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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례문화

윤여설 2011. 7. 2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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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례문화

  • 테마분류 ㅣ 문화/예술
  • 등 록 일  ㅣ 2011-07-26
  • 관련자료 ㅣ 6개

관혼상제(冠婚喪祭)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치는 통과의례를 뜻합니다. 이 중 관례(성인식)와 혼례(결혼식)는 삶과, 상례와 제례는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네 가지 의례 중 삶과 죽음의 영역이 같은 비율로 들어 있다는 건, '죽음'이 삶과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선조들의 깨달음이겠죠. 오늘은 장서각소장 국학자료(http://yoksa.aks.ac.kr)와 국가문화유산 종합DB(http://www.emuseum.go.kr)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의 장례문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장례, 죽은 이를 보내는 예법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기일을 챙기고 떠난 이를 기억합니다. 각각 다른 방식이지만 생일과 기일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구별 없이 찾아듭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강화시켜주는 존재 조건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생일과 달리 장례는 한 사람의 생명이 다 했을 때만 치러지는 것으로 고인의 삶을 기리는 중요한 의식이자, 이승에서 고인을 보내는 예법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과 조선왕릉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랜 전통을 지닌 훌륭한 상장례 문화를 계승해 오고 있습니다. 상장례는 사람이 죽어서 장사를 지내는 일체의 의식으로 임종에서 염습, 치장, 대소상, 복제까지의 모든 의식절차를 말합니다. 이런 절차는 지역, 가문, 종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돌아가신 분의 뜻을 기린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오랜 옛날 부여에서는 주군이 죽으면 그 신봉자까지도 묘역에 동시에 매장했던 순장제도가 있었고, 고구려 때는 늙고 병든 사람을 산채로 광에 가두었다가 죽으면 매장했던 고려장이 있었습니다. 또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후부터는 불교식에 따라 100일 탈상 제도가 있었고, 사회적 신분에 따라 장례 절차가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고려 말기에는 송나라 때의 주자가례가 도입되었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상례와 제례의 의식절차가 유교식으로 제도화 됐습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상장례 제도는 법률 제2079호로 가정의례 준칙에 관한 법률이 1969년 1월 제정 공포돼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전통 장례 절차

-임종 : 죽음을 맞이함
부모가 숨이 끊어지는 것을 자녀가 지켜보는 것이 임종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자식이 부모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하면 가족이나 친족, 친지와 남들에게 큰 불효라고 지탄을 받았고,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손 스스로도 불효를 크게 자책해 근신했다고 합니다. 관혼상제 의식을 알기 편리하게 정리한 책인『사례편람』에서는 임종 때 남자는 남자의 손을 여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운명하는 것이 예라고 적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가 운명할 때는 아들의 손을, 어머니가 운명할 때는 딸이나 며느리의 손을 잡고 운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유교의 예법으로 생겨난 관습으로 조선시대 후기에 유효했습니다.

-고복(초혼) : 혼을 부름
고복은 초혼이라고도 하며 사람이 죽으면 혼이 몸에서 떠난다고 여겨 그 혼백을 다시 불러 죽은 이가 재생하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또 장례기간 동안 혼이 그 집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으로 행하는 절차입니다. 시체를 보지 않은 사람이 죽은 이의 저고리를 갖고 지붕 위로 올라가 서서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옷허리를 잡아 북쪽을 향해 흔들면서 큰소리로 죽은 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남자가 벼슬을 했으면 관직명을 함께 부르고 여자의 경우는 남편의 관직과는 관계없이 평소에 남들이 부르던 이름을 부릅니다. 이름을 부를 때는 이름에 앞서 주소를 먼저 외치고 “복, 복, 복”하고 세 번 소리칩니다.

-수시 : 시신이 굳기 전에 정성을 다하여 몸을 바로잡음
사람이 죽으면 소독한 약솜으로 고인의 코, 귀, 항문 등을 막고 눈을 쓸어 감기도록 합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게 한 뒤 머리를 바르게 괴고 손발을 바로 잡습니다. 그리고 홑이불로 몸을 덮고 널빤지를 준비했으면 그걸로 시상(屍床)을 마련, 그곳에 옮겨 모신 뒤 병풍으로 가리고 그 앞에 고인의 사진을 모셔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웁니다.

