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및 문학행사

무사상시 이야기 (문덕수 시론)

윤여설 2007. 9. 7. 10:36
 
 

무사상시 이야기

                      ― 이상옥의 ‘디카詩’를 중심으로

 

 


                                                                                                                     문덕수 (시인, 예술원 회원)


 


  오해의 진원

이상옥의 ‘디카詩’ 시론은 이제는 뉴스가 아니라 얼마만큼 공감을 얻고 그 보편성을 얼마만큼 확산하느냐 하는데 있다.(이 점은 오남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상옥의 시론에 대한 오해의 근원(‘오해’가 예상 외로 만만치 않다.)은 디카로 촬영한 영상(사진)과 문자시를 합친 것이, 그의 디카詩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데 있다. 이것은 디카詩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이 시론의 중심은, 첫째로 디카(디지털 카메라)가 시쓰기에 있어서 어떠한 기능적 내지 주체적 의미의 환유성을 가지는가, 둘째로 디카시의 대상인 ‘사물’이란 무엇이냐 하는 점에 있다. 여기서는 첫째 문제에만 국한해서 말하겠다.


  구조화된 환경

시쓰기에 도구나 과학기기가 참여한 것은 이상옥 이전부터 있었다. 종이, 만년필은 옛날부터 있었고, 최근의 워드프로세서나 PC 등도 그렇다. 그런데, 종이나 볼펜, 특히 PC 같은 과학기기는 오늘날 단순히 ‘도구’라기보다는 시쓰기의 한 주체로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카메라나 과학기기가 시쓰기의 주체로 격상되어 논의하게 된 중심에는 디카詩의 시론이 있고, 이상옥과 오남구 이후에 비로소 시쓰기의 주체론에 큰 변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육상선수가 1000m 경주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선수 개인만 우수하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개인의 체력도 중요하지만 신발?운동복?경기장 같은 ‘물리적 환경’도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하고, 소속 단체나 코치나 훈련 같은 ‘집단적 환경’도 중요하다. 1000m 경주가 돌밭길이나 가시밭길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정비된 경기장에서 달리게 되므로, 배구?농구?야구 등을 포함한 모든 생활이 이같이 구조화(構造化)된 환경 속에서 행하게 된다.

우리가 마산서 부산으로 가려면 괴나리봇짐을 지고 터벅터벅 걸어서 가지 않고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LA의 친척집을 방문하려면 태평양을 헤엄쳐 가는 것이 아니라 시속 500km 의 비행기를 타야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현대문명으로 모든 부문에서 과학적?물리적으로 구조화된 사회환경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이러한 환경을 벗어나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시쓰기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시쓰기도 구조화된 환경 속에서 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즐겨 ‘빛’을 노래하고, 어둠과 밝음을 노래한다.(‘어둠과 밝음, 바람, 소리’ 등을 準物?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보이지 않는 ‘빛’, 레이저 광선, 우주 저쪽의 은하세계도 보아야 하고, 수평선 너머의 삶의 소리도 들어야 하지만, 시인의 지각 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지금은 시간 의식에 있어서 초 단위보다 더 짧은 찰라 단위,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같은 극초단위도 헤아려 볼 줄 알아야 할, 구조화된 과학시대에 살고 있으며, 자기 능력을 넘어선 저쪽의 세계라고 해서 외면할 수 없다. 과학기기는 시인의 지각 능력의 확장내지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는 승용차의 모든 부품의 기능은 운전자의 감각기관이다. 이제는 극미(極微), 극원(極遠), 극초(極秒)의 환경도 시의 세계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구조화된 환경의 경험을 무시하고 시인은 자기 혼자만을 시쓰기의 주체라고 우길수 있을까.


  디카의 환유성, 기타

첫째, 디카詩에서 말하는 디지털 카메라는 PC, 망원경, 현미경, MRI 등 모든 과학기기를 포괄하고 대표하는 환유(換喩)이며, 동시에 디지털시대의 문화적 특성도 드러낸다. 디카詩는 ‘디지털 카메라’에만 의존하는 시가 아니다. 따라서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과 문자시를 합친 것이 디카詩라는 생각도 변화되어야 한다. ‘디카詩’의 착상 시초에는 디카로 촬영한 것과 문자시를 합친 시라는 흥미와 소박성에서 출발했을지 몰라도, 디카詩를 에워싸고 있는 현대의 문명적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론은 그런 소박성을 소박성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는다.

둘째, ‘시인’(poet)이란 개념수정이 불가피하다. ‘시인’에 대한 종래의 생각은 불가피하게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제2의 창조자(maker)라는 개념, 시대의 입법자나 예언자라는 개념 등은, 단지 현대 문명 속의 언어적 행위자나 개인을 넘어선 복합적 환경 시스템의 대리인 즉 에이젠트(agent)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마 독실한 기독교주의자라면 시인을 신의 에이젠트라고 말할지 모른다. 시인이라고 해서 신성 불가침의 어떤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우월적 존재는 아니다. 이미 사회적 명예도 존경도 붕괴되었다.

셋째, 디지털 카메라, PC 같은 영상기기 등은 보조 보완 수단이 아니라, 그 기능적 가치를 중시하여 시인과 같은 차원의 주체(主?)로 인정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시인이 하는 일과 과학기기가 하는 일들이 기능적으로 구별되지만, 그러나 기기의 ‘잠재적 지성’이나 인식행위를 중시하면 이 두 주체 사이에는 ‘등가적 교환성’(等價的 交換性)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물을 보고 느끼거나 생각한 내용을 PC에 입력하면 그대로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시인 자신이 뇌 세포로 기억하는 것과 같다. 즉 등가적 교환성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과 시인이 육안으로 관찰한 영상이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 같은 시각 활동이라는 점에서 등가적 교환성이 있다.

그리고 특히 기능면의 등가적 교환성은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영향의 수수(授受)관계로 바뀔지 모른다. 디지털 카메라나 과학기기들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사상성(탈관념성), 중립성, 물리성이 시인과 시를 변질시킬지 모른다. 이러한 무사상주의나 중립주의나 물리주의는 디카詩의 대상인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다.


  마무리

시인과 과학기기 사이의 등가적 교환가치는 더욱 심화될 수도 있다. 과학기기는 비유기성(비생명성), 중립성, 무사상성 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이 시인과의 사이에서 등가적으로 수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발달된 인공지능이 저장된 컴퓨터나 로봇을 보면 과학기기와 시인과의 사이의 교환관계는 반드시 비대칭적 일방주의라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디카詩의 대상은 일단 관념이 아닌 ‘사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물도 디카와 마찬가지로 물리성, 중립성, 무사상성 등을 가지는 감각세계이다. 현대시는 오랫동안 비켜서 지나간 이러한 감각세계에의 발견과 지각에서부터 다시 출발하여 관념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감각’(感覺)이란 사물의 개별적 성질(차별성)을 포착하는 능력이다. 사물의 차이, 차별성의 추구가 그 원리다. ‘지각’(知覺)은 감각이 전해 주는 정보를 가지고 이를 뭉뚱그린 이미지로 만들어 대상과 대상을 구별한다. 이러한 감각, 지각이 관념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그리고 시에선 관념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말고, 관념 구성의 모든 활동은 독자에게 일임하는 형태로 씌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무사상주의를 선호한다.

 

 

(문덕수, 무크 <<디카詩 마니아>> 2호 출판기념회 기념강연 2006년 12월 9일 경남문학관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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