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그날의 함성
- 테마분류 ㅣ 역사
- 등 록 일 ㅣ 2012-02-29
- 관련자료 ㅣ 7개
순국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전기는 초등국어 1학기 교과서에 자리를 지켜오면서 우리 새싹들에게 3·1운동의 의의를 상기시키고 자주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켜 왔습니다.
비폭력 3·1운동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많은 국민들이 자발적, 지속적으로 참여했고 일제의 폭력대응에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자유가 귀한 목숨을 용감히 바쳤던 수많은 이름 없는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것과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얼마나 인간답지 못한 삶을 겪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012년 제93주년 3·1절을 맞아, 3·1운동 당시의 상황과 진행과정, 또 그 성과에 대해 다시금 짚어보는 시간을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독립운동관련 기록물(http://e-gonghun.mpva.go.kr), 한국독립운동사(http://search.i815.or.kr)의 도움을 받아 가져봅시다. 그리고 봄나들이 삼아 그 독립운동의 의미만큼이나 그 풍경도 아름다운 독립기념관들을 방문하는 것은 어떨까요.
>> 3·1 운동의 발생, 전개과정
> 3·1 운동의 개요
경술국치 이후 10여 년간 지속된 탄압과 약탈, 백성들이 일제 및 친일매국노에 독살 당했다고 믿었던 고종의 서거로 민중들의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아래 신음하던 식민지들의 혁명이 성공하는 경우(그러나 이는 주로 세계대전의 패전국에 소속되어 있던 식민지들이며 당시 일본은 승전국이었습니다.)가 생기면서 인도주의, 민족자결주의의 희망이 퍼졌습니다.
이 가운데 민족주의를 추구하던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연합해 고종황제의 장례일을 전해 1919년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나, 33인의 민족대표(실참여자 총 29인)는 다른 장소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경에 자수하고 전원 투옥됩니다. 한편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이들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선언문을 읽은 후 독립만세운동을 벌였고 천도교에 의해 전국으로 배포된 33인의 서명이 들어간 삼일독립선언서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0일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 고종황제 일가 출처 : 장서각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5월말까지 2개월가량 지속된 만세운동은 전국 218개 군 2백여만의 주민이 참여, 적어도 1500여회 이상 열렸고 지식인과 청년들은 물론 농민 부녀자들까지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거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일제는 비폭력 무저항으로 목청껏 만세를 부르던 이들을 헌병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탄압해 7500여명이 살해되고 4만 6천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1만 6천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 3·1 운동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상황
■ 무효조약인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20세기 초 서유럽과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우리나라도 식민지화의 대상이었습니다.
1905년의 을사늑약은 일본의 우리나라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한 이른바 제2차 한일협약입니다. 강요에 의해 체결되었기 때문에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라고 부릅니다. 이로써 조선은 사실상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즉각 항의 외교를 벌여 당시 국제법학계에서도 이를 무효로 간주하는 의견이 있었으며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양국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간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이후 경술년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통과시켰으며, 8월 29일 공포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이를 경술국치(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라고 부릅니다. 합방 후 권력에 대해 이완용과는 대치되는 권력구도를 가졌던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년 일본에 가 합방을 위한 매국흥정을 벌이기도 했으며 결국 그 둘은 일본에 합방청원서를 내기에 이릅니다.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의 친일파 대신들은 병합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고 한일합방 이후 이들은 공을 세웠다는 작위를 수여받았습니다.
10여 년 간 벌어진 일제의 약탈과 행적을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① 내정간섭
외교권 박탈은 물론 우리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제1차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리려했다는 이유로 고종황제를 폐위시켰습니다. 합방 전에는 명성황후를 무자비한 방법으로 시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10여 년 간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찾을 수 없을 만큼 폭압적인 무단정치로 우리 민족을 괴롭혔습니다. 외교권 박탈은 물론 우리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제1차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리려했다는 이유로 고종황제를 폐위시켰습니다. 합방 전에는 명성황후를 무자비한 방법으로 시해하기도 하였습니다.
② 교육
민족혼 말살을 위해 민족주의가 자생할 수 있는 교육 창구인 서당들을 없앴으며 고등교육을 제외한 기초적인 초등교육만을 우리 국민에게 가르쳐 우민화하려했습니다. 그들이 세운 교육기관인 국민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패배의식과 민족비하 의식을 심으려 하였습니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교직원들과 선생들은 제복을 입고 총칼을 찬 채 어린 학생들 앞에서 수업하였습니다.
③ 민간 통치
군인을 다루는 헌병이 민간을 강압적으로 다스렸고 죄인을 매질하는 법을 부활시켜 우리 민족을 짐승취급 했습니다.
▶ 간수 부장용 검 출처 : 독립기념관 ☞ 바로가기 |
④ 경제
토지조사를 구실로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뺏고, 회사령이라는 법을 만들어 조선인이 회사를 세우기 힘들게 방해했으며 산림, 어업, 광업에 관한 법령을 만들어 자원을 수탈해갔습니다.
