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개에 얽힌 이야기들
- 테마분류 ㅣ 역사
- 등 록 일 ㅣ 2011-06-13
- 관련자료 ㅣ 4개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 진도 아리랑 中
고개는 산이나 언덕을 넘어 다니도록 길이 나 있는 비탈진 곳입니다. 그렇다면 문경새재는 어떤 고개이기에 굽이굽이 눈물이 날까요? 새재를 한자로 표현하면 조령(鳥嶺)으로 이는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험한 고갯길에 과거보러가는 선비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걷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고단하고, 험하고, 아파도 굽이굽이 눈물을 흘리며 넘는 고개. 오늘은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http://yoksa.aks.ac.kr)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의 고개와 고개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미아리 고개 : ‘되너미 고개’부터 ‘단장의 미아리 고개’까지
미아리 고개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로에 있는 고개입니다. 한때 미아리 고개는 ‘되너미 고개’로 불렸습니다. 이는 ‘되놈이 넘은 고개’라는 뜻으로 1936년 병자호란 때 쳐들어 온 청나라 군대를 ‘되놈(만주 지방에 살던 여진족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습니다. ‘되너미 고개’를 한자로 돈암현(敦岩峴)이라 했는데, 이후 돈암동의 유래가 됐다고 합니다.
미아리 고개 너머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상여가 이 고개를 넘어가는 동안 곡성이 끊이지 않아 ‘한 많은 미아리 고개’로 불렸습니다. 미아(彌阿)라는 지명은 ‘저승으로 넘어가면 다시는 이승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불교 용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또 6 ·25전쟁 때에는 수많은 애국지사와 저명인사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이 고개를 넘어 북한으로 납치되어 갔다고 합니다. 이 고개에 얽힌 사연을 내용으로 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단장(斷腸)은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을 말합니다.
- 문화, 예술에 녹아든 미아리 고개 이야기 : 악극 ‘단장의 미아리 고개’
1950년 9월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은 퇴각하면서 양민들을 포로로 잡아갑니다. 그때 미아리 고개에서 잡혀가던 남편 양백천을 피눈물 흘리며 붙잡던 돌산댁은 결국 인민군의 위협을 못이겨 남편과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이후 네 자식의 어머니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오는 돌산댁은 온갖 어려움을 겪은 후 세월이 흘러 한 방송프로그램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나갔다가 남편과 극적으로 만난다는 내용입니다.
>> 한계령 : 망국의 설움을 안은 마의태자가 건넌 고개
한계령은 강원도 인제군의 북면,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입니다. 오랜 옛날, 한계령에 눈물을 뿌리며 지나간 사람이 있습니다. 935년 신라의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회의를 열고 항복할 것을 의논합니다. 경순와의 아들인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왕은 결국 고려에 항복하기로 합니다. 태자는 통곡하며 경주를 떠나 문경새재를 지나 한계령을 넘어 금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 바위 굴에서 지내며 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 먹고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한계령이 있는 강원도 인제지역은 마의태자가 망국의 설움을 잊기 위해 금강산으로 가기위한 중간지역입니다. 이곳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과 지명(김부대왕각, 옥새바위, 한계사 등)이 1000년이란 시간을 넘어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 한계령 이야기 : 단편소설 <한계령> 양귀자
소설가인 주인공 ‘나’ 에게 어릴 적 친구인 은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옵니다. 밤무대 가수가 된 그녀는 주인공에게 한 번 찾아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은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변해버린 고향의 아름다운 과거를 그녀를 통해서만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큰오빠의 삶의 무게에 대해 생각합니다. 큰오빠는 지금은 무기력한 사람이 됐지만, 과거에 나를 비롯한 여섯 동생을 혼자 힘으로 길러낸 사람입니다. 나는 은자가 일하는 새부천나이트클럽에서 ‘한계령’에라는 노래를 듣고는 큰 오빠의 삶을 절실히 이해하고 연민을 느낀다는 내용입니다.
양귀자의 대표 단편으로 뽑기도 하는 소설 <한계령>에 나오는 ‘한계령’이라는 노래는 아름다운 노랫말로도 유명한 노래입니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로 ‘한계령’이란 노래는 끝납니다. 이 노래는 정덕수 시인의 ‘한계령에서’라는 시를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씨가 노래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 한계령 출처 :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당고개 : ‘미륵당’이 있던 ‘덕릉고개’
당고개는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에 있는 고개로 지하철 4호선의 ‘당고개역’이 지나는 곳입니다. 한자명으로 당현(堂峴)이라고 하며, 미륵당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조선 제21대 영조 임금 재위 때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가 정치적 모략으로 1762년 뒤주 속에 갇혀 죽은 후 생전에 사도세자를 모시던 궁녀 이씨는 그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다 자리에 눕습니다. 이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의원 소속 봉사(종8품 관직) 한 사람이 이씨가 죽었다고 진단한 후 궁 밖으로 내보내 노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극진히 보살펴 주어 몸이 회복됐습니다. 이씨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봉사의 조카남매를 수양아이 삼아 여생을 보내기로 합니다.
어느 날 늦게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씨를 이 고개 밑에서 한동네 살던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겁탈하려 하자 갑자기 죽은 사도세자가 나타나 구해줬는데 이때 이씨는 정신을 잃습니다. 이튿날 동네사람들과 함께 어머니를 찾던 남매가 당고개에서 기절한 이씨를 발견했을 때 미륵불이 이씨를 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동네사람들은 미륵불이 이씨를 구했다고 여겨 당고개에 미륵당을 세우고 해마다 음력 1월 15일 큰 소나무 아래에서 지역 주민이 모여 마을에 화목과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씨가 키운 수양남매는 효성이 극진해 양주군에서 미륵당 앞에 효자정문을 세워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효자정문은 조선 제26대 고종 때 경복궁 중건 공사를 하면서 헐어가고 터만 남게 됐다고 합니다.
