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및 문학행사

이용악의 문학세계

윤여설 2009. 5. 9. 12:27

                                                     제비꽃(일명,오랑캐꽃)

 

 

시인·작가 탐방 - 이용악의 문학세계
강연 일시 : 2002년 8월 2일(금), 19:00∼20:40
이야기 손님 : 윤영천, 나희덕

 

 

 - 본 강연 -

유종호(이하 유) : 오늘은 '시인·작가 탐방-이용악의 문학세계'라고 해서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이용악의 작품 세계에 대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왼편에 계신 분이 윤영천 선생이십니다.(함께 박수) 인천의 인하대학에서 가르치고 계시고 사범대학장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이용악 시를 전부 수집해서 {이용악 시전집}을 편찬해서 내시고, {한국의 유민시}라고 하는 저서도 내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서정적 진실과 시의 힘}이라는 저서를 내셔서 식민지 시대 시인들의 업적을 검토하셨습니다. 오른편에 계신 분은 나희덕 선생이십니다.(함께 박수) 조선대학에서 가르치고 계시고, 특히 젊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어두워진다는 것}, {그곳이 멀지 않다} 등의 시집을 내셨고, 김수영 문학상과 김달진 문학상 등을 수상하는 등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십니다.

먼저, 처음으로 시전집을 엮으신 윤영천 선생께서 이용악 시를 발견하게 된 계기나 동기 혹은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시기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윤영천(이하 윤) : 얼마 전에 이런 모임이 있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이 자리에 나와서 이용악에 관한 이야기를 얼마나 실감 있게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릴 수 있을까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원래 이용악의 시를 알게 된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해서, 지금은 작고하신 지 꽤 됐습니다만(훗날 문예진흥원의 원장도 역임하셨는데), 시인이고 저로서는 대학 시절의 은사이기도 한 정한모 선생님께서 강의시간 중에(아마 1970년경이라고 기억됩니다), 시인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시를 아주 실감나게 저희에게 낭송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그 시를 지금 읽어보겠습니다. [두메산골]이라는 시가 네 편이 있는데, 그 중에 [두메산골4]입니다. '소금털이 지웃거리며 돌아오는가 / 열두 고개 타박타박 당나귀는 돌아오는가 / 방울 소리 방울 소리 / 말방울 소리 방울 소리'라는 짤막한 4행짜리 시인데, 그 당시에 이 시를 운율을 타서 아주 낭송을 잘 해주셔서 매우 근사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대학원을 느즈막이 들어갔는데(82년쯤), 대학원 박사과정 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용악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용악 시전집}을 엮어낸 것은 1988년 6월입니다. 1988년 7월에 이른바 120명에 달하는 월북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소위 해금한다고 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책을 펴내기까지 저 나름대로 여러 군데 쫓아다니면서 자료를 모으기도 했습니다만, 이용악 시인을 만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보면 우연한 계기였는데, 작고하신 정한모 선생을 통해서 그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뒷날 {낡은 집}, {분수령}, {오랑캐꽃}, {이용악집}(1949) 등의 시집에 실린 작품들을 접하면서 이 시인의 작품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볼 필요가 있겠다, 저 혼자만 읽고 지나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펴내게 되었습니다.

 

