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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식과의 투쟁-당당했던 조선여인 나혜석(윤복현 글)

윤여설 2009. 5. 16. 16:36



나혜석(1896-1946)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경기도 수원에서 구한말 군수 집안, 나기정(羅基貞)의 5남매 중 2녀로 출생하였다. 14세에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오빠의 권유로 일본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동경 유학, 귀국 후 3ㆍ1운동에 참여

 

1914년 일본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學之光)」에 ‘이상적 부인(婦人)’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여권 운동에 앞장섰다. 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하였다. 이 회보 2호에 발표한 단편 ‘경희’는 여성적 자아의 발견을 주제로 한 원고지 140매의 작품이다.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1917년 11월)보다 4개월 늦었으나 김동인, 염상섭보다 1년 앞선 본격적인 여성소설 1호이다. 그녀의 작품 총 6편 가운데 서간체 소설과 단편소설은 문학사상(文學史上) 그림 못지 않은 위치를 인정 받고 있다.

 

21세 때 나혜석은 「학지광」의 편집발행인 최승구(崔承九)와 사랑하여 약혼했다. 그러나 그가 결핵으로 일찍 사망하자 나혜석은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빠져 방황한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였다. 1919년 동경에서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고 귀국한 김마리아, 황에스터와 연락이 되어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히 모였다. 이화학당 교사 신마실라, 박인덕, 김활란 등과 함께 3ㆍ1운동에 참가하는 등의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때 변호사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론을 맡아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사랑과 결혼, 미술 작품 제작에 열중

 

동경 유학 시절 이광수와도 염문이 있었으나 결국 김우영과 1920년 결혼하였다. 이때 그는 첫 애인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 비석 세우기를 요청, 약혼자의 승낙을 받아내고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만큼 자신만만했다. 또한 결혼 때 그가 내건 세 가지 조건은 오늘의 여성도 감히 내세우기 어려운 것이었다. 즉 일생을 두고 자신을 사랑할 것과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해 둘만이 살 것 등이었다. 이 모든 조건을 쾌히 승낙한 10세 연상의 변호사와의 생활은 말 그대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문예지 「폐허(廢墟)」의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화가로서도 치열한 창작열을 불살랐다.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70점으로 서울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22년부터 고희동과 함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鮮展)에 ‘농가’와 봄ㆍ두 작품을 출품하였다. 1923년에는 남편이 일본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임명되어 만주에서 살았다. 그 해 제2회 선전에서 ‘봉황성의 남문’이 4등 입선했다. 서양화 그룹 고려미술회 창립 동인이 되었고, 1924년 제3회 선전에 ‘가을의 정원’ 등을 출품하여 4등 수상했다. 1925년 제4회 선전에서는 ‘낭랑조(娘娘朝)’로 3등 수상하고 이듬해 제5회 선전에는 ㅍ천후궁(天後宮)’이 특선하였다. 아울러 단편소설 ‘원한(怨恨)’을 조선문단 4월호에 발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였다. 1927년 제6회 선전에 ‘봄의 오후’를 출품하고 남편과 세계 일주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딸 하나, 아들 셋을 낳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룬 듯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수업한 최초의 한국 서양화가

 

남편과 세계일주를 하다가 혼자 파리에 남아 8개월간 그곳의 야수파 미술을 공부하였다. 1929년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하여 수원 불교포교당에서 귀국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어서 1930년 제9회 선전에‘화가촌’‘어린이’등을 출품하고 1931년 제10회 선전에 ‘정원’을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다. 같은 작품으로 일본의 제전(帝展)에서도 입선함으로써 인정받는 서양화가가 되었다. 계속해서 1932년 제11회 선전에 ‘금강산만물상’ ‘소녀’‘창에서’ 등을 출품하고, 세계일주 기행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는 문인으로 보다는 아무래도 화가로서 빛을 발한다. 첫 개인전 당시 한국에는 고희동 등 10명 이내의 서양화가가 활동하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며 천부적인 재능으로 조형어법(造形語法)의 바탕을 다져 나갔다. 선전 출품작은 대개 인상파적 화풍에 대담한 터치와 생략기법으로 주제를 첨예화시킨 것들이어서 남자화가들을 제치고 당당히 입상의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더욱이 1923년부터 27년까지 만주 안동현 거주와 세계여행 등이 그녀에게 좋은 창작여건을 마련해 주¾珦습º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그녀는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작품성은 인상파 화풍의 ‘자화상’으로 절정에 달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함으로써 화면에 예술적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녀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이 출렁였다.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엄청난 유산을 통해 30대 초반의 여류화가는 국내 어느 화가도 접하지 못한 감동을 맛보고 이를 재창조해낸 것이다.
 


투철한 여성해방론자

 

나혜석의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폭넓은 인간관계와 사회적 경험에서 자연스레 싹튼 것이었다. 그녀는 1921년에 일찌기 가부장제의 억압에 있는 여성의 처지를 시 ‘인형의 집’으로 묘사, 매일신보에 발표한 바 있다. 또 1924년부터 26년까지 그녀는 김일엽의 여성의복 개량에 대해 동아일보에 4회에 걸쳐 논쟁, 미술가적 안목으로 조선옷의 특색을 살리자는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밖에도 서구 중심이나 절대 개방이 아닌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여 생활개량에 관한 글도 많이 발표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개진하는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때마침 그곳에 온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을 만나 파리 시내 관광 등을 안내하면서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귀국후 그녀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 때 그녀는 최린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또 정조(貞操)에 대해,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 밥먹고 싶을 때 밥먹고 떡먹고 싶을 때 떡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오,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분방한 생각은 남편에게는 물론 당시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1934년 1500장 분량의 ‘이혼고백서’에서,

‘조선 남성의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이 어이한 미개의 부도덕이냐…’

라고 사회적 인습과 몰이해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1935년에는 사회적 비난과 생활고 속에 방황하며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하였다.

“사 남매의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라”

일찍 핀 매화는 꽃샘 추위에 얼어 죽는다던가. 안타깝게도 당시 사회는 결코 이같은 그녀의 급진적 개방사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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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 출처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9&articleId=186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