+사자밥 : 저승사자 밥상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대면하지 않은 부인을 시켜 밥을 지어 세 그릇을 문 앞에 놓고 또 세 켤레의 짚신과 약간의 돈을 놓아둡니다. 이것을 일컬어 ‘사자밥’이라고 하는데 죽은 사람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에게 주는 밥과 노자돈, 그리고 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접해야 죽은 이를 편하게 인도해 저승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발상과 상주, 호상
고복이 끝나면 남자는 머리를 풀고 여자는 머리에서 금, 은, 동 등의 비녀를 빼고 나무비녀를 꽂고 곡을 합니다. ‘어이고’ ‘아이고’ 소리 내며 울면 이웃에서는 그 집에서 사람이 숨졌음을 알고 모여들어 장례를 도와주기 시작하지만 정식으로 문상을 하지는 않습니다. 고인의 자손들은 장식품을 몸에서 떼어내고 집안의 화려한 장식들을 치우고 흰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상주와 주부를 세웁니다. 상주란 죽은 사람의 맏아들 또는 맏아들이 죽은 경우에는 맏손자가 되며 주부는 죽은 이의 아내나 아내가 먼저 죽은 경우는 맏며느리가 됩니다. 호상은 상례에 밝은 사람으로 장례의 모든 일을 주관하여 보살펴 처리합니다. 호상은 고인의 친척, 친지와 친구들에게 고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띄웁니다. 부고는 호상의 이름으로 고인이 모월 모시에 별세했음을 알리는 편지로 예전에는 꼭 인편을 통해 전했습니다.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은 대개 집안에 들여놓지 않고 지붕이나 담벼락에 끼워 놓았습니다.

-염습 : 시신을 씻긴 뒤 수의를 갈아입히고 염포로 묶음
염습은 시신을 깨끗이 닦고 수의를 입히는 절차입니다. 시신을 씻은 데 쓴 물과 수건 등은 땅을 파고 묻어버리며 그 밖에 병중에 입었던 옷은 불태워서 땅에 묻습니다. 그리고 염은 소렴(시신을 옷과 홑이불로 싸서 묶는 것)과 대렴(시신을 아주 묶어서 관에 넣는 것)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소렴은 숨을 거둔 지 이튿날 아침에 몸을 닦고 수의를 입혔고, 대렴은 사망한 사흗날 아침에 입관합니다. 수의는 하나하나씩 입히기가 어려워 미리 여러 가지 옷을 겹쳐서 아래옷부터 차례로 입히고 옷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산 사람과 반대인 오른편으로 여밉니다.

-복제 : 상복을 입는 제도
복제에는 죽은 이와의 관계를 따져 참최복(상주), 재최복(상제), 대공복(사촌과 맏손자를 비롯한 여러 손자), 소공복(6촌형제), 시마(8촌형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뉩니다. 이 복제는 베의 질로 구분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장례에서 상주와 상제는 부모를 돌아가시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베로 만든 모자와 짚으로 꼰 띠를 매고 옷 중에서 거칠고 추한 베옷을 입고 짚멍석을 깔고 꿇어앉아 조문객들을 맞이합니다. 여기에는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죄를 사죄하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고인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의 죄가 가장 크다고 여겨 가장 거칠고 성긴 상복을 입고, 촌수가 멀어질수록 죄가 덜하다고 여겨 상복의 상태가 덜 성기고 복상기간도 비례해서 짧아집니다.

상복 (새창)
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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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기간
우리나라의 장례는 3, 5, 7일장으로 치러지는데 3일장이 보통이죠. 하지만 과거에는 아주 가난한 집이나 신분이 낮은 집이 아니면 장례기간이 길었습니다. 장례기간을 출상이라 하고 죽은 이의 신분이 높을수록 늦어지는데 출상은 3, 5, 7, 9, 11 등 홀수 기간입니다. 죽은 이에 대한 모든 의식의 횟수는 거의 홀수입니다. 예를 들어 염습과정의 횟수라든가, 사용하는 비품 숫자도 홀수로 맞춥니다. 이는 음양설에 따른 것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양, 묻혀 있는 것을 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삶을 양, 죽음을 음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따라 숫자도 짝수를 양, 홀수를 음으로 여겨 죽은 이에 대한 의식의 숫자는 모두 홀수를 사용했습니다. 한편 왕이 죽은 경우에 장례기간은 100일 이상으로 왕의 죽음은 음양으로 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별을 뛰어넘었습니다.

