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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석과 자야 그리고 법정, 무소유를 완성하다 `길상사`

윤여설 2014. 2. 6. 17:01

[서울 문학산책] 백석과 자야 그리고 법정, 무소유를 완성하다 '길상사'

  • 자료제공 : 파라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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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1.03.07 08:39

인생의 마무리가 아름다운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길상사

<파라북스 제공>
눈이 시원할 정도로 전망이 좋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조용한 성북동에서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연인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떠난 요정 대원각의 주인 자야 김영한 여사, 한국 최고의 문장가로 세상사에 뒤처진 사람들을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살폈던 상허 이태준, 대쪽 같은 심지로 나라의 독립만을 바라다 해방 1년 전에 세상을 뜬 만해 한용운. 이들의 흔적이 오롯이 성북동에 남아 있습니다.

‘삼각산 길상사’라 쓰인 산문<파라북스 제공>

백석과 자야 그리고 법정, 무소유를 완성하다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상허 이태준이 서울 한가운데 서대문 안에서 이곳으로 이사 나온지 대엿새 만에 느낀 소감이 이랬습니다. 상허는 이 성북동에서 시냇물 소리와 쏴아 하는 솔바람 소리를 늘상 듣는다고 했었죠.

성북동. 한성을 둘러싼 성곽의 북쪽에 있어 붙은 이름. 일제강점기 내내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던 곳. 이곳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들를 곳은 길상사입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에서 길상사를 가는 방법은 네 가지입니다. 6번출구에서 출발하는 길상사행 무료 셔틀버스, 기본요금 택시,시내버스(1111번, 2112번), 40여 분의 도보. 길상사까지는 교통편을 이용합니다. 약 1.6km나 되고 게다가 오르막길이거든요.

‘삼각산길상사三角山吉祥寺’라 쓰인 산문으로 들어서니 단청 없는 기와집이 보입니다. 길상사에는 석가여래불을 모시는 대웅전大雄殿 대신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極樂殿이 있습니다. 해마다 9월이면 이 극락전 바로 앞의 화단에는 석산(꽃무릇)이 흐드러지게 핍니다. 석산은 가을에 진한 핑크색 꽃이 기다란 꽃대 위에서 피었다 지고 나면 짙은 녹색 잎이 나와 다음해 봄에 시든다고 해요.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상사화想思花라고도 불립니다. 상사화. ‘그리워하다’의 뜻을 지닌 꽃에서 애달픈 로맨스가 떠오릅니다. 그 주인공 백석白石과 자야子夜를 만나 볼까요.

단청 없는 길상사 극락전. 9월이면 극락전 앞 화단에는 석산이 흐드러지게 핀답니다. <파라북스 제공>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이 시를 쓴 이는 백기행. 그러나 백석으로 알려진 시인입니다.

백석은 1936년 100부 한정으로 자비 출판한 시집 《사슴》으로 조선의 문단에 혜성처럼 데뷔합니다. 김소월의 고향인 정주에서 태어나 소월이 다녔던 오산학교를 졸업한 백석. 1930년대 조선 문단의 3대 미남 중 단연 으뜸이었던 이였죠. 당대의 최고 기생들마저 빠져들 만큼 훌륭한 외모였다 합니다.

 

진한 핑크색 꽃을 피우는 석산 <파라북스 제공>

녹두빛 더블브레스트를 젖히고 한대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백석을 볼 때마다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 시인 김기림은 광화문 네거리를 프랑스의 몽파르나스로 착각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렇게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풍모의 백석이 낸 첫 시집 《사슴》이 향토성 짙은 고향을 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랍다기보다 오히려 당황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지요.

그런 그에게 운명적 만남이 몇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통영에 살던 여인, 조선 권번의 김진향, 여류소설가 등등.

친구를 만나러 갔던 경상도 통영에서 첫눈에 반해 버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집안에서는 청혼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란’이라 불렸던 그 여인은 처음으로 백석에게 실연의 상처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편의 시에서 란이란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이루지 못한 란을 그리며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간 것 같다고 쓴 백석의 심정은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은 내 사람을 생각하는 애틋함으로 표현되고 있지요.