유 : 해방 직후에 {오랑캐꽃}이라고 하는 시집이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호화판으로 나왔습니다. 종이도 좋고 활자도 크고 장정이 아주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랑캐꽃]의 몇 구절이 표지에 글씨로 쓰여 있었지요. 지금 윤영천 선생께서 읽으신 [두메산골4]라는 시가 {오랑캐꽃}에 실려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두메산골]을 읽어보시면, 박용래라는 시인이 쓴 [저녁 눈] 같은 시와 뭔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실 겁니다. 그 시집 뒤에 이용악의 약력을 보면, {낡은 집}, {분수령}이라는 두 개의 시집 제목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멋있는데, 상당히 뭔가 매력이 있는 제목으로 보였습니다. 요즘은 한글 전용을 하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분수령'이라는 제목도 멋있는 제목인데, 꼭대기에서 비가 내려 이쪽으로 가면 동해로 가고, 저쪽으로 떨어지는 것은 황해로 간다는 [분수령]은 제목이 좋기 때문에 시도 좋을 것이라는 짐작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이 {분수령}, {낡은 집}이라는 시집이 일본 도쿄에서 한 100부 정도 자비 출판한 시집이었기 때문에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이용악집}이 해방 이후에 나와서, {분수령}과 {낡은 집} 속에 들어있는 시가 몇 편 소개되었지만, 윤영천 선생께서 {이용악 시전집}을 내셔서, 비로소 저도 {낡은 집}과 {분수령}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시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제목만 봤을 때 받았던 느낌이 있었는데, 실제 작품을 보고서 반가운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이용악 시를 알게 된 동기나 계기 등을 말씀해주셨는데, 실제로 {이용악 시전집}을 편집할 때 어려움이 대단히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삽화 같은 것을 조금 말씀해 주시지요.

 

윤 :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도 종종 느끼는 문제인데, 요즘의 젊은 학생들이나 연구자들은 너무 편하게 공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발로 뛰는 작업, 저희 세대만 해도 여기 저기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구해보느라고 굉장히 고심을 많이 한 세대입니다. 제가 인하대학으로 1988년도에 오기 전에 대구 영남대학에 있었는데, 지방 대학이어서 자료를 구하기가 훨씬 상대적으로 어려운 바가 많았습니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초판본이 아니고, 초판본에서는 구하지 못했던 것을 전부 찾아서 1995년에 증보판을 낸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 들으니까 얼핏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가 [38도에서]라는 시가 증보판에 실려 있는데, 해방되자마자 우리 나라는 남북이 분단되었는데, 분단의 민족적 비극을 노래한 시입니다. 영문학을 전공한 김동석이라는 해방 직후에 인천에서 주로 살았던 아주 유능한 평론가가 있는데, 그 분의 글 속에 '[38도에서]를 읽고'라는 짤막한 평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혹시 국회도서관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갔더니 역시 예감이 맞아떨어졌는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신조선부]라는 신문에서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증보판에 그것을 수록하게 됐는데, 사실상 자료를 수집하는 어려움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실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자화자찬 같지만, 분량이 많지도 않은 이 {이용악 시전집}을 펴내는데, 여러 모로 발품을 많이 팔았습니다. 그래서 이나마의 자료를 모으게 됐는데, 제가 마침 1998년도에 연구년(안식년)을 얻게 되어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연변대학에 7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북한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이용해서 연변대학도서관, 연변주도서관을 들르고, 개인적으로 헌책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1957년에 북한에서 간행된 {리용악 시선집}을 입수하게 됐습니다. 결국은 작고하신 정한모 선생이 대학 강의실에서 짤막한 4행시인 [두메산골4]를 한 번 낭송해주신 것을 제가 실감있게 기억하고 있던 것이 계기가 돼서 작품 세계를 접하고, 거기에 빠지게 되어서, 훗날 시전집까지 펴내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입니다. 오늘날 저로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이용악의 시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제 조그마한 노력으로 마련해 드린 것에 대해서 그나마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유 : 시를 수집해서 모은 것일 뿐만 아니라, 어려운 낱말이라든가 함경도 사투리라든가 혹은 함경도의 지명 등이 나와 있는 등 정말 수고를 많이 하셔서 우리가 이용악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낡은 집}이나 {분수령} 같은 시집을 어떻게 입수하셨습니까.

 

