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및 유적답사

환관, 내시 전균 묘(중랑구 신내동 능말 박수고개)

윤여설 2007. 12. 24. 17:23

 

성 명】 전균(田畇)
【생몰년】 1409(태종 9)∼1470(성종 1)
【본 관】 담양(潭陽) 전(田)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내시)

   1409(태종 9)∼1470(성종 1). 본관은 담양(潭陽)으로 강화(江華) 출신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환관)이다.
내시부(內侍府)의 관직에 초임된 뒤 승진을 거듭하여 동첨내시부사(同僉內侍府事), 동판내시부사(同判內侍府事), 동지내시부사(同知內侍府事)를 지냈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으로 강천군(江川君)에 봉해지고 1455년 세조의 왕위계승에 협력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세조 4년(1458)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에 승진되고 1466년 하음군(河陰君)에 개봉(改封)되었으며, 1468년 품계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환관(宦官)으로서는 최초로 공신이 되고 1품(品)에 올랐다.      

 

                     

                                                  (내시 하음군 전균 묘는, 부부 합장묘이다)

 

절대 권력 소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판내시부사 전균, 내시 최초로 군에 봉해져

조선시대 내시들은 정치에 진출하는 것이 국법으로 금지됐다. 고려시대 환관들이 국사를 좌지우지 했던 몇몇 사례에 대한 반성의 의미와 함께 왕도 정치, 즉 군주와 신료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사를 돌봐야한다는 성리학에 따라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내시를 의도적으로 정치에서 배제했던 이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왕의 권력을 등에 엎고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 내시들이 존재했다. 연산군 시절의 김자원으로 대표되는 권력형 내시 중에서 단연코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치겸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전균이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3권, 1년( 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2월 16일 신축 3번째기사를 보면 전균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감찰(監察) 이인문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분대로서 군자 정선감에 있는데, 환관 전균이 말을 달려 신이 앉아 있는 곳으로 들어왔으나 수감하는 군사가 이를 금하여 저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은 공수(손을 모으고)하고 일어나 서는데, 전균은 마상에 그대로 앉아서 내려다보며 조금도 예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청컨대 피혐하게 하소서’하니, 전지하기를 ‘피혐하지 말라. 내가 마땅히 전균을 책하겠다’하였다. 이때에 환관들이 조정을 업신여겨 욕을 보임이 다분히 이와 같았다”

이에 따르면 전균은 조정대신 앞에서도 예를 대하기는 커녕 신료들이 내시 전균을 피혐하는데 왕에게 허락까지 받아야 했을 정도다. 여러 신료들을 떨게 하고 그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게 만드는 조치겸과 흡사하다.

이런 전균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세종 때다. 하지만 전균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 왕실의 중요인물로 떠오른 것은 단종 시절이다.

당시 전균과 함께 이름을 날린 내시는 엄자치다. 드라마 ‘왕과 나’에선 엄자치와 조치겸이 단종복위운동을 두고 반대입장에 서다가 결국 엄자치는 조치겸에 의해 제거되는 것으로 표현했다.

당시 엄자치와 전균의 관계도 비슷했다. 계유정난을 지지했던 엄자치와 전균이지만 이후의 길을 서로 달랐다. 계유정난 후 공신에까지 봉해졌던 엄자치와 전균은 단종 복위에 대해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엄자치는 사육신과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지만 전균은 단종복위 지지파를 제거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좌익공신에까지 이름을 올리며 세조의 신임을 듬뿍 받았다. 특히 전균은 강천군으로 봉해졌다. 조선 역사상 내시가 군으로 봉해진 경우는 전균이 최초다.

 

         輸忠協贊靖難佐翼功臣  崇祿大夫  河陰君 諡襄敬公  田畇之墓 <수중협찬정난좌익공신  숭록대부  하음군 시양경공  전균지묘>     

                   

                                                                                                            * (묘비문을 누가?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이 역력하다.)


계유정난 직후 단종은 전균에게 “공이 있으면 상을 주는 것은 고금의 통한 의리다. 너의 총명과 재간은 내신으로서 이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생각 밖에 지친 이용이 몰래 간흉과 결탁해 장차 불궤를 도모하려 하여 사태가 심히 절박했다. 이때에 숙부 수양 대군이 한두 호걸의 선비와 더불어 충의를 분발하여 계책을 결정하고 먼저 주모자를 벤 다음 달려와 내게 고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엄하게 하여 숙위하니 안팎이 흉흉하여 단서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네가 조용히 숙부의 충의의 거사를 내게 고하고 과인의 몸을 조호하며 드나들어 전하기를 성심으로 하여 큰 난을 평정하였으니, 너의 공이 얕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아아! 너는 나의 지극한 심회를 공손히 받들고 더욱 충정(忠貞)을 토탑게 하여 시종을 아름답게 하라.”(단종 13권, 3년( 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1월 24일 경오 14번째기사)라고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이처럼 전균은 계유정난과 이후 세조의 왕위 찬탈에서 적지 않은 활동을 벌였다.
  이런 전균의 직위는 급상승해 가정대부 판내시부사에 이른다. ‘왕과 나’의 조치겸의 신분과 같다. 이후 세조는 전균에게 많은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과 나’에서 희대의 권력자 한명회와 정치적으로 결탁한 조치겸과 전균의 흡사한 점은 없을까.

