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및 문학행사

문학성에로의 회귀

윤여설 2007. 9. 28. 14:06

 

 


 

 

 

문학성에로의 회귀 


                                                          -  오세영 시인(서울대 교수, 한국시협 회장)

 

 

 



Ⅰ. 머릿말 


최근 들어 우리 시단은 시의 서정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전에는 아예 기피되다시피 하던 '서정시'라는 용어가 떳떳이 사용되고 있고 또 수년 전만 해도 '서정시'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룹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공공연히 서정시의 창작을 선언하고 있으니 그간의 사정을 알 만하다. 가령 민중시 그룹의 김지하, 고은, 신경림, 모더니즘 그룹의 황지우, 이성복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비평계에서는 전에 없이 서정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듯하며 문예지의 편집에서도 서정시를 특집으로 꾸미는 경우도 종종 있게 되었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변화이다. 그리하여 지난 두 세대 동안 공적 논의에서 배제되고 묵살당해 왔던 서정시의 창작은 이제 무대의 전면에서 조명을 받을 시기에 이르른 것 같다. 이는 그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왜곡당해 온 우리시의 발전에 바람직한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지난 두 세대 동안 우리시단에 서정시의 창작이 소홀했거나 그 문학성이 미미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참다운 문학의 공개시장에서 그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항상 소외되어 왔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이렇듯 암시장에서 소외된 서정시의 창작이 최근들어 공개시장에서 제 값을 받게된 것은 90년 한 해 동안 우리 시단이 거둔 성과라면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외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변화이다. 민선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만큼 운동으로서의 문학의 기능은 상대적으로 악화될 수밖에 없고 또 민중운동의 결과 서구 문화에 대한 시각이 상당히 교정됨으로써 자신의 것, 전통적인 것을 찾으려는 문화적 자각이 널리 확산된 것을 들 수 있다. 내적으로는 그간 수단으로서의 문학(민중문학), 내지 규범파괴 문학(모더니즘 문학)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시가 문학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시는 당분간 '서정시'라는 어머니의 모유를 먹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90년 우리 시단은 크게 릴리시즘을 지향하는 것이 그 주조를 이루었고 다음으로 민중운동을 지향하는 경향과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경향으로 삼분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Ⅱ.릴리시즘 지향 


릴리시즘을 지향한 시들로서는 이수익의 <석류>(현대시학 3), 이건청의 <하이에나>(현대시학 1), 임영조의 <환절기>(한국문학 3), 조정권의 <산정묘지>(현대시학 2), 송수권의 <저승꽃>(한국문학 1), 이준관의 <부흥이 우는 밤>(현대문학11), 고영조의 <두엄>(현대문학 9) 등이 눈길을 끌었다. 


合宮의 

뜨거운 열락을 

터뜨리는, 


다물지 못할 입- 


속으로 아프게 물고 있는 

克己의 

푸른 치아들 

(이수익, 석류)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들이 돋보이는 시이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통해 사물의 즉물적인 의미가 단단한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익은 석류가 붉은 껍질을 깨뜨리고 하얀 알맹이들을 내비칠 때 시인은 그것을 합궁의 절정에서 쏟아내는 남녀의 合歡音으로 받아 들인다. 시각적인 것을 청각적인 것으로 환치하는 이 시인의 이미지 형상력이 남다르다. 그러나 이시는 단순히 언어의 감각적인 묘사의 수준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름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연의 '극기의/푸른 치아들'이라는 시행이 그것인데 시인은 무르익은 한알의 석류를 통해서 '삶을 내밀하게 다지는 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이에나를 기르는 사막이 하나 있다. 

늦은밤, 넥타이도 풀어헤친 사막이 

웅크린 사막이, 

돌아오고 있다. 

마른 뿌리로 버티고 선 사막이 

우우, 우우, 우는 짐승을 한 마리 혹은 

두 마리씩 데리고 

돌아들 오고 있다. 