윤 : 이용악 시인의 고향이 함경북도 경성(鏡城)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서울도 경성(京城)인데, 함경북도 경성은 거울경(鏡)자입니다. 발음은 똑같지만, 한자는 다릅니다. 그래서 서울 경성과 구분하기 위해서 북경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1924년인가에 파인 김동환이 {국경의 밤}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분도 고향이 경성입니다. 그리고 이용악의 후배 시인으로서 연전에 작고하신 분으로 유정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이용악 시전집}의 뒤에 제가 간곡하게 부탁을 드려서 그 분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조금 전에 유종호 선생님께서도 언급을 하셨지만, 함경도 사투리를 제가 풀이해 놨는데, 이게 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시인 유정 선생님이 아주 총기가 있고 기억력이 좋으셔서 그것을 일일이 다 고증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투리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랑캐꽃}이라든지, 1937년의 {분수령}, 1938년의 {낡은 집}이 일본 동경에서 출판이 됐는데, 작고하신 유정 선생님과 제가 우연한 기회에 '이용악론'을 쓴 것을 계기로 해서 대구 영남대학에 제가 재직하고 있던 시절에 전화로 두 시간 동안 통화를 하기도 하면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인터뷰를 할 수도 없어서 전화료로 지불한 것만도 꽤 많았습니다. 하여간 지난 시기에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만, 일부는 유정 선생님을 통해서 얻기도 했고, 일부는 다른 경로로 자료를 구해서 전집을 엮어내게 되었습니다.

 

유 : 유정 선생은 함경도의 이용악과 고향이 같은 분인데, {램프의 시}라고 하는 시집을 낸 것이 있고, 신구 문화사라고 하는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계셨고, 일본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시가 모인 것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훨씬 아랫 세대에 속하는 나희덕 선생 세대에서는 이용악의 시를 어떻게 발견했고, 어떻게 보고 있는지 말씀을 해주시지요.

 

나희덕(이하 나) : 윤영천 선생님께서 발품을 하셔서 엮어주신 시집을 저희는 아주 편안하게 앉아서 고맙게 읽었던 세대입니다. 제가 국문과를 다녔기 때문에, 예전에 간헐적으로 보긴 봤습니다만, 해금되기 1년 전쯤이 제가 대학 4학년이었는데, 대학 1학년 때 문학사 책을 처음 접하면서, 이름이 전부 다 나오지 않고, 동그라미가 하나 쳐져 있는 그런 시인들이 꽤 여럿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는 궁금증과 더불어서 그런 시인들이 어떤 시를 썼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80년대 후반까지는 상당히 엄혹한 면이 있었고, 문화적으로 아주 척박해서, 그 사람들의 시를 읽고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금기를 깨뜨린다고 하는 호기심도 있고, 그래서 선배들이 정지용 시집 같은 것은 어딘가에서 제본을 해서 갖고 다녔습니다. 불심검문도 굉장히 많이 받던 시절이어서 도시락처럼 신문지에 싸서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불심검문을 통과할 때 시 자체를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80년대에 제가 만났던 해금 시인의 느낌은 금기된 것들에 대한 도전, 그리고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지적인 모험으로 처음에는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해금되고 나서 여러 시전집들이 출간되면서입니다. 예전에는 이용악이라는 뛰어난 시인이라고만 막연하게 느꼈었는데, 최근에 제가 중국 연변을 다녀왔는데, 거기에 가서 본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이용악 시에 나오는 유민들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아직 어렵고, 외양간 같은 작은 집에 슬프게 살고 있는 들판의 사람들을 지나가면서 보고, 유민들의 후예를 통해서 오히려 제가 살지 않았던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용악 시에 나오는 시의 육체를 만난 것 같은, 거기에 피가 도는 사람들을 다시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제가 이용악 같은 시인들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그런 감정적인 교류라든가 그 사람들의 삶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지금처럼 실감하지는 못했을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제가 살지 않았던 식민지 현실과 그 이후에 남아있는 모습들에서, 이용악 시인이 시로서 그 다리 역할을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 : 윤영천 선생께서 유민시라고 하는 맥락 속에서 이용악의 시를 많이 설명하고 해석하셨는데, 유민시의 맥락 속에서 평소의 지론을 개진해 주시지요.