> 3·1운동 발단의 기폭제
■ 잇따른 독립선언들
1919년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에 앞서 도화선이 된 독립선언들이 해외에서 잇따랐었습니다. 무오 독립선언(1919년 2월 1일)은 중국 동북부 길림성에서 조소앙, 신채호 선생 등 만주와 러시아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추어 조국독립을 요구한 독립선언서이며 2·8 독립 선언(1919년 2월 8일)은 일본 동경의 조선 유학생들이 한 독립선언입니다.
▶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 개최 안내문 출처 : 독립기념관 ☞ 바로가기 |
■ 고종 독살설과 장례식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 직후 전국에 번졌던 '독살설'은 3·1 운동 발발의 계기였습니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가 나붙었고, 국민들은 민족적 울분을 안고 황제의 국장(3월 3일)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혐의자로는 일제와 매국노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韓昌洙)와 시종관 한상학(韓相鶴), 윤덕영 등이 거론되었습니다.
■ 만세운동 당일날과 전파 상황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날이 저물 때까지도 서울 이곳저곳에서 계속되었습니다. 학생들의 모자는 하늘 높이 던져지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 거리를 누비며 독립선언을 기뻐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습니다.
덕수궁 앞 대한문 일대와 종로 보신각, 광화문, 남대문 등 사방으로 행진이 이어졌고 해 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나갔습니다. 보신각 앞은 이후에도 만세운동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습니다.
▶ 덕수궁 앞 만세시위 출처 : 독립기념관 ☞ 바로가기 |
만세운동은 교통이 편리한 철도 연변의 대도시에서 중소도시와 읍,면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지방의 만세시위 운동으로 규모가 컸던 날짜는 대부분 장날과 맞아떨어집니다. 장터는 군중이 모이고 정보가 전달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장소에서 5일, 10일 간격으로 몇 차례 씩 거듭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민족적개심의 끈질긴 발현을 보여줍니다.
>> 3·1운동의 결과와 영향
삼일운동 이후 만세운동은 몇 년간 계속되었지만 자주독립은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이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우리나라는 연합국에 의해 자주적이지 못한 독립을 이루고 반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나 민족적으로 봉기했던 만세운동은 몇 가지 큰 변화와 교훈을 가져왔습니다. 먼저 독립운동 접근방식의 변화와 일제의 무력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한민족의 정체성을 세계인들에게 인식시키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사를 전 세계에 지속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 출옥하는 항일운동 투사들 출처 : 한국여성사 지식정보시스템 ☞ 바로가기 |
① 상해망명정부(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만세운동의 한계를 통해 민족의 주체적 해방을 위해서는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투쟁해야할 필요성과 그 주체가 민중이어야 한다는 각성과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나아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점차 공감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경 국내 외 곳곳에 임시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후 실질적인 정부는 4월 13일 수립·선포되었던 상해임시정부에 집결해 1919년 9월 15일 통합임시정부를 구성합니다.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김구선생 등이 환국할 때까지 일제의 강제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했던 3권 분립의 민주공화정부였고 임시 정부수립은 식민지의 조선인들에게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만세운동의 가장 큰 열매인 상해임시정부의 의의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전개되었던 독립운동이 하나의 구심점을 형성해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광복을 이뤄낸 원동력이 됐다는 점입니다.
② 6·10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 순종(1907~10 재위)의 인산일(因山日)을 기점으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입니다. 3·1운동의 경험을 되살려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 하에 진행된 이 운동은 이전보다 강력해진 일제의 통제 체제 하에서도 은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8차례의 시위와 전국각지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 때의 경험은 이후 신간회 발족 등으로 보다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토대가 됩니다.
>> 방문해 볼 만한 독립기념관
3·1절을 쉬는 날로만 넘기기보다는 부쩍 따뜻해진 봄 날씨와 함께 순국열사들의 기념관을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지요?
또한 각 지역 별로 재현되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의미 있을 듯 합니다. 멀리 가기 힘들다면 관련사이트에 마련된 사이버전시관을 탐방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습니다.
> 독립기념관
규모가 크고 관내 풍경이 아름다워 가족단위의 방문으로도 인기가 높습니다. 태극기들이 휘날리는 모습은 애국심을 떠나 그야말로 장관을 이룹니다.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230번지, 전화 041-560-0114, 홈페이지 및 사이버전시관 (http://i815.or.kr)
>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화성 발안 장날 주변으로 격렬했던 만세운동에 대해 일본이 치밀하게 계획진행한 제암리, 고주리 학살사건. 이로 일본의 만행이 국외로 알려졌습니다.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전화 031-369-1663, 홈페이지 및 사이버전시관 (http://jeamri.hssisul.or.kr)
> 유관순열사 기념관
기념관 외에도 아우내만세운동 기념비, 유관순 열사 생가 등 유관순 열사 관련 유적을 일대에서 함께 돌아볼 수 있습니다.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252, 전화 041-564-1223, 홈페이지 및 사이버전시관 (http://www.yugwansun.com)
이밖에도 안성3·1운동기념관, 인천 황어장터 만세운동기념관, 또 국외로는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가 볼만합니다.
※ 참고문헌 및 사이트
ㅇ 다음백과사전
ㅇ 국사시간에 세계사 공부하기, 김정
ㅇ 삼일운동사 연구, 김진봉, 국학자료원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이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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