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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북 김천]의병장 학촌 박이룡(鶴村 朴以龍) 재실과 신도비

윤여설 2014. 2. 2. 17:42

학촌 박이룡(鶴村 朴以龍)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시윤(施允), 호는 학촌(鶴村). 증조할아버지는 박원직(朴原直)이고, 할아버지는 박지(朴址)이며, 아버지는 영천부사를 역임한 박성건(朴成楗)이다. 어머니는 흥덕 장씨이고, 7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인은 박윤종(朴胤宗)이다.

 

박이룡(朴以龍)[1533~1593]은 어려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진사시를 거쳐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좌랑에 올랐다. 1590년(선조 23) 해서(海西)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이때 군복(軍服)에 관한 비위 사건에 연좌되었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누명을 씻기 위해 그 길로 고향인 황간에 내려와 친척과 동리 장정 5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선조 25) 8월 군사를 이끌고 특히 횡포가 심한 왜적을 찾아 김산으로 와 하로(賀老)에 진을 쳤다. 일본군 4만 명이 개령에 본거지를 두고 김산, 지례, 성주, 선산에 예하 부대를 주둔시켜 산간벽지까지 돌아다니면서 횡탈을 부리던 때였다. 첫 싸움은 부상고개에서 일어났다. 많은 왜적을 만난 박이룡영동의 의병대장 한명윤(韓明胤), 상주목사 김해(金澥), 훈련(訓鍊) 정기룡(鄭起龍) 등 군대의 도움을 받아 세 차례나 공방전을 편 끝에 적을 물리쳤다. 10월 초에는 지례 전투에 참가하여 1,500명의 적을 창고에 가둔 채 불살라 적을 몰살하였다.

적이 점령한 성주성(星州城)을 공략할 때는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김시민(金時敏) 등 의병군과 연합전을 폈는데 박이룡은 북문을 지키고 있었다. 개령에서 달려온 적의 내원군의 습격을 받아 고전 끝에 후퇴한 적도 있었다. 제2차 성주성 공략 작전에도 참가하여 20여 명의 적을 베고, 겨울에 접어들어서는 개령방하재를 넘어 공자동으로 침입하려는 적과 싸워서 막았다. 한편 우두령 싸움에도 참가하여 적의 거창 침입을 막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밖에 하로에 진을 친 이래 그곳을 본거지로 개령, 지례, 선산, 성주 등지에서 박이룡이 치른 크고 작은 싸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593년(선조 26) 1월 처음으로 왜적과 싸웠던 부상고개에서 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박이룡은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적군에게 잡힐 순간 한명윤 대장과 강절(姜節) 대장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하로 본진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

박이룡은 의리가 있고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었다. 해서의 수령으로 있을 때 본의 아니게 일어난 일에 대해 뼈아프게 불충을 느껴온지라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속죄의 기회를 얻어 나라에 몸 바칠 때라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에 임해서는 언제나 진두지휘하면서 죽음을 각오하였다. 병석에서 일어나자 1593년 전공으로 능성현감(陵城縣令)에 제수하였으나 부상이 덧나 재임 중 순직하였다.

 

1812년(순조 12) 영남호남 사림들의 상소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김천시 대항면 덕전리 세송마을에 신도비와 사당 학촌재가 있다.

 

 재실 학촌재와 신도비

 신도비각

 

 

 신도비는 영의정을 지낸 장암 정호(송강 정철의 손자)가 지었다

 

 재실 학촌재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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