 

윤 : 제가 이용악의 시를 본격적으로 자료를 찾고 한 곳에 모아놓는 과정에서 특히 저에게 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 중의 하나는, 조금 전에 나희덕 선생께서 유민(流民)이라는 용어를 말씀하셨는데, 이용악의 유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국내외적으로 살 길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라 밖으로는 만주가 지역적으로 압도적인데, 요새는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한 200만 명쯤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밀집해서 사는 곳이 길림성의 연변, 요령성, 흑룡강성입니다. 아주 북쪽으로는 내몽고까지도 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만주라고 했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 특히 흑룡강성도 실제로 가서 보기도 했는데, 이용악은 나라 밖으로 떠나간(유민보다 더 확실한 용어는 유이민(流移民)인데) 유이민들의 절실한 삶의 문제를 시로서 굉장히 잘 노래했습니다. 그 점에 착안해서 사실은 제가 1987년도에 학위를 받은 박사 학위 논문이 [일제 강점기 한국 유이민 시의 연구]인데, 실천문학사에서 책으로 엮어나온 것은 {한국의 유민시}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그 당시 만주로 간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고, 적어도 시기적으로는 1922년 이전에는 시베리아(지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이라는 항구가 있는데) 쪽으로도 많이 갔습니다. 1905년 무렵에는 하와이, 멕시코, 일본 등으로 갔습니다. 나라 안에서 떠돌던 사람들이 결국 살 길이 막연하면 만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용악은 일본의 상지대학을 다녔는데, 방학 때면 고향에 와서는 두만강을 건너서 지금 연변, 북간도 쪽에 가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시로서 잘 드러냈습니다. 예를 들면, [전라도 가시내]라는 작품이 있는데, 전에 시인 고은 선생이 어느 사석에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나도 [전라도 가시내] 같은 작품을 써봤으면 좋겠다'는 심경을 토로하신 것을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유민시라고 할 경우에는 범위가 조금 넓습니다. 88년도에는 실천문학사에서 {한국 유민시 선집}이라고 해서 두 권을 엮어냈는데, 거기에 보면 이용악을 포함해서 시인 숫자가 꽤 많습니다. 서정주 시인도 [만주에서]라는 시를 썼을 정도로, 그 당시에는 만주로 간 사람들에 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았고, 그런 관심을 집중적이고 서정적으로 노래한 시인이 이용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에 유종호 선생님께서 {다시 읽는 한국 시인}이라는 책을 펴내셨는데, 거기에서 집중적으로 깊이 다룬 시인이 임화, 오장환, 이용악, 백석 등의 네 분이었습니다. 백석도 있지만, 제가 펴낸 {한국 유민시 선집}에 낯선 이름들이 있는데, 작년에도 연변에 갔다가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유민시 선집에 홍종인이라는 사람이 30년대에 쓴 [가을인가]라는 서정적인 작품을 실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가서 보니까, 중국의 노쉰이 아주 극찬을 했고, 독일의 하이네라는 시인도 극찬을 했던 헝가리의 뻬떼피의 시선집을 홍종인이라는 사람이 북한에 가서 번역을 했습니다. 아주 시가 좋더라구요. 계북이라든지 박우천이라는 분의 시도 선집에 넣었는데, 그 분은 러시아의 소설을 번역했고, 30년대에는 그 분들이 별로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월북해서도 좋은 시들을 번역한 것을 볼 때, 유민시를 썼던 사람들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일본으로 간 사람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제가 변죽만 울렸습니다. 앞으로 유민시 혹은 유이민시라고 하는 것을 한국 문학사라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새롭게 재조명해보고, 전에 제가 이미 관심을 가졌었어도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것을 다시 정리해볼까 하는 생각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유 : 유민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일제 강점이 된 뒤에 많은 사람들이 거의 반강제적으로 할 수 없이 만주 쪽이나 러시아 쪽으로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용악의 [낡은 집]에 보면, 아라사로 갔다는 얘기도 있고, 오랑캐령으로 넘어갔다(만주 쪽)는 말도 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사실 유민은 19세기 중엽의 조선조 시대부터 생긴 겁니다.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북간도로 간 거지요. 그런데 조선조에서는 북간도로 가는 것을 하나의 범죄 행위로 취급하고 못 가게 했습니다. 여하튼 유민의 역사가 상당히 길다고 볼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의 곤궁한 생활을 적은 것이 넓은 의미의 유민시라고 할 수 있는데, 윤영천 선생께서 그 분야에 관한 많은 정보와 자료 수집을 통해서 이런 시집을 낸 것입니다.