이제 그만 쓰러지고 싶은 사막이 

저무는 달도 하나 띄우고 

하이에나를 숨긴 채 돌아오고 있다. 

밤마다 같은 길을 걸어 돌아오고 있다. 

(이건청, 하이에나) 


<하이에나> 연작시 중에서<쓰러지고 싶은 사막이>의 전문이다. 이 시는 문명 비판적인 시각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더니즘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가 독자에게 호소하는 방식은 실험적이거나 파괴적이라기 보다는 전통적이며 규범적이다. 기본적으로 이시의 밑바탕을 깔고 있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들, 즉 슬픔, 허무, 외로움 등이며 이들 감정은 분열되고 해체되어 있기보다는 통합되어 있다. 시인은 대도시의 삶을 사막의 하이에나로 비유하여 산업사회의 병든 인간관계를 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밖에는 지금 

건조한 바람이 불고 

젖은 빨래가 소문 없이 말랐다, 

생나무가 마르고 산이 마르고 

도시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사람들은 늘 갈증이 심해 

내뱉는 말끝마다 먼지가 났다, 

가슴이 마르니까 눈만 커진 채 

안부를 물어도 딴전이나 부리며 

저마다 귀를 빨리 닫았다. 


저 멀리 좌정한 산이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하자 

온 마을엔 별의별 풍문이 나돌고 

긴장한 나무들은 손을 들고 떨었다. 


세상은 이제 

누군가 불만 댕기면 

활활 타버릴 인화성 물질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날은 

자나 깨나 불조심 

오나 가나 입조심 

어쨌거나 요즘은 환절기니까. 

(임영조, 환절기) 


시대상황을 환절기로 비유한 작품이다. 이 시 역시 사고가 연속되어 있고 형상화의 방법이 규범적이며 진술이 감성적이라는 점에서 정통적 서정시를 지향하는 작품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 중에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 시인이 아주 적절하게 구사한 은유이다. 정통적인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를 통어하는 핵심적인 은유의 제시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그 핵심적인 은유는 '환절기'와 '독감'이다. 시인은 우리 시대의 사회적인 상황을 환절기로 인식하고 있으며 상황에서 기인하는 시대적 아픔을 독감으로 비유시키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다분히 정치 혹은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시는 결코 메시지 전달적인 정치시는 아니다. 오히려 인식론적 태도에서 사물을 보고 또 거기서 하나의 은유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서정시적 요소가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보아도 산정위에는 바람자고 

오랜 세월 지고한 발길 머물은 

구름의 묘비명. 

거기 새겨 있는 가사 없는 노래를 

내 어찌 전할 수 있으리 

해마다 봄은 오고 

봄은 와서 산정의 새들에게 고산 식물의 풀씨를 전하고 

골짜기와 계곡 눈과 얼음 속에서 삼동겨울을 홀로 견딘 송이 향기를 내려 보내주건만.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가. 

石水사이 다시 흘러내리는 냇물과 

폭포들이 전해주던 노래하는 법, 

(조정권,산정묘지) 


연작으로 쓰여지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서 그 일부를 인용해 본 것이다. 종전의 그답지않게 사변寒적이 된 것이 흠이긴 하나 사상성의 탐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닌가 한다. 언뜻 보기엔 <寒山詩>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조정권은 이들 보다 존재론적인 측면으로 심화시키고 있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이 시에는 동양적 허무의식과 달관의 인생관이 주조로 나타나 있다.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면서 일상성을 초월하려는 시인의 삶의 태도가 아름다운 감성의 뒷받침으로 잘 형상화 된 작품이라 생각된다. 


어느 노옹의 벽에서였던가 

수묵색으로 떠오른 수락산 비탈길을 

고깔 쓴 늙은 비구니 하나가 오르고 있었다. 

수락산 아래 적막한 들길에도 

蘭香이 그윽하였다. 뒷짐지고 올라가는 

그 여승의 발걸음에도 무릿돌이 굴러내리며 

맑은 향 가득하니 퍼졌다. 

