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및 유적답사

부여 낙화암에서

윤여설 2007. 12. 24. 10:04

 

  

                                      부여 낙화암에서

 

 

                                                                                                                                                                 

 

   백제사의 마지막 장이 펼쳐졌던 부여!

나는 지금 그 사비(부여)의 부소산성에 서 있다. 조국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남한은 신라 연구에 치중했고, 북한은 고구려사를 주로 논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조명은 이제 시작이라고나 할까?

 

 

 

   백제는 원래는 서울의 한강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다.「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온조가 재위 14년에 한수(한강)의 남쪽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하남위례성이 어딘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최근 발굴되는 유물로 봐서 강동구의 풍납토성으로 확정되어 가는 추세이다.

    백제는 한강유역에 493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가면서 한강을 통해 활발한 국제교역과 문화를 꽃피어 왔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침공을 받자, 백제의 개로왕은 남한산성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송파벌에서 잡혀서 아차산으로 끌려가서 장수왕에 의해 죽게 된다. 이 당시 태자인 문주(文周)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해 1만 군사를 얻어 돌아왔으나 이미 한성(南漢山城)이 함락되었으므로, 지방호족들의 요구에 의해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로 옮긴다. 이로써 백제의 한강시대는 끝을 맺는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왕권의 약화 등으로 그 세력이 급격히 쇠약해지며, 63년간의 웅진시대를 마감하고 26대 성왕에 의해서 이곳 사비(부여)로 옮긴다.

   사비로 천도한 백제는 국력 확장을 꾀하며 무왕은 익산왕궁을 건립하고 미륵사지를 세우는 등의 필사적 중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31대 의자왕을 끝으로 그 역사의 막을 내린다(660년).

 

                                                                  (낙화암에 서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모셨던 삼천 궁녀가 몸을 날렸다는 낙화암!

그 절벽 아래로 도도히 백제의 자존심을 안고 백마강이 흐른다. 설화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하던 나당연합군의 당나라군은 강물이 사나워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소정방은 강을 지키는 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바위에 끈으로 백마를 묶어서 강물에 미끼로 넣었다. 그 백마를 물으려고 달려든 용을 향해 밧줄을 던졌다. 밧줄은 정확하게 용의 목을 옭아맸다. 용은 필사의 몸부림쳤으나 결국 끌려나오게 된다. 그리고 강물이 잠잠해지자 강을 건너서 도성에 진격하게 된다. 설에 의하면 그 용은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밧줄 자국이 남은 조룡대라는 바위가 전해져 내려오고, 또한 백마를 미끼로 사용했다고 하여 부여를 휘감고 도는 강이 백마강이라고 전한다. 또한 부여의 정림사지5층석탑의 제1탑신(塔身) 4면에는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새긴 기공문(紀功文)이 지금도 남아 있다.

 

   누가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당시의 백제의 인구가 얼마쯤이었을까? 삼천궁년는 분명히 과장되었을 것이다. 또한 과장되었다고 해서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그것이 그냥 역사이므로…….

   삼천궁녀의 한이 어려 있는 백마강의 가을은 소슬하다. 깎아지른 절벽 어딘가에 궁녀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또한 패망한 나라의 비애가 아직도 어른거리는 것 같다. 단풍이 붉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아스라이 유람선만 유유히 떠다닌다. 또한 관광객들의 발걸음만 바삐 움직인다.

 

                                                                       (서동요 세트장)

 

   잠시, 여기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에 대하여 살펴보자!

   무왕(서동)은 몰락한 왕실의 후손이었다. 그가 즉위하는 데는 곡절이 많았다. 선왕인 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마를 케서 생계를 유지하는 평민으로 전락한 서동은 귀족계급들에 의해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많큼 무왕의 왕권은 취약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신라를 공략했다. 또한 신라와의 화해를 위해 “서동요”를 유포시켜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 요즘의 정략결혼인 셈이다. 그러나 무왕은 무리한 익산 천도와 미륵사지 건설에 국력을 소모한 나머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실제로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한 것 같다. 마한의 옛터였던 익산엔 왕궁이라는 지명과 왕궁터가 있다. 지금 왕궁터는 한창 발굴이 진행 중이다. 또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묘라고 전해지는 익산 쌍릉이 있다. 그동안 익산 왕궁이 백제가 천도를 했었는지? 아니면 별궁이었는지 확실치 않았으나, 요즘 발굴되는 유물로 봐서 천도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익산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기가 가장 유리한 곳이다.

                                                                 (국보289호인 익산 왕궁리 5층석탑)

 

   또한 왕궁터에는 국보289호인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 서 있다.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모양이 비슷하지만 탑이 그보다 크고 웅장하다. 백제의 전형적인 석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동안 왕궁리 5층석탑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 학자들은 궁궐 안의 내불당의 석탑으로 보는 학설과, 그 후에 세웠다는 설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요즘 출토되는 유적으로 봐서는 익산으로 천도한 무왕이 죽고 국력이 쇠퇴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다시 부여로 환궁하면서 익산 왕궁을 헐고 그 위에 무왕을 위한 절을 짓고 탑을 세운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의자왕은 익산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부여로 귀환한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의자왕은 타락한 왕이 아니라 매우 효자였다고 한다.

   다시 부여로 돌아온 의자왕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부왕의 백제 중흥의 실패를 고스란히 떠안고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회복 불능에 빠진 국력의 쇠퇴 또한 그의 왕권을 매우 위협했을 것이다.

 

                                                                                         (낙화암의 고란사를 배경으로......)

 

 

   가을바람이 부는 부소산의 낙엽이 하늘하늘 진다. 간간히 외국인도 눈에 띈다. 저 관광객들은 의자왕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통역을 하는 안내원의 말을 듣고 한 서양인이 낙화암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국력은 쇠퇴하고, 왕권은 기울어가고, 괴로운 의자왕은 아무래도 주색을 가까이 했을 것 같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계백장군은 황산벌(지금의 연산)에서 탄현炭峴(익산 왕궁리 근처)을 넘어온 신라군을 맞아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황해를 건너온 당나라군은 백마강을 건너서 진격한다.

   사실! 당시, 황해를 건너온 당나라군은 긴 항해 끝 이라서 매우 지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쉽게 부여로 진격한 것을 보면, 당시의 백제의 국력은 매우 쇠퇴했고, 군사의 사기 또한 매우 저하됐던 것 같다.

   나는 낙화암에서 잠시 백마강을 바라본다. 멀리 당나라군의 진격해오는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백사장에서 배를 타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잠시 뒤돌아본다. 신라군이 진격하는 함성이 들려온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더니, ?기는 삼천궁녀들이 통곡하며 몰려온다. 이 낙화암을 향해서…….

                                                                                                        (07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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