이제 젊은 세대가 일반적으로 이용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지금 현재 시를 쓰고 계신 분의 입장에서 이용악의 시를 볼 때,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한계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씀을 해주시지요.

 

나 : 옛날 시들을 읽으면 공통적으로 언어가 변화했기 때문에, 주석이나 사투리 사전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그 시를 절반이나 이해할까 하는 것이 저희 세대들의 어려움일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언어적인 장벽을 몇 개만 넘어서고 나면 그대로 한 편의 시 속의 뛰어난 공간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이용악은 아주 난해한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시어가 상당히 평이하면서도 서정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고, 당시의 사회상을 감정적이거나 추상적인 선언에 경도되지 않으면서 구체적이고 특수한 풍경이나 서사적인 구조를 중심으로 정서를 이입시키고 있기 때문에 시대가 지나더라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몇 편의 시를 읽어서 생소함을 없애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시인의 입장에서 이용악 시를 읽으면서 제일 많이 생각했던 것은 유민으로서의 문제를 가장 잘 형상화한 시인으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고향에 관한 시가 많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젊은 시인이었기 때문에 서울과 고향이라는 두 개의 공간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으려고 하지만, 끝내 고향에 가보면 자신이 찾고자 하던 고향이 아니라는 [고향아 꽃이 피지 못했다]는 시도 있습니다.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불귀의 좌절이라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서울이라는 곳을 향해서 해방 직후가 되면 다시 돌아오는데), 끊임없이 문명과 근대의 중심지로서의 서울에 대한 폄하,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를 바라보면서 요즘 젊은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라는 것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은 고향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정서와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근대적인 문명과의 사이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그 양자 중에서 어느 한 쪽으로 편입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같이 아우르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일부의 젊은 시인들이 지닌 지나치게 현대적인 유명과 감수성에만 의존하고 근원에 대한 천착이 전혀 없는 태도는, 이용악의 시라든가 고민을 들여다보면, 조금은 보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어떤 점에서는 어느 한 쪽에 안착할 수 없었다는 것이 나름대로의 한계를 만들어내기도 하겠지만, 저는 오히려 이용악이 좋은 시를 쓸 수 있었던 기본적인 조건 중의 하나가 그가 처한 주변부적인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양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했던 요인이 될 수 있었고, 오히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으로 해서 실존적인 불안과 갈등을 통해서 시대적인 것들을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하나로 결합시켜 낼 수 있었던 요인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 다른 시인들에게서도 확인되는 바이지만, 시인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근원을 추구하고 탐구하고 좌절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가 몸담고 살아가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화해가고 뭔가 상실해가고 있는 현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이용악이 지닌 당시의 주변부적인 고민들이 오늘날 젊은 시인들의 고민과 어느 정도 맥이 닿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유 : 아까 윤영천 선생께서 서울 경성과 구별하기 위해서 함경도의 경성을 북경성이라고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함경도라는 말이 함흥의 함자와 경성의 경자가 합쳐져서 함경도가 된 것입니다. 그만큼 그쪽에서는 경성이 상당히 큰 고을이었습니다. 경성에서 태어나서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유학생 시절에 노동하는 얘기가 시에도 나옵니다. 고학을 하면서 대학을 나오고, 그 와중에 시집도 내면서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때 {인문평론}이라는 잡지가 나오던 곳이 있는데, 우리 나라 문학 잡지 가운데에서는 {문장}과 더불어 제일 좋았던 잡지입니다. 최재서라는 영문학하는 사람이 {인문평론}의 편집자(설립자)였는데, 미당과 이용악이 이 잡지에서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오랑캐꽃]이라는 시도 {인문평론}의 창간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 말기였기 때문에 머지 않아서 잡지가 폐간이 되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도 폐간이 되어서, 다시 낙향을 해서 함경도로 가게 됩니다. 아까 [두메산골4]라는 시도 낙향을 했을 때에 쓴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해방이 되니까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데, 해방 후에 쓴 시를 보면,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의 상황을 적은 시가 보입니다. 이때 오장환 같은 사람들과 함께 문학가 동맹에 가담을 해서 이른바 좌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장환이나 이용악의 시에는 해방 전에 카프 계통의 시인들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발상에서 나온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카프 시인들이 구호적인 시를 쓴 것에 비해서, 실감 있는 시들을 많이 써서 그 쪽 시인 가운데에서 가장 우수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가담을 한 시인들은 아니었습니다. 나이로 봐서 이미 카프가 해산된 뒤에 시를 썼기 때문에 가담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넓은 의미의 동반자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용악은 해방 후에 문학가 동맹에 가담해서 활동을 하다가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에 체포가 됩니다. 그래서 서대문 형무소에 있다가 6.25가 일어나 북에서 서울을 점령할 때, 석방이 되어 나왔다가 후퇴할 때 같이 따라간 것 같습니다. 북에 가서 처음에는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이용악 시선집} 같은 것도 나오고, 그 쪽에서 상도 타고 그랬습니다. 북한의 상이 재미있는데, 인민군이 주는 상입니다. 