사람이 오래 살면 몸에서도 절인 향기가 저렇듯 

온 들판 하나를 다 적시는 것일까. 

(송수권, 저승꽃) 


앞의 조정권의 시와 일면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르다. 조정권의 시는 보다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데 비해 송수권의 시에는 인간의 생활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삶이라는 점에서 세속적인 삶과는 구별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송수권은 향토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시는 인간의 본원적 감정이라 할 허무의식을 민족의 원형적 삶의 양식인 향토적 생활정서로 극복코자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의 이미지 전개가 맑고 투명하다. 


돌이끼푸른 성터를 끼고 돌아 

호랑거미 거미줄 타고 내려오고 

달빛에 주둥이 흐늘히 젖어 

부흥이 우는 밤이 있었다 


개들이 짖어대면 별이 떨어졌다. 

개의 귀에 대고 무슨 소리 들려올까, 

들어보면 나의 귓속엔 푸른 별들이 가득 찼다. 

아랫녘 마을의 불빛은 도토리 열매처럼 열려, 

깨물면 떫은 맛이 들었다. 

기다림은. 


나는 우물 속을 들여다 보았다. 

우물은 늙은 노새처럼 슬픈 눈을 가졌다. 

기다림에 지친 

성터의 돌들을 주워 

손에 쥐면 그대로 소리 없이 바스라져버렸다. 


꽃 속에 숨은 두근거리는 천둥의 심장. 

죄지은 듯 그 꽃잎 따먹고 

나는 그리움을 지녔다. 

서러운 해오라기의 긴 모가지를 

(이준관,부흥이 우는 밤에) 


이 시의 각 연에서 제시된 의미들의 이원적 대립은 시적 의미를 형성해내는데 있어 적절한 미학적 긴장을 유발시킨다. '기다림', 혹은 '그리움'이라는 같은 주제의식을 표상시킴에 있어서도 서로 상반하는 상황의 제시를 통해 그것을 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이와 같은 대립, 즉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의 대립이 단적으로 제시된 부분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제2연인데 앞선 진술의 '마음의 적막한 불빛'으로 표상된 화자의 정적인 기다림은 뒤에 진술의 '돌연히 밤의 적막을 깨뜨리는 개짖음'에 의해서 동적인 행동양식으로 전환된다. 이 시는 또한 다양한 감각적인 이미지, 나아가서 공감각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쓰여졌다. 

가령 '아랫녘 마을의 불빛은 도토리 열매처럼 열려/깨물면 떫은 맛이 들었다.'와 같은 진술은 시각, 촉각, 미각의 이미지들이 교묘하게 병렬되어 있는 예이다. 

이와 같은 이 시인의 미학적 책략이 이 시를 아름답게 형상화 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절망이 

한줄기 빛으로 되기까지는 

더 큰 절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풀들은 베어져 

높다란 두엄더미로 쌓여 있을 때 

알 것이다. 

발가락 오그린 영혼들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려서 

명치를 짚는 

긴 악몽으로 떠돌 때 

몇차례 분뇨를 퍼붓고 

비에 젖어 

마침내 완전한 어둠 속에 던져지면 

늦은 가을 

매달리지 않고 떨어지는 

과일처럼 

돌연히 절망하던 잎들도 

부드러운 한줌의 퇴비로 

스스로 썩어갈 것이다. 

깊은 수렁에서 

떨어진 밀알을 싹틔우는 

저 아름다운 

죽음 

(고영조, 두엄) 


고영조의 시에는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탐구가 매우 깊이 있게 시도되고 있다. 시인은 '두엄'의 일생을 통해 인간 삶의 존재론적 진실을 발견하다. 

그것은 '두엄'이 썩어야만 진정한 거름으로서 식물의 자양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에 있는 말씀 그대로 누구나 영원한 삶 혹은 완성된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기 발견이다. 



