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및 유적답사

봉황각과 손병희 선생의 묘

윤여설 2006. 7. 3. 22:12

 

이곳에서 3.1운동이 처음으로 논의 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저 현판의 글씨가 독립선언서 33인중의 한분인 오세창 선생의 친필이다

 

 

일반인들에게 내부 공개는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허락을 받아서 봉황각 내부의 손병희 선생 영정을 담았다. 以身換性(이신환성)이라는 성어가 걸려 있다.

 

 

숲해설가 박동산 님이 모시고 다니는 최시형 선생의 영정

많이 접한 사진이나 자세히 보면 많이 야위었지만 눈빛이 빛나고 발이 많이 부어 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 1시간 전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박동산 선생(동학 접주급)이 동학에 대하여 담론을 하고 계신다.

   그 눈빛이 대단히 호소력이 있다. 그 분 앞에 놓여 있는

저 한그릇! 의미.

   동학은 제사도 저 밥 한그릇으로 지내면 되고, 탈상도 3일 탈상을 실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녀평등을 외쳤다고 한다. 그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사상이었다.

 

 

 

손병희 선생이 기거하시다 순국하신 곳이다. 봉황각 우편에 붙어 있다. 내부엔 그 당시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봉황각 뒷편에 붉은 접시꽃이 여름임을 알린다.

 

 

봉황각 50여미터 앞 우측 언덕에 있는 손병희 선생 묘비

 

 

손병희 선생 묘소 전경

 

 

묘 우측에 서 있는 독립선언서

 

 

 

묘소에서 바라본 도봉산! 만장봉과 선인봉이 아스라이 다가 온다.

내가 자주 올라간 산이다.

 

 

 

봉황각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

 

 

봉황각 뒷편의 북한산

인수봉이 가까이 다가온다. 땅거미가 지는 때라서 사진이 선명치 못하다.

 

 

 

 

 

 

  천도교(동학교)는 일제 치하에 200만정도의 교세를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 인구가 2,000만으로 추산할 때, 10명중에 1명이 천도교인인 셈이었다. 지금은 약 2만정도의 신도가 있다고 한다.  천도교는 지금 때?를 기다린다고 한다.

  봉황각을 방문하여 설명을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태동한지 얼마 안된 종교라서 매우 현실감이 있었으며 우리의 근현대사화 역사를 함께하고 있었다.(2006년 7월 2일 방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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