쪽으로 “지석영의 묘 입구”라는 안내석이 서 있다. 그 안내석 위로 약 100m지점의 망우산 능선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한강이 내려다 뵈며 그 너머로 천호동과 멀리는 검단산과 남한산성이 잡힐 듯이 다가온다.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묘번호는 202941번이며 부부 쌍분묘이다.

  송촌 지석영은 2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1876년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일본에서 가져온 종두귀감(種痘龜鑑)을 받아서 종두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79년(고종16년) 홀로 부산에 가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재생의원에서 두 달 동안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송아지에 접종하여 접종액을 만들어낼 원액)와 종두침을 구해 서울로 돌아오던 중에 충주에 있는 처가에 들러 2살 된 처남에게 최초로 종두를 실시하게 된다. 부산에서 배워온 우두를 시술할 요량으로 장인에게 우두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처남에게 시술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장인은 우두에 대한 의학지식이 전혀 없어 우두를 거꾸로 일본인이 조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독약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독약을 어떻게 어린 처남에게 놓는단 말인가?”라고 펄펄 뛰며 단번에 거절했다. 그리곤 지석영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다시는 우두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석영은 할 수 없이 장인에게 “저는 바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이 때 장인은 “왜 떠나려고 하는가?”라고 이유를 물었다. “믿지 못할 사위가 어떻게 처가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장인은 사위의 성의에 탄복하여 처남을 데려와 우두를 시술케 했다. 귀여운 처남에게 우두를 시술한 송촌은 혹 실패할까봐 초조하고 불안한 3일을 보냈다. 3일이 자나자 처남에게서 우두접종의 효과가 나타났다. 뒷날 지석영은 이때의 기쁨을 “나의 평생에 과거에 급제했을 때와 귀향살이에서 풀려났을 때 매우 기쁨이 컸다. 그러나 처남에게서 우두 접종의 효과가 나타났을 때에 비하면 그런 기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할 정도로 이때의 기쁨이 컸다고 회고했다. 송촌은 이곳 처가에서 처남 말고도 원하는 주민 40여명에게 우두를 접종했다.

 

  송촌은 우두에 대하여 더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1882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는 김홍집을 수행해 일본에서 앞선 종두법을 익히고 돌아온다. 그후 종두장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우두를 시술하며 천연두 예방법을 널리 전파하게 된다.

  지석영의 천연두 예방운동은 개화의 성장과 같았다. 그 결과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친일 개화당으로 몰려 충남 예산군 덕산면으로 피난을 가야 했고 종두장은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태워졌다. 임오군란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송촌은 종두장을 다시 세우고 전주와 충청도에 우두국을 열었다.

  그 뒤에 사헌부 장령(掌令) 벼슬을 얻어 혁신과 개방을 주장하다가 조정의 중신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1887년 전라남도 완주군 신지도 송곡 마을에서 귀향살이를 한다. 송촌은 이곳 유배지에서 「신학사설」이라는 우리민족 최초의 건강 위생에 관한 예방의학서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일반 백성이 알기 쉽도록 한글로 지어져 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송촌은 “우두보영장”을 세우고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에게 우두접종을 했다.

  1899년에는 송촌의 청원으로 조정에서 “관립의무학교”를 설립하고 지석영을 초대 교장으로 임명한다. 지금의 서울의대의 모태가 된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고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해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했다. 그는 주시경과 더불어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한글학자이기도 했다.

                                             (지석영의 묘소 전경)

 

  송촌 지석영은 위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나라 개화기의 예방의학자이자, 과학자이며, 진정한 교육자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측의 간곡한 요청을 물리치고 현직에서 물러나 의생(한의사) 등록을 하고 소아과 진료를 하며 우리 민족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5년 2월, 81세로 생을 마감한다.

  송촌의 생은 구한말 개화기의 민족사에 많은 공훈을 남겼다. 그러나 친일파라는 오명도 함께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대구의 감영 판관으로 있을 때였다. 일본군을 도와서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앞장섰다. 그 때의 일본군을 힘을 빌린 것이 국가의 관료로써 불가피한 선택인지 모르나 분명한 친일이다. 그리고 조선침략의 원흉이며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살된 이토 히로부비의 죽음을 추도하는 모임에서 추도사를 했다고 한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대의 지식인이자 조선 개화와 혁신을 위해 노력한 분이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일본의 조선 침략이 밉지만 그 길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즉, 위장 친일 말이다. 그러나 그 또한 씻을 수 없는 친일이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친일을 했는지 구체적인 자료나 본인의 회고록 등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송촌의 친일 경력 때문에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추진한 “과학기술자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지 못했다. 또한 부산시의 “부산을 빛낸 인물”선정에도 빠져 있다.

  이곳 망우리의 공원묘지에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애국과 독립운동을 한 분이 있고,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의 길을 걸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송촌의 경우는 한일합방 이후의 친일행각은 밝혀진 바가 없다. 합방이 되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왜! 송촌은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일본군을 도와야 했고, 이토 히로부비의 추도사를 했을까?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아니면 그 길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는 곡해 때문에? 혹은 나약한 지식인으로서 일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현대의학의 선구자이자, 국문학자요. 개화에 앞장섰던 그가 무엇 때문에 훗날 친일파라는 오명을 남기는 행위를 했을까? 이점에 깊은 의문을 가지며 그의 무덤을 내려온다.

  송촌은 역사의 희노애락을 뒤로하고 굽이치는 한강을 바라보며 그 또한 말없이 이곳 망우리에 누워 있다. 바라뵈는 서울의 동쪽은 활기차고 힘에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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