Ⅲ.모더니즘 지향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시인으로 필자의 주목을 끈 작품으로는 이승훈의 <그는 선생이다.>(현대시학5), 민용태의 <글짜들의 행진>(문학정신 3), 하재봉의 <비디오/T.V는 폭발한다.>(문학정신 4), 이윤택의 <밥의 사랑>(문학사상 10), 고진하의 <껍질만으로도 눈부시다. 후투티>(문학과 사회, 가을), 유하의<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문학사상 11)등이다. 


그는 선생이다. 

그는 XX에게 

관심이 간다. 

그는 간다 

XX에게 간다. 

그는 시도 쓴다. 

그가 시를 쓰는건 

XX에게 가기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승훈, 그는 선생이다.) 


이승훈은 소외되고 단절된 후기 산업 사회의 인간 관계를 재정립 시키려고 노력하는 시인이다. 가령 이시에서 화자는 시종여일 'XX에게로 간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결국 타인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하면, 타인과의 연속을 소망하는 피력이라 보여진다. 

그런 까닭에 그가 쓰는 시는 결국 XX에게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단절된 인간의 관계를 연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승훈에 의하면 무엇보다 일상적인 자아, 혹은 속된 자아를 해체시키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의 시가 보편적으로 해체된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꿈속에 쏟아진 글짜들은 

모두 얼굴을 가졌다. 

목소리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소리가 

영혼의 소리라고) 영혼의 소리는 

따옴표나 괄호속에 

있다. 꿈속에 

나타나는 글짜들은 

얼굴을 가졌다. 

일상의 얼굴을 하고 

어머니가 돌아오고 

F wkrk 

이 글짜들은 컴퓨터가 쏟아낸 

토사물. 

(민용태, 글짜들의 행진) 


말은 가변적이지만 문자로 찍힌 말 즉, 글자들은 고정불변한 하나의 사물이 된다. 특별히 그것이 컴퓨터가 찍어낸 말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미 컴퓨터가 찍어낸 말은 기계화 된 말이며 영혼이 죽은 로봇트의 말일 뿐이다. 시인은 우리 시대의 삶이 이렇듯 기계화되고 물화되어서 진정한 삶의 이상이 실현 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컴퓨터가 찍어낸 글자의 비유를 통해 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가 찍어낸 글자, 그것은 곧 물화된 현대인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 


나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 아닌 것이 

나의 것인 


T.V.는 폭발한다. 


그는 품위가 있다. 거칠게 굴다가는 

유혈 사태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T.V.는 폭발한다. 


내 머리엔 끔찍한 생각뿐이다. 

별들이 예고 없이 폭발하여 

돌덩이로 떨어지듯 

천안문 브란덴부르크 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우주의 거대한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 


(하재봉, 비디오/T.V.는 폭발한다) 


하재봉이 보는 우리 상황 역시 기계가 지배하는 삶이다. 뒷부분에서 직접 언급되고 있지만 산업 사회에 사는 오늘의 인간들은 T.V.가 '우리들의 뇌속으로 안테나를 연결하여' (6연) 그들 스스로가 우리들의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고 스승이 되는(7연) 삶을 영위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라지고 기계(텔레비전)가 인간을 대신하는 삶이다. 여기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나 믿음 같은 인간적 가치가 뿌리를 내릴 수 없다.그러므로 우리들의 피지컬한 자연이 태양의 흑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듯, 오늘의 우리 사회는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기계의 인공지능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라고 시인은 믿는다.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마천루의 

숲 속, 아크릴에 새겨진 

"조류연구소"란 입간판 아래 

검은 점이 또렷히 빛나는 눈부신 

황금빛 관을 뽐내며 

쏘는 듯 노려보는 후투티의 눈빛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다.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섬짓한 인광같은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고진하, 껍질만으로도 눈부시다. 후투티) 


