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백석에 와서 15

윤여설 2010. 4. 18. 07:28

   

 

 

    백석에 와서15

 

 

 

   지난 겨울은 유독 괴팍했다. 10년만에 내렸다는 폭설도 그렇지만 날씨 또한 매우 추웠고 우중충한 날이 많았다. 그리고 올 봄 또한 매우 변덕스럽고 꽃샘도 소가지가 심하다. 풀릴 듯, 포근해 질 듯하며 다시 추워지는 날씨 덕에 몸은 다시 움추려 든다. 그러나 앞산(호명산)이 아주 미미한 변화가 있다. 마치 어느 화가가 푸른 물감을 매우 엷게 바르는 것처럼.

 

   황량한 땅에서 두런두런 생기가 돌며 새싹이 움트는 것은 신비하다. 앞산 계곡에 들어가 봤다. 남향의 물이 고인 웅덩이(둠벙)엔 벌써 북방산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오늘 날씨도 그렇게 포근하지 않고 경칩도 삼일이나 남았는데도 그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디 그 뿐인가! 벌써 짝짓기가 시작됐고 웅덩이 한켠엔 아직 얼음이 있지만 개구리알이 발견됐다. 다시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개구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쌍을 잡아봤다. 아직은 수온이 차가워서 활발히 움직이지 못하지만 손에 잡힌 생명체의 움직임에 전율했다. 수컷이 암컷의 등에서 앞발로 단단하게 꼭 잡은 것을 보며 생명의 경이를 다시 한 번 느낀다.

 

   다시 개구리알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작은 우주였다. 투명한 단백질 구슬 속에 점점이 박힌 검은 배아씨들! 어찌보면 신이 만든 가장 신비한 보물덩이거나 투명한 포도송이를 펴 놓은 것 같다. 모든 생명체들은 암수의 사랑으로 저런 난자 속에서 잉태되어 빛과 영양을 공급받아 태어난다. 저 개구리알도 대지의 보호아래 태양의 열을 받아 곧 부화될 것이다. 이곳도 아직은 청정지역이라곤 하지만 둘러보면 계곡의 곳곳에 철제의자들이 널브러져 있으며 산업폐기물들과 건축 잔해들이 널려 있다. 이런 곳에서 저런 개구리알들이 산란되고 있다. 이제 올챙이들이 관찰될 것이며 생명체들은 유기적으로 연관을 이루어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잠시만 살펴보면 이상한 현상들이 목격되곤 한다. 물속에 잠기 철제의자 곁에 산란된 개구리알이 얼어 있다. 쇠붙이는 열전도율이 높아 밤이 되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자 즉시 언 것이다. 동시에 그 의자에 붙어있던 개구리알도 얼어버렸다. 저 개구리알은 이제 영원히 부화되지 못할 것이다.

계곡물은 사람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血)며 하천은 인간의 혈관이다. 둘러보면 이 깊은 산에까지 가져다가 몰래 버린 산업폐기물들이 계곡물을 오염시키고 몇 발자국만 내려가면 행락객들이 버린 술병이 나뒹굴며 비닐들이 계곡을 질식시키듯 군데군데 덮고 있다. 또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음식점 등과 계곡물이 만나며 그 투명한 물은 자정능력을 읽고 뿌연히 변해 악취를 풍기며 흘러간다.

 

   “이 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처벌을 받습니다”라는 경고판 아래에도 버젓이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가끔 관공서에서 나와 치우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쓰레기가 수북해진다. 이제 진부한 말이 됐지만 자연과 사람은 하나다. 등산을 가서 산이나 계곡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결과적으로 쓰레기를 내가 먹는 일과 동일하다. 산에서 발원된 물은 계곡을 흘러 다시 정수장을 거쳐서 수도를 통해 내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내가 몰래 쓰레기를 버림으로 해서 좀 더 배낭이 가볍고 하산하는데 편리할지 모르나 그것은 잘 못 드려진 습관이며 잘 못 먹은 환각제와 같다. 우선 이 자연을 파괴하며 장기적으론 내 몸을 썩게 하는 꼴이 된다.

저 계곡에 버려져 썩어가는 산업폐기물들. 업자들이 버렸는지, 가정에서 버렸는지 모르나 그들은 얼마간의 비용을 아끼려고 자신의 혈관을 부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자녀들에겐 분명히 자연을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이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을 관공서에서 단속한다고 모두가 해결될 수는 없다. 열사람이 도둑 하나 못 막는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모든 산과 계곡에 감시원을 배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산과 계곡에 오물을 버리지 않는 것은 개개인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 어진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가능한 일이다. 즉, 자연과 나는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자연은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살아가는 방법과 생김새는 다를지라도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 연관되고 어울려 사는 곳이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할 때 산과 계곡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을 때, 나는 더욱 건강해지고 이 자연은 더욱 푸르르며 우리에게 수백 배 수천 배의 보답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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