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및 유적답사

윤익병 군수가 세운 (봉곡서원)

윤여설 2012. 1. 12. 12:38

 

 

 

 

 

 

 



충남 논산시 연무읍 마전리에 있는 서원입니다.

저희 증조부 정읍 군수 윤익병 할아버지께서 세우셨습니다.

윤익병 군수는 광무 3년에 과거시험에 3등으로 급제하셨습니다. 

 

 

 

 윤익병 증조부를 저희 어머니는 뵈었다고 합니다.

 풍채가 매우 좋으셨다고 합니다.

 

 

 

 

 

 

 


 

 

 

 



     봉곡서원은 숙종38년(1712) 여산 공촌면 장항리에 창건하였다.
     묵암 이계맹, 고담 이순인, 취은 남명한, 추당 진극효, 경재 남두건 제 선생을 모시다가 고종 5년(1868) 서원
     훼철령에 의거 철폐된 후 1899년 돈암서원 유림에 의거 여산향교 유림과 여산부사 윤기진 및 정읍군수 윤익병력으
     로 봉곡서원지에 5선생 단을 설치하여 봉곡단소로 운영되다 유림 출연금과 문교부 지원으로 1966년 3월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 상세정보

     * 규 모

       사우는 정면3칸, 측면1칸 전퇴간으로 1단의 장방향 기단 위에 주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운 맛배 지붕으로
       겹처마 건물이다.


     * 유 래

       1711년(숙종37년) 9월에 우암 송시열, 오봉 이호민의 발의로 1712년에 여산 공촌면 장항리에 창건하였다.
       1868년 전국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9년에 조정으로 부터 훼철서원 복설령이 있자 여산 향교 유
       림과 여산부사 윤기진, 정읍군수 윤익병이 주도하여 봉곡서원지를 세워 設壇 봉행하니 이것이 봉곡단소(壇
       所)이다.


   ♣ 위 치 :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1087-35

 

 



 

배항인물

1)주벽-이계맹(李繼孟, 1458~1523)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암(墨巖)이며, 본관은 전의이다. 148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설서, 정언을 거쳐 집의, 좌승지를 지냈다.

1489(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영광에 귀양 갔다 돌아와 1506년 중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에 올랐다. 1507년에는 다시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좌되어 진도로 귀양 갔으나 억울함이 판명됨에 따라 동지중추부사로 복귀하였다. 1509(중종 4)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고 이듬해에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다녀온 뒤 평안도 관찰사를 거치 호조·형조·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17년 주청사(奏請使)로 다시 명에 가서 ?大明會通?에 이인임과 그 아들 단()4왕을 살해했다고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 귀국 후에 보고하였다. 이어 좌찬성,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519(중종 14) 기묘사화 때는 병을 이유로 김제에 있다가 다시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며 본원(本院) 외에도 전주의 서산사(西山祠)와 김제의 용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2)이순인(李純仁, 1543~1592)

조선조의 문인으로 자는 백생(伯生)·백옥(伯玉)이며 호는 고담(孤潭), 본관은 전의이다.

현감을 지낸 이홍(李泓)의 아들로 1564(명종 19) 생원이 되고 1572(선조 5)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정언,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84년에 직제학, 1586년에 사간이 되었고, 이듬해에 형조참의로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후 이조참의를 제수받았다.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입, 윤탁연, 하응림, 송익필 등과 함께 당대의 8문장가로 칭송받았다.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3)남명한(南溟瀚)

자는 운약(雲若)이고, 호는 취은(醉隱)이며 본관은 의령이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사람들이 남지효(南至孝: 남씨의 지극한 효성)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김장생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인조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고 책임을 완수하자 나라에서 벼슬과 상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후에도 관직을 사양한 채 처사(處士)로서 은거하며 봉곡정사(鳳谷精舍)에서 학문만 강론하였다.

4)진극효(陣克孝)

호는 추당(湫塘)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 때 진사가 되어 학업에 전념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독실하여 시인 묵객들과 교우하였으며 제자들을 모아 시례(詩禮)를 강론하니 문하생이 많았다고 한다.

 

5)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로 남명한의 장자이다. 아버지와 함께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강론함을 낙으로 삼았다. 부친을 닮아 남두건도 효자여서 아버지가 병으로 눕자 식사를 전폐하다시피 하며 간호를 하였고 부친이 자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이었지만 냇가로 나가 자라를 잡아 봉양하였다고 한다. 그 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예절을 행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전북 정읍시의 충렬사(이순신 장군 사당) 경내에 있는

 윤익병 군수의 선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