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고양이들<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윤여설 2011. 2. 4. 15:00

 

                             구제역 파동으로 연일 소란스러운 농촌이지만

                             연일 40여일 간을 영하의 날씨를 보이고 있지만

                             봄은 분명히 먼 발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들이 퍽이나 졸음에 겹다.

                                           내가 다가가자

                                          고양이들이 일어서서 경계를 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고양이들이

                                  다시 자리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직 경계의 눈빛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 녀석들이 이렇게 볕을 쬐고 있는 것은 곧 봄이 온다는 증거이다.

  

   잠시!

 이장희(1900~1929)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다"가 떠오른다.

 

                        

이장희 시인

         

고월 이장희는 1900년 11월 9일, 대구의 부호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바 있는 이병학의 세 부인 중 첫 번째 부인한테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대구 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의 경도중학교를 졸업,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 12남 9녀 ),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여 항상 일본인과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받기와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직전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어두운 방에 갇혀 하릴없이 금붕어만을 그리다가 29세의 일기로 극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고월 이장희는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분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 오상순 )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달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트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가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듯하여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 공초의 술회 ).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

대구 시내에는 고월 이장희의 고풍스런 생가가 아직도 남아있으며 종로 가구골목옆에 있는데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왜 하필 고월 이장희는 금붕어를 그렇게 많이 그렸을까? 어쩌면 그것은 어항처럼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자방이 커지면 화판이 떨어지듯, 가을이 깊어지면 잎사귀가 흩어지듯이 이렇듯 그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아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와 그의 고독과 그의 시가 완전히 합체되었을 뿐이다. 아아 그는 마침내 그 돌아갈 바에 돌아갔을 뿐이다. 나는 다시 무엇을 슬퍼하랴 그러면 그의 죽음은 무엇이냐? 그것은 그의 최후의 시였다. 그 최대의 걸작이었다. 김영진은 친구 고월을 추억하며 이런 글을 썼다. ( 1929. 11월 11. 중외일보 기재 )


초췌한 얼굴에 초라한 옷차림, 언제나 문학서적을 한 권쯤 옆구리에 끼고 처마 밑으로만 다녔다고 하는 고월, 그는 스스로 닫힌 공간에 유폐되어 시 말고는 달리 구원이 없었을 것이다. 뼈를 깍듯 시의 일구일자에 매달렸다고 한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시적 직관, 탐미와 우울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우수의 색조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자살하기 4년 전에 그는 달밤 모래 위에서 라는 시를 썼다.


자빠진 청개구리의 불룩하고 하이얀 배를 보고

야릇하고 은은한 죽음의 비린내를 맡는다.


그가 죽기 몇 해 전, 일본의 아꾸다가와( 개천 )가 자살했을 때 고월은 유서란 것은 이미 현세에 대한 미련을 표시함이 아니냐? 그렇다면 현세에 미련을 가진 자가 무슨 자살할 필요가 있는가? 비록 자살의 용기는 가하나 그가 남기고 간 일편의 유서는 유감이다. 라고 험절하였다. 그러나 아리시마다께오의 자살에 대해서는 무사기한 천진스러움 이라고 칭찬했다. 평소 그의 생각이 이와 같았기에 고월은 사진 한 장은 물론이요, 자살에 대한 한 마디 유언도 반구의 유서도 없이 떠났음은 물론이다.


아침 문득 접한 고월 이장희의 자살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자판으로 다시 쳐보면서 내가 아는 그의 시 “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라는 시를 떠 올려 봅니다. 그 당시의 시인들이 천재라 일컬었던 시인, 그러나 나는 그의 시 두 편인가를 접해봤을 뿐인 사람, 글을 읽으면서 그의 가족사는 자살을 불러오기에 충분했을 거라는 가상을 해 봅니다. 아버지와의 사상적 괴리는 사실상 가족과의 결별을 가져오고 그 결별 속에서 감성이 풍부하던 젊은 시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와 친했다는 공초 오상순이라는 시인도 별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생각을 해보면 고독을 온 몸에 담고 사는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출처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3&docId=103794128&qb=7J207J6l7Z2sIOyLnOydu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1&pid=gRCWLdoi5TVssZVj4Slsss--025991&sid=TUksiZodSU0AAFCmCYY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차 아래로 숨어서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저 녀석의 눈빛에 분명 봄이 어려 있다.

                      저 녀석의 수염에 정녕 봄의 생기가 뛰어 놀고 있다.

                      생에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한파이지만

                      저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봄을 생각해 본다.

                      봄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