<통영>이란 제목의 시만도 세 편. 통영이란 동네는 백석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사는 곳이면서 풋풋한 청년을 사로잡은 첫사랑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여류소설가 최정희가 사망한 후 유족들은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발견했다는 백석의 편지를 공개합니다.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동무가 되거나 원수가 되나, 이 모든 것은 다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런 편지를 보낸 것으로 봐서 이 여류소설가가 백석의 나타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예 내가 백석의 ‘자야’임을 표명하고 《내 사랑 백석》이란 책까지 출간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이 여인이 우리를 이 한적한 성북동 길상사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이지요. 본명 김영한, 기명 진향, 그리고 백석에겐 자야라 불린 여인.


<파라북스 제공>

백석이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선생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 자야를 만납니다. 양반의 딸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16세 때 조선 권번에 든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백석이 스물여섯, 진향이 스물두 살이던 1936년. 진향을 보고 첫눈에 반한 백석은 그날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이름을 따 애칭을 ‘자야’로 지어주고 살림을 차려 버립니다. <자야오가>는 중국 진나라 때 노래를 잘한 자야라는 여인이 부른 노래의 제목인데요, 이백도 이 여자의 이름을 기려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래서 ‘자야’라고 하면 재주가 뛰어나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가리킨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에게, 아니 특히 가여운 여인 진향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백석의 집안에서 기생인 진향을 못마땅해 한 것이죠. 백석의 집안에서는 서둘러 백석을 불러들여 결혼을 시키려 합니다. 한번은 백석이 초야에 신방을 빠져나와 자야의 품을 찾았다고 합니다. 자야는 그런 백석을 보면서 스스로 떠나기를 결심합니다. 자야는 본능적으로 느꼈던 겁니다. 그들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편지 하나 써놓고 자야는 그렇게 백석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들은 이렇게 헤어지고 맙니다.

백석도 함흥을 떠나 서울 조선일보에 재입사합니다. 백석이 떠나간 것을 가슴 아파한 사람은 뜻밖에도 이북문단의 우두머리 역을 맡았던 북방인 한설야였습니다. 그는 《문단풍토기》를 쓰면서 <함흥편>에서 백석을 언급합니다. 백석이 생활에 물려서 표연히 떠나 버렸다면서, 그 귀여운 꿈을 이 북방에 죄다 선사하지 못하고 가버린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또 백석이 없어져 버린 거리는 꿈을 잊어 버린 쓸쓸한 거리일 뿐이고, 이건 마치 어두운 밤에 반짝이는 별을 잃어버린 것처럼 서운한 일이라고 말했다죠.

소설가 최정희도 그가 없는 함흥은 텅 빈 것같이 섭섭한 일이었노라고 회고한 글을 쓴 걸 보면, 백석은 타고난 방랑벽에 만나는 사람마다 진한 인상을 남기는 문학청년이었나 봅니다.

백석은 방랑벽을 이기지 못하고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100편을 가지고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합니다. 거기서 신징[新京]으로, 안둥[安東]으로 옮겨 다니며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신의주를 거쳐 귀향하지요.

이 시절에 남긴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읽어 봅니다. 아무도 맞아주는 이 없는 타향살이의 빈 방에서 오로지 백석을 맞아주는 것은 흰 바람벽뿐입니다. 희미한 십오촉 전등 아래에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는 외로운 백석입니다. 외로움은 한밤으로 갈수록 더해져 흰 바람벽에 늙은 어머니도 나오고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도 지나갑니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 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 방 안 어디에도 없는 어머니가, 아내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고통. 외로워서 떠올린 그림으로 더욱 외로워지는 악순환. 그러나 백석은 서글픔을 극복해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해 고향 정주로 돌아가기 전 잠시 머물렀던 신의주에서 쓴 시에서도 고독하고 서글픈 생활이 드러납니다. 남신의주 유동이란 동네에 있는 박시봉 씨의 방에서 쓴 시라서 제목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방랑벽과 고독함은 백석의 숙명이었습니다. 한겨울 어느 날 백석은 목수였던 박시봉 씨 집 방 한 칸에 세들어 살게 됩니다. 아내도 부모도 동생들도 없는 타향살이. 문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손깍지베개를 하고서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백석은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며 외로움을 달랩니다.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 아내도 가족도 없는 외로움.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백석입니다.