그리고 저는 잘 몰랐는데, 윤영천 선생의 책을 보니까 1971년에 폐결핵으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40년대 전후로 해서는 미당과 이용악, 오장환 등이 한국의 젊은 시인 가운데에서는 가장 촉망받는 시인이라는 거의 비평적인 동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미당의 자서전적인 시를 보면, 이용악에 대한 논평이 나오는데, 이용악이 잡지사에 다니면서도 서울에서 완전히 밑바닥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공원의 벤치에서 자기도 하고, 밤이 되면 친구의 약국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주인이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면 약국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조금만 생활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면, 월급도 탔으니까 조그만 방이라도 마련해서 하숙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전혀 그런 것에 무관심해서 뜨내기 생활하는 것을 보니까 안타깝다 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미당과 다른 점이 그런 것 같습니다. 미당은 똑같이 밑바닥 생활을 하더라도 이미 가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령껏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용악은 미혼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완전히 보헤미안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용악 시를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볼 때 중요한 특징으로 유민들의 삶을 많이 관찰하고 노래했다는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윤영천 선생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윤 : 유이민시 혹은 유민시의 관점에서 이용악 시의 좋은 점을 말할 수도 있지만, 같은 시대에 시를 썼던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서 이용악 시의 특징을 짚어 보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이 문학을 전공하신 분들은 아닌 듯 해서 이런 용어를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리얼리즘은 현실의 문제를 작품에 잘 반영하는 것인데, 그것과는 다르게 모더니즘은 기교나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학적 경향을 통틀어서 얘기합니다. 카프에 속해 있던 임화 같은 사람의 시는 아주 구호적이면서 관념적인 단점을 시가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용악의 시는 현실적인 중대한 문제를 노래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았다고 하는 것, 시라고 하는 것은 원래 서정성이 중요한 핵심인데, 이용악은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잘 결합한 시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대의 서정주와도 조금 차별되고, 오장환도 훗날에는 좋은 시를 썼습니다만, 적어도 {낡은 집}과 {분수령} 등의 시집이 나왔을 때 이용악은 아주 짤막한 작품이면서도 삶에 관한 구체적인 생활적 소재를 잘 곁들여서 서정적으로 처리한 장점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제가 덧붙여서 말씀드린다면, 같은 월북 시인으로 경남 거창이 고향인 김상운 시인이 있습니다. 과거에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던 김상운 시인과 함께 이용악 시인이 {풍요시선}이라는 한시를 번역했습니다. 그걸 보면 이용악이 한문이나 한시에 대한 소양이 꽤 깊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낡은 집]이라는 시가 이용악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치 소설의 경우처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낡은 집]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1930년대 조선 농민들이 몰락하는 모습을 아주 잘 그려냈습니다. 거기에 보면, 유종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아라사(러시아)로 가는 사람들과 함께 오랑캐령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제가 98년도에 중국에 갔을 때 실제로 그 곳을 가보았습니다. 가보니까 고개가 아주 험하고, 함경도에 회령이라는 곳이 있는데, 두만강을 건너면 삼합이라는 곳이 나오고 거기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랑캐령입니다. 오랑캐령을 질러서 약간 왼쪽으로 가면 용정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연길이고, 아주 오른쪽으로 두만강변을 따라 올라가면 도문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용악은 한시에 대한 소양이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과거에 다산 정약용뿐만 아니라 그 전에 시들이 지닌 이야기성을 자기 시에 잘 반영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입니다. 해방 후의 시를 보면, 해방 후는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때인데, '아지 프로'라는 말(아지테이션(선동)과 프로퍼갠더(선전)의 준말)이 있을 정도로 선전 선동의 시가 많았는데, 이용악 시인도 그런 부류의 시를 썼지만 그래도 시로서의 품격을 지니고 있는 시를 썼습니다. [기광구에서]라든지 [나라에 슬픔 있을 때] 등의 작품에 대해 유종호 선생님께서는 정치시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이용악은 일급의 정치시도 쓰고, 말하자면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시보다는 형상성, 구체성에 입각해서 기술적으로도 세련된 모습의 시를 썼다고 하는 것이 이용악 시의 간과할 수 없는 장점이 아닌가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는 이야기시라고 할 수 있는데, 아주 짧은 시로 이야기 구조를 독특하게 지니면서도 높은 수준의 서정성을 간직한 시를 썼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다른 시인들의 작품 세계와 견주어 보더라도, 수준이 상대적으로 꽤 높은 시 세계를 보유하고 있는 시인이 이용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유 : 지금 말씀하신 시 가운데에서 [나라에 슬픔 있을 때]라는 시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빗대어서 당대의 현실을 노래한 시입니다. 다비데가 일어서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다는 시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도 우리의 거대한 적을 물리치자는 취지인데, 선동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로서 아주 우수합니다. 이 시는 해방 직후 1946년 3월에 문학가 동맹 시부에서 {3.1 기념시집}을 냈는데, 거기에 실려 있는 시 가운데에서 가장 성취도가 높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서정주의 [혁명]이라고 하는 시가 있고, 임화의 [3월 1일이 온다]는 시도 있는 등 아주 좋은 시들이 많이 실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시의 하나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이용악이 김상훈 시인과 함께 북에 가서 한시 번역을 했다고 했는데, 김상훈 시인은 {대열}이라는 시집을 냈고, 해방 직후에 전위 시인이라는 명칭을 얻었습니다. 김상훈, 이병철, 박산운, 유진오, 김광현 등의 다섯 사람이 {전위시인집}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지금 말씀하신 '아지 프로'의 시입니다.

