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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도 통하는 조선의 CEO, 세종대왕

윤여설 2008. 3. 20. 07:35
현대에서도 통하는 조선의 CEO, 세종대왕
 
 
 

몇 해 전 공중파 드라마 ‘주몽’의 방영을 본격적인 시작으로 사극 열풍이 불면서 이후 TV에서는 성종(‘왕과 나’), 정조(‘이산’), 세종(‘대왕 세종’) 등 왕의 일대기를 주제로 하는 드라마들이 인기를 얻으며 방영되고 있습니다. 이전의 사극이 무겁고 엄숙했다면 요즘의 사극에서는 인간적 고민과 실재가 투영된 캐릭터가 살아 있어 현대인의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막연히 훌륭한 업적들로만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던 역사적 인물들은 이제 그간 후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성품, 어린 시절, 그 인간적인 면모나 심지어 이성관까지, 당대의 정치권력구도는 물론 궁중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왕으로서의 업적만이 아닌 한 인물로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습니다.

519년 간 지속된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 우리에게 가장 널리 인지되고 있는 왕은 단연 세종대왕(1418년~1450년)일 것입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대마도 정벌, 집현전 활성화 등 찬란한 업적으로 회자됨은 물론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쓰이고 있는 만원 권 지폐에도 인쇄되어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최근 세종의 업적 외에 그의 학자 또는 지도자적인 면모 등이 현대인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는데, 서점가에서도 관련된 책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세종 열풍’이라는 수식어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 모 기업 산하 기업전문교육기관에서는 ‘세종대왕 리더십 과정’을 열어 지난 6기 강좌까지 대학교수, 기업 CEO, 학생 등 500여 명의 수강생을 배출하고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칭송되던 부분입니다만, 특히 세종대왕의 경영자적 능력은 기업 CEO, 혹은 당대 대통령이 추구하는 인물로 세종을 꼽을 만큼 높이 평가 받고 있습니다. 

태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독서광 셋째 아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래 세자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세자는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이었는데, 어떻게 세자와 둘째 형 효령대군을 두고 셋째인 창녕대군이 왕좌를 물려받을 수 있었을까요? 

중앙집권을 이룩하고자 노력을 계속해온 부왕 태종은 수성군주가 될 후계자를 원했는데, 호방하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듯한 양녕대군 보다는 창녕대군을 마음에 두고 은연 중에 그 뜻을 비추었다고 전해집니다. 때문에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내어 놓기 위해 더욱 노는 것에 열중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 둘째인 효령대군은 충녕대군이 새로운 세자로 책봉되자 바로 불교에 귀의해 중이 됩니다. 효령대군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우고자 하는 태종과 양녕대군의 뜻을 읽고 그리했다고도 합니다.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부왕 태종은 외척의 개입이 왕권에 위협이 되어 왕의 뜻을 펼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태종과 세종의 외척을 제거해 세종이 안정적인 왕권 위에서 정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창녕대군이 태종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을 깊이 즐기고 신중하며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종은 평생 여러 가지 질병을 안고 살았다고 하는데, 어려서는 밥 먹으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어느 날은 한 쪽 눈에 안질이 걸렸는데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걱정하여 주변의 책을 몽땅 감추자, 나머지 한 두 권의 책을 발견해 달달 외우도록 그것을 읽고는 “재미없는 내용이었지만 여러 번 읽다 보니 재미가 있어지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글을 좋아하던 창녕대군은 훗날 집권 후 집현전에 각각의 방면에 조예가 있는 인재를 모아, 다른 관직에 가지 못하고 연구에만 몰두하게 합니다. 전공을 정해준 후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10년간 절에 보내고, 이후 전공 별 과제를 주어 해당 분야를 집대성하게 하거나 현안을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세종조에서 여러 가지 법제가 마련될 수 있었던 것도 집현전 학자들의 이론적 지지가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의 학자들과 늘 경연을 열었습니다. 경연은 학문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자리인데 여러 방면에 있어 세종의 학문의 깊이가 경연관들을 넘어설 만큼 깊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리더쉽과 현대 기업CEO의 공통점

훈민정음 창제, 예악의 발전, 과학기술과 발명 등 모든 것을 세종대왕 혼자 해낸 성과라 하기보다는 각 분야에 뛰어난 인재를 찾아 배치하고 그 인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주변여건을 만들어 주며, 연구개발에 투자할 수 있도록 권장한 경영방식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일의 추진에 있어 최종 결정권을 올바르게 행사하기 위해 그 자신이 다방면에 깊이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다는 것도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요즘, 이전의 독불장군 방식이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실무에 관여하는 CEO 스타일보다는 적재적소에 적임자를 배치하고 구성원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며 의지를 북돋워주는 타입의 CEO가 더 큰 성과를 내는 경영자로 주목되고 있는데, 그들과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방식 사이에 상당 부분 통하는 것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정치학에서 리더쉽은 해당 인물의 주변 엘리트들과의 관계, 민초들과의 관계 및 평판을 살피면 드러난다고 합니다. 부왕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이후 세종은 ‘의논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재 선발부터 법과 제도의 혁신은 물론 영토개척에 이르기까지 집현전의 학사들을 포함한 신하들과의 열린 대화와 토론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했습니다.

그리고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를 강조하며 어떤 정책을 실행함에 있어 그것이 백성을 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하였습니다. 또 세종실록을 보면,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업무분담이나 권한 위임에 긍정적이었다는 사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함에 있어 신하와 민중의 공감을 우선으로 여기는 지도자만이 가질 수 있는 흡인력과 신뢰감. 이는 현대의 지도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자질일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지도자로서의 추진력

세종대왕은 추진력 면에서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재위기간 동안 여러 가지 업적을 이룩한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일례로 들 수 있습니다. 당시 훈민정음 창제를 집현전 학사들이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가 심하자 세종은 아예 궁중에 따로 인쇄시설을 갖추고 환관과 서리, 장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추진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실록에는 창제과정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또 세자로 책봉되기 전 일화로 부왕이 칙사를 대신 접대하라고 했을 때 칙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기도 했던 양녕대군과 달리 충령대군은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대작하면서 칙사의 비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일화들은 세종대왕 시대의 찬란한 업적이 세종 개인의 학문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고 최대한의 성과를 끌어낼 수 있도록 다루는 지도력, 강력한 추진력, 상황을 읽고 만들어나가는 경영자적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보여줍니다. 


(
국가 지식포털에서 옮겨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