-문상 : 타인의 죽음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함
상주와 상제들의 성복이 끝나면 성복제라는 고인에 대한 저녁 제사를 지내고서야 정식으로 조객의 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고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 집을 떠나 상가에 오는 동안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고 상가에 도착해서 상주와 상제에게 비로소 첫 말문을 여는 것을 원칙으로 여겼습니다. 문상하는 순서는 먼저 신주(죽은 이의 이름을 적어 놓은 나무패)를 만들어 혼백(초상 때만 쓰는 죽은 이의 이름을 적은 임시 신주)과 함께 둔 영좌 앞에 나아가 분향을 하고 짧게 곡을 한 다음 상주에게 절을 하고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문상이 끝나면 조객은 호상이나 상례를 도와주는 이에게 부의를 전하고 다른 조객과 함께 자리를 잡고 음식대접을 받습니다. 호상이나 부의를 받는 사람은 부의를 낸 조객의 이름과 액수를 조객 명부에 상세하게 기록해 누가 다녀갔는가를 후에 상가에서 알 수 있도록 합니다.

-치장 : 고인이 묻히게 될 장지를 준비함
우리 조상들은 장지를 정할 때는 이 곳이 길이 날 곳은 아닌지, 묘가 파일 곳은 아닌지, 농토로 변할 자리는 아닌지 꼼꼼히 따져보고 정했습니다. 장례일이 결정되면 하루 전부터 사람들이 고인이 묻힐 땅을 파고 뗏장(무덤의 봉문과 그 주변을 덮을 잔디)을 떠나 놓고 준비를 합니다. 고인이 죽기 전 장지를 준비 못한 집에서는 장지를 준비하고 장례일을 정했습니다.

-발인 : 상여가 집에서 떠남
발인제는 고인과의 마지막 작별을 하는 의식으로 영구가 상가나 장례식장을 떠나기 직전에 행합니다. 발인제를 지내면 관을 상여에 얹어 묘지로 갑니다. 상여는 궁중이나 대갓집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마다 새로 제작했고, 일반인의 경우 큰 도시에서는 상여도가에서 빌려서 사용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농촌에서는 마을마다 주민이 힘을 합쳐 상여를 제작하고 마을 입구 상승이나 서낭당이 있는 근처에 상엿집을 지어 그곳에 보관하고 초상이 날 때마다 꺼내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종이나 천민은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상여 (새창)
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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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제 : 길에서 올리는 제사
상여가 묘지를 향해 반쯤 나갔을 때쯤 노제를 지냅니다. 노제는 상여를 내려놓고 앞에 돗자리를 깔고 뒤에는 병풍을 친 후 제물을 차려 놓고 상주부터 차례대로 술잔을 올리며 두 번 절하며 곡을 하고 물러서면 친척, 친구를 비롯한 조객들이 잔을 올리며 두 번 절을 하고 나서 제물을 나눠 먹고 다시 상여를 묘지로 옮깁니다. 상여가 묘지 근처에 다다르면 상여를 내려놓고 영좌를 설치한 후 조객들의 조문을 받는데 이를 두 번째 노제라고도 합니다. 이는 장례기간 미처 조문을 하지 못한 친척, 친지와 지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산역 : 무덤을 만듦
산역은 무덤을 만드는 것으로 대도시에서는 상여도가의 일꾼 등이 일을 맡았고, 농촌의 경우는 마을 주민이 협력했습니다. 상여 출발 전에 상주는 장례일 전부터 조성한 묘지 터에 도착해 산신에게 간단한 산신제를 지냅니다. 상주가 먼저 관이 묻힐 네 귀를 한 삽씩 흙을 퍼내고 나서 일꾼들이 땅을 파기 시작하며 하관 전까지는 다 끝내도록 준비합니다.

