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및 유적답사

무령왕릉

윤여설 2008. 1. 7. 14:39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공주시의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 중의 한 무덤이다. 1971년 송산리 6호분의 내부에 스며드는 습기를 막기 위한 보수공사 도중 새로운 고분이 있음을 알리는 벽돌들이 드러나면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알려지게 된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 양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전축분임이 확인되었고 발굴도중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을 적은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다시 많은 관심을 모으게 된다. 지석에 무덤의 주인공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이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지석의 발견으로 무령왕릉은 수많은 삼국시대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가 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무덤에 묻힌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왕릉이라는 사실이 이 고분의 고고학적, 역사적 가치를 말해주게 된 것이다. 백제 고분이 대부분 도굴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완전하게 발견된 처녀분이었다는 점도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출토된 유물들은 절대연대가 확인된 것들이어서 이후 삼국시대 문화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기준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108종 2906점이라는 많은 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유물들은 그 가운데 17점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뛰어난 유물들이었다.
또 귀걸이를 비롯한 금속공예품들은 정교한 제작기술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 고구려와는 또 다른 백제미술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무령왕릉에서는 중국도자기들도 많이 출토되었다. 이 도자기들은 중국 남조계통의 무덤구조와 함께 무령왕이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용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진묘수
석수는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의 일종인데 우리나라 고분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진묘수는 기괴한 형태의 신수를 표현한 상상속의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를 쫓고 사자를 지킨다는 중국의 묘장풍습에서 나온것이다. 이 석수의 형태는 뭉툭한 입과 코, 작은 귀, 비만한 몸통, 짧은 다리, 등에 돌기된 4개의 갈기, 4개의 다리 위에 붙은 날개, 정수리에 꽂힌 사슴뿔 모양의 쇠 뿔 등이 특징이다. 현재는 많이 지워졌지만 아직도 희미하게 입술에 발랐던 붉은 색이 남아 있다. 발굴당시 무령왕릉의 연도 중앙에 밖을 행하여 놓여 있어서 무덤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유물이다.

동탁은잔
탁잔(托盞)은 동제잔대(銅製盞臺), 동제잔(銅製盞), 은제개(銀製蓋)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잔 받침대(盞臺)는 얕고 넓은 굽이 있는 접시형이고 중앙에 높은 받침이 있다. 이 받침 아래 끝을 중심으로 연화문띠(蓮花文帶)가 돌려 있고 그 바깥 둘레에는 분간하기 어려운 문양대가 있다. 연화문(蓮花文)은 둥근 꽃잎 끝의 안쪽에 가장자리를 따라 한 줄의 각선이 있고 그 사이에 여러 줄의 종선(縱線)을 음각하였으며 고사리 모양의 꽃줄 2개가 있다.
잔(盞)은 굽이 달린 완형(碗形)이며 잔의 굽은 작아서 잔 받침대(盞臺) 받침 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문양은 구연에서 3.3㎝ 아래에 음각선 한 줄을 돌리고 그 밑에 8엽의 단판연화 (單瓣蓮花)를, 위에는 운용(雲龍)을 돋웠다.
연화(蓮花)는 꽃잎 끝이 뾰족하고 잔대(盞臺)의 것과 동일하게 둥근 꽃잎의 안쪽에 음각선을 긋고서 그 사이에 종선(縱線)을 그었으며 밑에는 5~6줄의 고사리 모양 꽃술을 돋웠는데 굽은 씨방으로 한 앙연(仰連)을 나타낸 듯하다. 구연 가까이에는 C자형 곡선을 반전, 연속시킨 운문(雲文)이 있고 그 밑에는 가늘고 긴 몸체에 지느러미 같은 발과 꼬리가 달린 용 3마리를 잇대어서 음각하였다. 뚜껑(蓋)은 표면 중앙에 꼭지까지 삼중의 연화(蓮花)와 연뢰(連雷)를 음각하였고 둘레에는 山(산)·水禽(수금) 등을 배치하였다.

계수호
중국에서 자기의 생산은 이미 전한시대부터 비롯되었고 서진과 동진 그리고 남북조시기에 이르면 월주요를 중심으로 청자가 대량생산되었다. 흑유 자기는 비록 송원 시기에 유행한 것이기는 하나 이미 한진 시기부터 제작되었고 특히 양진 시기의 흑자생산은 남방지역에서 매우 성행하였다.
계수호는 초기에는 아주 작은 반구호의 견부에 한쪽 면에 계두를 붙이고 다른 쪽에는 계미를 붙였던 것이 동진대에 이르면 호신이 크게 변하여 앞에 장식한 계두의 모양새에서 목을 당기고 벼슬을 높게 하였으며 뒷부분의 계미는 원지형 파수로 변화되는가 하면 이 파수는 상단의 기구와 연결되고 하단은 기물의 상복부에 연결되는 변화상이 추적되기도 한다.

여기에 동진 중반기에 이르면 파수의 상단에 용두와 용미가 장식되는 기형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가 남조시기에는 기신이 길어지고 구경이 더욱 높아지면서 조형이 더욱 실생활에 적합하도록 변화된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중국제 자기가 유입되는 것은 원삼국기 혹은 삼국기 초반으로 특히 백제의 고지에서는 중국제의 자기출토가 매우 높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

유리제 동자상(왕비)
유리로 만든 동자상은 머리를 깎고 손을 합장한 인물이 표현되어 있다. 허리에 구멍이 관통되어 있는데 여기에 끈을 넣어 펜던트처럼 매달아서 수호신이나 부적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물건을 중국에서는 옹중이라고 부르며 남조시대에 유행하였다.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이 동자는 불교 승려이거나 도교 도사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출토목관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과 왕비가 모셔졌던 화려한 장식의 목관 2개가 출토되었는데 목관으로 사용된 관재의 수종을 분석한 결과 침엽수 계통의 금송으로 밝혀졌다.
목관에는 금박을 입힌 관고리와 관정 그리고 화형장식 등을 곳곳에 부착하여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특히 운반용 고리를 관의 측면에 부착하였는데 그 모습이 오늘날까지 잘 남아 있어 당시 화려했던 목관의 모습을 보여 준다.
마구리 장식은 동쪽의 관대 앞에서 발견되었다. 얇은 은판을 접어서 만들었으며 표면은 흑칠이 되어 있고 배면에는 나무에 박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