▶ 덕흥대원군묘 출처 : 문화재청 ☞ 바로가기 |
한편 당고개는 일명 덕릉고개(덕릉현, 德陵峴)라고도 하는데 조선 제14대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의 묘소가 있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42기 중에서 찾아 볼 수 없는데요, 여기에는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조는 본래 왕이 될 수 있는 서열이 있지 않았습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 이초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동작동 국립묘지의 주인)의 둘째 아들이며 중종의 7째 아들인 종친이었습니다. 선조(하성군, 河城君)는 이 덕흥군의 3째 아들로 더더욱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명종에게 후사가 없자 종친에 지나지 않았던 하성군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하루는 명종이 종친들을 불러 사람됨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내어 주면서 ‘머리 크기를 보려고 하니 써 보라’고 권합니다.
모두가 익선관을 써 봤는데, 하성군 만은 ‘이 관은 전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관’이라 하면서 끝내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후한 점수를 얻은 하성군은 명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잇게 됩니다. 하성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버지 덕흥군은 이미 세상을 떠나 수락산 자락에 묻혀 있었습니다.
덕흥군은 선조 2년(1569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이후 이 고개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대원군 무덤 쪽에서 넘어 왔다 하면 나무 값을 평소대로 지불하고 덕릉고개로 넘어 왔다 하면 그 값을 후하게 쳐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후로는 모든 사람이 이 고개를 ‘덕릉’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또 고개를 넘을 때 산짐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들고 넘었으며 그 돌을 쌓아둔 곳이 성황당으로 변해 당고개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한남동과 청계천주변이 개발되면서 그곳의 이주민들이 여기에 정착하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고개는 좌우로 깎여져서 지금은 예전보다 낮아진 상태입니다.
>> 문경새재 (조령) : 조선왕조 500년 으뜸 고갯길
문경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고개로 이 일대 주변이 명승 제32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개척한 관도로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며 정상 높이가 642m인 고개입니다.
문경새재는 주흘산과 조령산이 이루는 험준한 지형으로 조선의 국방상 중요한 요새입니다.
▶ 조령 출처 : 문화재청 ☞ 바로가기 |
문경새재에는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은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이를 두고 역사가들은 신립 장군이 미처 닿기 전에 왜군이 이미 문경새재를 넘었다고도 하고, 신립 장군의 주력부대가 기마병인 탓에 일부러 산악전을 피했다고도 합니다.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문경새재에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주흘산 행궁에 머물던 고려 공민왕의 보물들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요귀가 되어 나타나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사는 처녀를 요귀로부터 구해 준 신립 장군이 처녀의 사랑을 거절하자 처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신립 장군이 전투에서 패배한 건 사랑을 거부당한 처녀 귀신의 복수극 때문이라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힘겨움을 이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죠, 이야기의 진위여부를 떠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은 문경새재의 지형을 잘 살펴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3개의 관문과 부속성, 관방시설 등을 축조했습니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부산 동래에서 밀양과 대구를 지나 문경새재를 넘고 다시 충주와 서울로 이어지던 내륙 천리길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당시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가장 짧고 빠른 길로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이용한 길이기도 합니다. 또 영남에서 거두는 30만 석의 세곡 가운데 무려 20만 석이 문경새재를 넘어 남한강의 창고에 쌓였습니다.
조선시대 당시 사람의 두 다리가 가장 든든한 이동수단이던 시절 문경새재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나라의 가장 큰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차와 자동차가 각각 등장하면서 백두대간에 경부선 철길이 놓이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습니다. 오늘날 문경새재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통행하는 길이라기보다는 옛 시간의 기억을 품고 있는 역사적 장소입니다.
>> 육십령 : 60명이 함께 가야 무사히 건널 수 있는 고개
육십령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경계에 있는 734m 높이의 고개입니다. 소백산맥 중의 덕유산과 백운산 사이에 있으며 신라 때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왔습니다. 오늘날 이 고개는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 전주~대구간 국도가 지나고 있습니다.
▶ 육십령 출처 :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육십령이라는 지명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신라 적부터 요해지였으니,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육십령이라는 지명에 담긴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의감영에서 이고개까지가 60리고, 장수감영에서도 60리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입니다. 두 번째는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다는 설입니다.
- 장안산 자락에서 태어나 육십령을 넘어 300리 진주에서 생을 마감한 논개
육십령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생가가 있습니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어우야담』에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고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논개가 기생이었다고 알려지는데, 구전에 의하면 원래 논개는 양반가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형편이 어렵게 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의 후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 논개사당 출처 :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지역에서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싸우게 됐습니다. 당시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는데 1차전투에서는 승리했고, 2차전투에서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됩니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습니다. 1593년 왜군들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해 이 자리에 참석합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어 바위에 올라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껴고 남강으로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논개가 오른 이 바위를 사람들은 ‘의암’이라 불렀고,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논개가 나고 자란 고장인 장수군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매년 9월 9일 ‘논개제전’을 열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길 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문경새재박물관 엮음, 실천문학사, 2001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김하돈, 실천문학사, 1999
『서울지명사전』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네이버 캐스트(http://navercast.naver.com)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조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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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국가지식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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