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다 남은 꽃은 들판에 피어난 요염한 첫 꽃보다 더 사랑스러워라 그것은 더욱더 애절한 그리움을 우리 가슴에 안겨 주는 거 아, 그와도 같이 헤어질 땐 만날 때보다 더욱더 몸에 저려드는 것을.
이 시는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Pushkin)의 <지다 남은 꽃>이다. 가을이 되면 머리에 떠오르는 싯귀절이다. 하늘에선 나 뭇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고, 파릇파릇 풀잎이 남아 있는 바람이 부는 늦가을 들 풍경, 그곳에 지다 남은 작은 꽃송이 하나를 연상해 본다. 바람에 떨고 있는 그 애절, 그 애련, 그 청초, 그 가냘픔, 그 사랑, 그 몸에 저려드는 생명의 절감, 이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느끼며.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나의 장조카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에 다니고 있었다. 나보다 다섯 살쯤 나이가 많았던가 한 다. 그 장조카의 책상머리에 이 시가 걸려 있었다. 일본말 번역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액자엔 수로가 있는 넓고 넓 은 벌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로엔 나룻배 가 한 척, 그리고 아름다운 소녀가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리고 들꽃들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소녀는 그 꽂을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하늘이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데까지 퍼져 있었다. 이 시는 늦가을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사진의 풍경 은 봄이었다. 가끔 방에 들러 이 시와 풍경에 마음을 적시 곤 했다. 그리고 이 시를 마음속으로 외곤 했다. 장조카는 4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깊은 낭만을 잊을 수가 없다. 재주가 많은 사람 ㅡ 천재는 요절 한다고 하더니, 나의 장조카 국형이도 그러한 선택된 사람 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나는 시에 의지하여 이 좁은 길을 맑게 걷고 있지 만, 그 힘은 이러한 「지다 남은 꽃」들이 주는 거 같다. 강한 것에보다 약한 것에, 풍부한 것에보다 청빈한 것에, 요염 한 것에보다 가련한 것에, 기름진 것에보다 애절한 것에, 가진 것에보다 없는 것에서 영혼의 고향을 찾는 나의 영혼 은 아직도 구름이다. 큰 꽃보다는 작은 꽃을, 이름난 꽃보다는 이름없는 꽃을, 황홀한 꽃보다는 빈약한 꽃을, 다채로운 꽃보다는 조촐한 꽃을, 으쓱대는 꽃보다는 가려진 꽃을 좋아하는 나의 심정 은 뭘까. 장미보다도, 국화보다도, 백합보다도, 모란보다 도, 글라디올러스보다도, 다알리아보다도, 해바라기보다도 카라보다도, 카네이션보다도 작은 들꽃에 마음이 끌리는 까닭은 뭘까? 약하기 때문이겠지. 사는 데 자신이 없는 까닭이겠지. 생존경쟁에 늘 처지기 때문이겠지. 이러한 처지는 마음에 기쁨을 주는 꽃이 있다. 싸리꽃 이다. 푸쉬킨이 사랑하던 「지다 남은 꽃」들은 넓고 넓은 평 원, 그 들판이 어울리지만, 내가 좋아하는 싸리꽃은 인적 이 드문 산기슭이 어울린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외떨어져 서 피어나는 싸리꽃, 그 영롱한 눈알들 속에서 나는 숨어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내가 찾고 있는 내가 그 속에 들어 있는 듯한 착각, 착각인 줄 알면서도 나를 찾는 나의 마음은 길을 가다 길을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느끼곤 한다. 온 하늘이 모두 그 꽃송이들 속에 들어박혀 있는 듯한 그 즐거움, 생명이 주는 그 희열을 나는 이 꽃에서 발견한다. 오물오물하고, 아기자기하고, 맑고, 깨끗하고, 항상 웃고 있는 그 꽃의 모습. 그 속에 무한한 세계가 들어 있는 것 같은 연상을 갖는다. 그 작은 꽃 한 송이, 한 송이 속에 거대한 우주가 돌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늘이 돌고, 구름 이 돌고, 바람이 돌고, 세월이 돌고, 생명이 돌고, 삶과 죽음이 같이 돌고 있는 무한한 시공이 그 속에 있는 것 같 은 생존의 기쁨을 발견한다. 기쁨은 영혼의 약이다. 피곤 한 영혼에 힘과 생기를 주는 약이다. 이 영혼의 약을 발견 하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 동안 나는 이 빛 속에서 머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