어떤 시, 어떤 시인을 좋아하느냐 하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경험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당을 저는 높이 평가하는데, 미당이 처음 {화사집}이라는 첫 시집에 [자화상] 같은 훌륭한 시가 있지만, 거기에 실린 태반의 시가 제 비위에도 안 맞고, 또 한자가 너무 많아서 실감도 안 갔습니다. 그래서 미당 하면 {귀촉도}, {신라초} 같은 시절의 시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저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이 대개 {화사집}을 좋다고 합니다. 김종길 선생 같은 분은 {화사집}이 최고다 라고 얘기를 하지만, 저는 거기에 대해서 동의를 안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하면 그 분은 {화사집}을 젊을 적 시를 좋아하던 무렵에 접했습니다. 처음 시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접했으니까 그때는 모든 시가 다 좋아보여서, 특히 {화사집}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화사집}이라고 하는 것이 130부밖에 간행되지 않아서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방 후에 {귀촉도}라고 하는 시집이 나왔는데, 이것은 상당히 접근하기가 쉬워서 {귀촉도}를 상당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한참 나이가 들어서 {화사집}을 보니까 아주 서투르고 객기가 많고, 과장이 많아서 지금도 별로 좋아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반은 서정주의 습작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가 언제 처음 접했느냐 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같은 것도 그런데, 저는 범죄영화나 외계인 나오는 영화보다는 오히려 서부극을 좋아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서부극이라고 하면 아주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같은 시인을 보는 안목이 세대에 따라서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궁금하기 때문에 그런데, 실제로 오장환이나 이용악 같은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에 정말 괜찮은 시인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인지, 그냥 좋다고 하니까 선배를 대접하는 의미에서 괜찮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나희덕 선생께서 실감나게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함께 웃음)

