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및 문학행사

조선어학회사건(매일신보1945년10월10일 원본기사)

윤여설 2007. 10. 9. 08:17

                                                                    (조선어학회사건 수난 동지회)

 

우리 조선어학회에 계신 여러분들이 3년동안 고초를 겪고 혹은 최후의 희생을 당하게 된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의 진상을 한글날을 기하여 밝히고자 한다.(略)조선어학회사건은 1942년 함흥 日出女高의 여학생간에 사상 사건이 일어난 일이 있는데 그 여학생의 취조에 따라 여학생들이 조선독립에 대한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이 그 전년에 동교의 교원으로 있던 丁泰鎭이라하여 당시 어학회의 사무원으로 있던 정을 검거하고 이어서 조선어학회의 하는 일에 억지의 의심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 함남 洪原경찰서에서는 그 해 10월 1일에 李允宰 韓澄 李克魯 鄭寅承 李重華 金允經 李錫麟 崔鉉培 權昇玉 李熙昇 張志暎 등 11씨를 검거하고 취조하는 중 그 후 다시 일곱사람씩 세차례에 걸쳐 검거하여 모두 32명을 홍원서에서 검거하였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고 붙이고 어학회는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라 하여 죄를 구성시키려 억지로 혹독한 고문을 시작하였다. 유일한 조선어사전까지 빼앗었다가 사전을 편찬하는 목적은 어디 있느냐 또는 조선어사전편찬은 장래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 혹은 일본말로 사용하는 시대에 한글을 연구 보급하는 것은 조선문화의 향상과 민중에 민족의식을 높혀 유사지추에는 조선독립을 꾀하는 것이 아니냐는 제마음대로의 해석아래 이를 억지로 시인시키려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건은 함흥지방법원으로 넘어가 작년 12월 22일부터 금년 1월 8일까지 공판이 계속되었는 바 그 결과 16인이 공판에 회부되어 이윤재, 한징 두분은 옥사를 당하고 鄭烈模, 장지영 두 분은 예심에서 면소되고 나머지 12명에 유죄판결이 내리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는데 유죄로 판결된 분들 가운데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정태진은 체형이었으나 그 중 정태진은 만기가 되어 출옥하고 나머지 네 사람들은 다시금 상고되었다. 또 金良洙, 金度演, 李仁, 李祐植, 이승화, 김법린 6씨는 집행유예가 되고 張鉉植은 무죄가 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네 분만이 남아서 고생을 하다가 8월 17일 조선해방과 함께 광명의 천지로 함흥형무소를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어학회사건이 홍원서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는 동안은 얼마나 고초가 컸던가는 이윤재, 한징 두 선생이 옥창속에서 별세하시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담임형사는 호랑이형사라고까지 이름난 安貞模란 자와 함경남도 경찰부에서 응원온 창씨명 柴田健次(제주도 출생 金某로 그 후 경기도 경찰부로 전근)란 자로 때로는 천정 대들보에 두 팔을 끌어 매어 달어 놓기도 하고 혹은 목총이나 죽검으로 뭇놈의 형사가 보리타작하듯 치기도 하고 개 짐승같이 마루바닥에 엎드려 끓어 놓기도 하고 같이 취조받고 있는 동지까지 서로 맞세워 놓고 죽검으로 마주 때리라고 강박도 하고 혹은 유도로 볏단을 던지듯 들러 메꽂기도 하고 몽둥이로 뭇놈의 형사가 떡치듯 돌아가며 내치기도 하고 혹은 콧구멍에 물주전자를 대고 붓기도 하여 날이면 날마다 야만적인 고문이 우리 선생들의 약한 몸위에 그칠때가 없었다. 그때마다 우리 선생들은 한참씩 까무러쳐 버리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홍원서에 있을 때엔 행여나 그 매질에 죽으면 자기네들의 책임이라 하여 강심제도 놓아 주고 또 사식도 허락하였다. 그러다가 함흥형무소로 넘어간 후로는 동지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은 마침내 옥중의 이슬로 쓰러진 것이었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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