고진하 역시 후기 산업사회 인간의 소외된 삶을 폭로 비판하고 있다. 민용태가 그것을 컴퓨터에 잘못 찍혀나온 글자로 비유하고 하재봉이 텔레비젼으로 비유한 것과 달리 고진하는 박제된 새로 비유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시대의 물화된 인간의 삶은 박제된 새와 같은 것이다. 삶이 그 존재성을 상실하고 한낱 도구성으로 전락해버린 이시대의 아픔은 그의 시의 주요한 테마가 된다. 그러나 이 박제의 비유에서 한가지 더 지적할 것은 이 박제된 새가 마치 살아있는 새인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있으며 우리 시대의 모든 삶 역시 자신의 실체를 오인 혹은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허위가 진실을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또 한가지 모순을 고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촌철살인 격으로 

다가오는 종아리 하나 있다. 

압구정동 배나무밭을 질주하던 원두막지기의 딸, 중하교 운동회때 트로피를 휩쓸던 그애 오천원짜리 과외공부하다 책상밑으로 내다리를 쿡쿡 찌르던, 오천원이 없어 결국 한달만에 쫓겨난 그애 

포크레인을 괴물이라 부르던 그애 

한강의 물새알을 내게 던지고 키들키들 

지금의 현대백화점 쪽으로 종다리처럼 사라지던, 

그후로 영영 붙잡지 못했던 단발머리 그 소녀의 뒷모습 

그 눈부시던 구리빛 종아리 

(유하,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이 시에는 두종류의 여자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일본인 상대의 기생 다찌로 대변되는 관능적 퇴폐적인 여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인용된 부분의 '단발머리 그 소녀'이다. 전자는 교환가치를 대변하는 삶을 상징하고 후자는 사용가치를 대변하는 삶을 상징하는 여자들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금전과 물질이 최고의 덕목이 된 오늘의 삶을 정신이 상실된 육체만의 삶으로 인식한다. 압구정동의 퇴폐적인 여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에 비해서 유년시절의 추억속에 남아있는 소녀 즉 '단발머리 그 소녀'는 이와 같은 정신의 위기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순결한 여자라 할 수 있다. 

Ⅳ. 사회, 정치적인 시 

사회 혹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시들 가운데서 필자가 주목해 본 작품들은 이동순의 <쇠뜸부기>(한국문학 3,4), 최두석의 <망초꽃밭>(문학사상 8), 고정희의 <사임당이 허난설헌에게>(한국문학 7,8), 이중현의 <모란공원>(문학정신 2), 고형렬의 <서울을>(문학정신 2), 곽재구의 <화개에서>(문학사상 2) 등이다. 


철이 더딘 

이곳 사할린 땅 


저 들판에 

쇠뜸부기란 놈이 뜸뜸 우는 날이면 

나는 내 떠나온 어릴적 

조선 땅이 그리워 죽소 


날개라도 달린 저 놈은 

고려나라 먼 하늘까지 휘적휘적 날아가서 

논두렁 붓도랑을 마구 밟고 다니지만 

이 몸은 가고 싶어도 여권이 없어서 못가오 

여권이 있다 한들 

차비가 없어 못가오 


그래서 먼저 죽은 이들은 

무덤 속에서까지 쇠뜸부기 소리를 듣소 

(이동순, 쇠뜸부기) 


역사적 현실로서 우리 민족이 감내해야 했던 이산 가족의 슬픔과 한이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여기에는 물론 남북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이념의 문제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그는 시적 진술과 산문적 진술의 차이를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것을 은유적으로 처리하는 미학적 책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쇠기러기가 바로 그것이다. 쇠기러기는 인위적인 장벽의 구애를 받지 않고 푸른 하늘을 마음대로 비상할 수 있는 존재이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이산가족을 쇠기러기에 대조시킴을 통해서 시인은 상황을 한층 더 극적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고향길 모퉁이 산비알밭 