누구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헤어지고 아는 이 하나 없는 타향에서 떠돌다 보면 그렇지 않을까요. 오죽하면 맥을 짚는 늙은 의원의 손길에서 아버지도, 고향도 느끼며 위안을 받았을까요. 1938년에 발표된 시 <고향>에서는 그저 아버지와 알고 지냈다는 인연만으로도 훈훈해지고 마는 떠돌이 뜨내기의 딱한 사정이 보였죠.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백석은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은 걸 느낍니다. 슬픔도 더 이상 슬프지 않고, 외로움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닌 때에 백석의 귀에 들리는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는 소리. 화로에 더욱 다가가며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합니다.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갈매나무는 백석의 그지없는 고독함과 슬픔을 멈추게 해줍니다.

해방과 민족동란과 휴전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백석은 고향이 있는 북한에 남습니다. 이후 백석은 오산학교에서 스승으로 모셨던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러시아 문학작품도 번역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도 강의했습니다. 그러나 1962년 이후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이라고 비판받고 집필금지를 당한 채 압록강 인근 양강도 삼수군에서 노동자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남한에 남은 자야, 김영한 여사는 밀실정치, 요정정치의 꽃이었던 대원각을 운영합니다. 천억 원대에 이르는 재산가가 되었죠. 그런데 1995년에 김영한 여사는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합니다. <무소유>를 읽고 여인들의 웃음을 팔아 번 돈을 부끄러워하며 내린 결정입니다. 그리고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기증하여 1997년에 백석문학상도 제정합니다. 연인을 기리고 싶었던 거겠지요.

<파라북스 제공>

화류계를 대표했던 이 집을 불가의 도량으로 만든 분은 법정 스님입니다. 그는 소유의 고통에서 벗어나면 편안해진다는 진리를 담담히 전함으로써 물욕을 경계한 한국의 대표 문인이었지요. 그리고 2010년 초봄 입적하는 순간까지 무소유를 실천한 승려였습니다.

법정은 <무소유>라는 짧은 수필을 통해 단순한 진리 한 가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귀한 난을 얻은 후 법정의 생활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모든 인연을 끊기로 하고 계를 받은 불가의 승려에게 지독한 집착이 생긴 것이죠. 법정은 깨달았습니다. 난에 매여 있던 자신을 발견한 겁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줍니다. 그리고 비로소 얽매임에서 벗어납니다. 날아갈 듯한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섬을 느끼며 이때부터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합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버리는 연습. 그 후 법정은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살았죠.

<파라북스 제공>

길상사, 봄은 봄대로 가을엔 가을대로 자연을 담은 채 고즈넉한 도량의 한 모퉁이에 길상화 공덕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했고 사모했고 존경했던 길상화吉祥華 김영한. 스물두 살에 만나 3년 남짓을 살고 60여 년 동안 한 남자만을 사모한 그녀를 위해 상사화 보며 기도합니다.

길상사를 나와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길은 넓고 한적합니다. 처음은 검은 아스팔트였겠지만세월은 차콜그레이 색깔로 바래 놓았군요. 길상사를 가리키는 화살표의 반대 방향으로 걷는 길가는 저택의 축대가 주욱 이어져 있더군요. 너무나 높디높은 축대에 올라앉은 담입니다. 그 담에도 노란 꽃이 진 초록의 개나리며 대나무, 담쟁이가 매달려 있습니다.

여름이 걸쳐져 있습니다. 여름을 지나며 인생을 아름답게 끝맺음한 그 사람을 생각합니다. 누구나 소원하는 돈을 미련 없이 세상에 되돌린 자야, 그 거금의 돈에 눌리지 않고 소박한 절로 되살린 법정. 그리고 다만 몇 글자의 시에 한없는 그리움과 애틋함만을 담은 백석. 저 담에 걸쳐진 여름도 싱그러움만 남기고 곧 가을로 가 버리겠지요.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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