-하관 : 관을 내림
하관은 관이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관도 지관이 정해 놓은 시간에 맞추어서 진행했습니다. 지방과 가문의 풍습에 따라 관을 버리고 시체만 묻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관을 하기 전에 구덩이를 솔가지로 깨끗이 쓸고 금정(무덤을 팔 때 구덩이의 길이와 넓이를 맞추는 나무틀) 양 옆에 백지를 붙인 다음 관을 맨 바를 풀고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발을 남쪽으로 향하게 한 후 관 사이에 밧줄을 넣어 양쪽에서 들어 구덩이에 서서히 내려놓습니다. 이때 금정과 시신의 방향이 똑바른 일직선이 되어야 합니다. 상제들은 산에서 산역이 끝날 때까지 영좌 옆에 서서 곡을 하며 뒤늦게 온 조객들의 조문을 받습니다. 지방과 가문의 관습에 따라 여자들은 묘지의 하관식에 참석 못하게 하는 곳도 있고 참석하게 하는 곳도 있습니다.

하관 (새창)
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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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 소품에 담긴 의미

-만장 : 고인을 애도하는 뜻으로 지은 글
만장은 고인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덕을 기리는 글을 비단이나 한지에 쓴 것으로 만든 깃발입니다. 만장은 보통 고인의 친구나 친지들이 살아 생전에 나눴던 고인과의 정을 생각하며 적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만장의 첫머리는 “근조(謹弔)”라고 쓰고 만장의 본문을 쓴 다음에 끝에는 자기의 성명을 씁니다. 고인의 가세나 직위에 따라 만장 행렬이 결정되는데 고종황제 장례 때는 만장 행렬이 수백 미터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만장은 상여를 따르게 하고 장례가 끝나면 빈청에 보관하다 삼년상 혹은 탈상 때 고인의 유품과 함께 태웁니다.

여러가지 만장 (새창)
여러가지 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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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여(靈輿)와 상여(喪輿) : 영혼과 시체를 모시는 제구
영여는 '영혼을 모시는 가마'라는 뜻으로 혼백과 신주를 상징하는 위패를 모십니다.
전통 장례에서는 이 영여에 영혼이 타고 간다고 여겼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영여 대신 죽은 이의 사진을 어깨에 걸고 상여 앞에 서는 일이 많습니다.
상여는 고인이 집에서 장지까지 타고 가는 일종의 마지막 교통수단입니다. 이런 상여를 꽃과 그림 무늬로 장식하는 것은 고인을 극락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상여는 가마보다 좀 더 큰 크기로 대개 상여 틀을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상여 한 틀을 공동으로 마련해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여집을 짓고 그곳에 보관했습니다. 상여를 메는 사람을 상여꾼, 향도군이라고 부르며 대개 천민들이 메는 것이 의례적이었고 후에는 동네 청년들이나 고인의 친구들이 메기도 했습니다. 요즘의 장례에서는 상여 대신 주검을 실은 영구차가 죽은 이의 사진이나 혼백을 실은 차를 따르고 있습니다.

-상여소리 : 고인의 넋을 달래는 노래
보통 사대부나 선비의 상여를 메는 상여꾼은 20여명이고 상여의 크기에 따라 상여꾼의 숫자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했습니다. 상여꾼들은 지휘하는 수번의 선창에 맞춰 상여소리를 부릅니다. 상여가 등으로 불리는 이 소리는 묘지까지 가는 동안 죽은 이의 넋을 달래려고 부르는 일종의 장송곡입니다. 상여소리는 여러 종류의 노랫가락이 있지만 지방마다 다르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달랐습니다. 상여꾼을 지휘하는 수번이 앞 구절을 부르면 상여꾼은 후렴을 하며 그 곡조에 맞춰 걷습니다.


상여소리 녹음 파일 (새창)
상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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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노 어노

어이가리 넘차 어허네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건너안산이 북망이로구나

어노 하 어허네

나간다고 설워를 말고

부디부디 잘있거라

어노 허 어허네

명사십리 해당화야

니꽃 진다고 설워를마라

어어 허 어허네

산천초목은 더젊어가는데

인간 일생은 늙어만지네

어노 허 어허네

이팔청춘 소년님네

백발보고서 웃지를 마라

어노 허 어허네

인제가면은 언제나 올꺼나

오는날이나 일러를주오

어노 어허 어허네

세상만사 다버리고

누구를 따라서 황천을갈까


※ 참고자료
『한국의 전통장례』박의서, 도서출판 재원, 2002
『아름다운 장례문화』김무조, 정만영, 이춘열, 이영철, 도서출판 구름사랑, 2003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
행복한 산소-네이버 카페(http://cafe.naver.com/welfarefuneral)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조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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