가슴팍 헤치고 부는 바람에 

하얗게 흔들리는 꽃무리 

고가마댁 호미들고 어디로 갔나 

고가메 양반 두엄지고 어디로 갔나 

지금 감자알 굵어지고 

초록 완두콩 여물어 갈 무렵 

밭둑까지 불러 흠뻑 흐드러지나니 

(최두석, 망초꽃ꑹ) 


이 시는 이제 페허가 되어 망초 꽃밭이 되어버린 한농가의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황폐한 농촌의 실정을 폭로한 작품이다. 농가가 폐허가 되어 망초꽃들이 우거지게 된 사연을 무엇일까. 그것은 이 시의 결말에서 시인이 '기병대에 쫓겨난 인디언 옥수수밭 /망초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인용한 부분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나지만 전체적으로 이농이 그 원인이라는 것은 충분히 암시되고 있다. '고가마댁 호미들고 간'곳, '고가메 양반 두엄지고 간'곳은 다름 아닌 서울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당면한 우리 농촌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시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경번당 허자매 

그대 나보다 뒷세상에 태어났지만 

기실 명문가에 적을 둔 정실 규방 

신세 한가지로 살아왔으니 

그 허와 실 뼛속에 사무치리라 싶어 

꾸밈없는 속이야기 서둘러 봉하외다. 

오늘에사 나는 

조선의 정실 부인들이 모여 해마다 

신사임당이라는 상을 주고 받으며 

원삼 족두리 상을 벌리고 

신사임당 사당까지 지어 

여자 예절 교육을 본으로 삼고 있다 하는 

비보를 접했기 때문이외다 

아니 이는 분명 흉보중에 흉보요 

재앙중에 재앙이라 아니 할 수 없사외다. 

(고정희, 사임당이 허난설헌에게) 


3백행의 가까운 장시 중 그 첫부분만을 인용해 본 것이다. 오늘날 사임당을 숭앙하여 사임당상을 제정한 것 자체를 '흉보'라고 매도한 이 첫부분에서 이미 우리는 이 시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시는 사임당이 허난설헌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빌려 우리사회의 여성억압을 풍자적으로 비판하며 동시에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에 있어서 여성의 문제가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가를 제기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여성해방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여성을 피압박 계급으로 인식하고 여기서 출발하여 한국여성의 자기 성찰과 인간적인 삶의 실현을 요구한다.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한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는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안도현, 연애편지) 


젊은 시절의 청순한 이념을 상실하고 세속적인 삶으로 타락해버린 자신의 초상을 편지형식으로 토로한 작품이다. 사랑이란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 가치이다. 그러나 인간은 나이가 들고 오욕과 속기에 물들면서 사랑을 욕정으로 대신하기를 거리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애편지를 이미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생활이 속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인은 연애편지를 쓰지 않은 자신의 현재를 젊은 시절과 대조시키면서 순결한 이념이 상실된 이 시대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고 있다. 


모란 공원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지고 가야할 짐이 너무 무거워 

식은 땀 흐르는 곳 

청산 못한 빚더미 발길 막아 

가을 하늘도 캄캄해지는 모란공원 

노동해방의 머리띠 두르고 

아직도 불타는 전태일 열사 

비명 소리 골골 메아리치는 

박종철, 김경숙― 

(이중현, 모란 공원) 

해석이 필요없을 만큼 직접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 작품이다. 요컨대 시인이 외치고 있는 것은 '전태일 열사', '박종철 열사'가 걸어간 길을 우리도 아무 부끄럼 없이 충실하게 걸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모란 공원' 즉, 이들 '열사'가 묻혀 있는 묘지에 갈 수 없는 것은 아직은 그의 행동 혹은 투쟁이 부끄러운 단계에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Ⅴ. 맺음말 

90년도 우리 시는 전체적으로 분열된 감수성이 점차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더불어서 문학성에 대한 그 나름의 진지한 모색이 전에 없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시는 당분간 릴리시즘에 복귀하여 충분한 문학의 자양을 공급받는 일이 몰두하리라 추측된다. 

 

 

 

  ⊙ 발표문예지 : 한국문화예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