   (전균의 부인 묘비)                   貞夫人 方氏 之墓    孝子 僉知 田九卜立(정부인 방씨 지묘   효자 첨지  전구복립)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와 예종이 전균을 통해 한명회에게 왕명 혹은 하사품을 내린 사례가 몇몇 눈에 띈다. 세조6권 3년 2월22일(병진) 2번째 기사도 이를 전한다.

“도승지 한명회에게 명하여 건원릉 ·헌릉 ·영릉을 순심하도록 했는데, 환관 전균을 보내어 선온을 가지고 가서 보제원에서 전송하게 했다”

이외에도 전균과 한명회가 만났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적지않게 나타나있다. 아마도 드라마 속 한명회와 조치겸의 정치 교류는 이와 같은 기록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 한명회와 교류하고 세자빈 간택까지 전담했던 전균 ‘시호까지 받을 뻔’

전균의 권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당시 조선의 상국이던 명나라 사신을 전균이 접대했다는 두차례에 걸친 기록이다. 보통 타국의 사신이 당도했을 경우 그 나라의 위치에 맞는 관리를 보내 맞이하거나 환송케 한다. 당시 국제 정세에서 최고 자리를 위치하던 명나라의 사신은 조선의 대신이나 그에 걸맞는 인물이 내보내지게 된다. 이런 명나라의 사신을 전균이 전송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7권 정유 2번째 기사에는 “명나라 사신이 선위사인 도승지 한명회에게 작별하면서 떠나니 임금이 판내시부사 전균에게 명해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홍제원에서 전송하게 하고...”라고 적고 있다.

더욱 놀랄만한 기록도 있다. ‘왕과 나’ 조치겸은 왕실 결혼에 밀접하게 관여된 것으로 그려진다. 왕실은 성종의 결혼을 조치겸에게 맡기거나 그 의사를 중요시하게 여긴다. 이와 비슷하게 전균도 왕실 혼사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세조실록에는 “임금이 효령 대군 이보·판내시부사 전균·도승지 윤자운 등에게 명해 사제에 돌아다니면서 처녀를 간택하도록 했으니 왕세자빈을 삼으려고 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치겸과 같이 정균도 왕실혼인에 크게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전균에 관한 조선왕조실록 속 109건의 기록에는 왕이 전균에게 왕실이나 나라에 관련된 크고 작은 행사를 전담하게 했거나 왕명의 출납에 관여하도록 했다고 남겨져 있다.

전균이 당시 조선조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내시의 졸(사망)을 조선왕조실록에 남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하음군 전균이 졸하니, 철조하고 조제와 예장을 예와 같이 하였다. 전균은 어렸을 때에 내시부에 붙이어 여러 번 옳기어 동첨내시부사에 이르고, 정묘년에 통정 대부에 승진해 동판내시부사가 되고,임신년에 가선 대부에 승진하여 동지내시부사가 되고, 계유년에 가정 대부에 승진하였는데, 이 해에 세조가 정난하자 수충 협찬 정난 공신의 호를 내려 주고 강천군에 봉하였다. 을해년에 세조가 즉위하여 또 좌익 공신의 호를 주었고 무인년에 자헌 대부에 승진하여 판내시부사가 되고....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62세였다. 환관으로 공신이 되고 작위가 1품에 이른 것은 전균으로부터 비롯됐다. 형의 아들 전구복으로 후사를 삼았다”고 그의 죽음을 조선왕조실록은 적고 있다.

당시 성종은 전균에게 파격적으로 양경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사헌부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뜻을 이루진 못했다.

김형우
cox109@newsen.com (본문은 newsen에서 옮겨 왔음)

 

 


                       (묘는 후손들에 의해서 잘 관리가 되고 있었다. 형의 아들 전구복을 양자로 삼은 것으로 전한다.) 

 

 환관 전균은

-판내시부사 전균은 엄자치와 함께 계유정난에 관여해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이후 세조의 편에 서며 엄자치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전균은 이후 세조의 신임을 얻으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졌다. 신료들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해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는 물론 중요한 왕명 출납도 전담했으며 세자빈 간택 역시 전담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과시했다. 내시로서는 조선조 최초로 군에 봉해졌으며 죽은 후 시호까지 받을 뻔 했다. 드라마 ‘왕과 나’속 캐릭터 조치겸의 롤모델로 지목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묘 앞의 좌 우에 두개의 문인석이  있는데 그 규모가 대군의 묘에서나 볼 법한 크기이다) 

 

   *이어 성삼문은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에게 과도한 직위를 하사한 것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제기했다.

엄자치와 전균은  환관이었지만,  수양대군의 거사에  필요한 궁중의 내밀한 정보를 제공해 온 공로로 공신에 임명되고  각기 영성군(靈城君)과 강천군(江川君)에 봉해졌는데,  이것이 나라의 관례에 어긋난다고  탄핵을 제기했던 것이다. (단종 실록에서)                   

                                      *환관 전균의 묘 답사(2007년 12월 24일)

 

 

 

 

                                                                             나의 홈페이지

                                                     클릭http://poet.or.kr/y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