 

나 : 단순히 세뇌에 의한 것은 아니구요. 시를 읽을 때에 기본적으로 시대적인 경험, 언어적 차이를 전제하고 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 없이 지금의 내 입장에서 좋은 시, 나쁜 시를 가린다면 굉장히 좋은 시, 배워야 될 시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감안하고 일단은 그 시대 속에서 여러 시인들을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누가 좋다, 누가 별로다 라는 것이 나누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시적인 완성도로서 이 시는 정말 잘 짜여져 있어서 이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와 그냥 한 사람의 독자로서 왠지 엉성하고 이미지도 단촐한데 괜히 어느 한 구절이 내 마음을 찌르고 들어와서 움직이는 그런 힘을 주는 시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낡은 집]이라든가 [오랑캐꽃]처럼 시집의 표제작이 된 시들과 [전라도 가시내]처럼 아주 서사적이면서도 그것이 아주 단박하게 절제되어 있는 시들을 이용악의 특장이 가장 잘 살아있는 완성도가 높은 시편들이라고 인정하는 데에 저도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이용악을 가까이 느끼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전적인 시들인 것 같습니다. 초기 시들 중에서 후기 시들에 비하면 조금 미숙하고 잘 들어오지 않는 시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는 시는 아버지의 객사하는 장면과 풀벌레 소리가 자욱하게 울어대는 모습이 살아있는 이미지와 감각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가 밤에 제사지내는 장면을 그린 [달 있는 제사]는 반대로 아주 짧게 4,5행밖에 안되는데, 그 4,5행의 음유적인 언어 속에 굉장히 아픈 이미지가 그려져 있어서 그런 시들이 정서적으로는 더 오래 남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얘기를 보태자면, 실제로 [오랑캐꽃]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서사적인 것이 더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서정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어떤 시인이든지 그 사람의 장점이 그 사람의 한계이다 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 두 가지를 아주 적절하게 균형을 갖고 절제해놨을 때, 뛰어난 시, 품격 있는 시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쉬움으로는 그런 서사적인 성향을 조금 더 극대화시켜서 시적 형식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었을텐데, 왜 이런 정도의 규모에 머물렀을까 하는 의문도 남습니다. 예를 들면 서정주가 후대에 {질마재 신화}에서 이야기체를 대놓고 쓰면서 신화나 역사 같은 구전적인 것들을 이야기체로 아예 풀어서 시집 한 권이 형식적인 실험으로 이루어져 있다든지 또는 후대의 시인 중에 신동엽이 {금강}이라고 하는 긴 서사시를 썼다든지 하는 시도가 이용악 시인에게도 가능할 수 있었을텐데, 그것이 시대적으로 월북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지금 남겨져 있는 시들만으로 봤을 때는 그 어느 한쪽으로의 특장과 실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유 : 지금 말씀하신 왜 조금 더 본격적으로 장편 역작을 쓰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결국 체력과 관련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용악 시대만 하더라도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이 40이 안 됐을 겁니다. {질마재 신화}를 쓸 때는 적어도 미당이 60세 가까워졌으니까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봐서 사실 시인을 뒷받침해줄 만한 저널리즘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긴 시를 쓴다고 해도 발표할 가망이 없으니까 잡지에 실을 수 있는 정도의 시를 쓴다는 것이 관행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악의 시를 보면, 아까 윤영천 선생께서 관념적이지 않고, 뭔가 실감이 간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시인이 실제로 자기가 경험한 세계를 다루었다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나희덕 선생께서도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시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셨는데, 이것은 들판에서 그냥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얘기입니다. 이 아버지가 아라사나 이런 데에 왔다 갔다 하는 장사꾼이었는데, 그러다가 객사를 한 겁니다. 객사를 할 때 이용악도 거기에 있었던 모양인데, 이런 것은 정말 생활에서 나온 것이고, 시인으로서는 일생 동안에 가장 통절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시 자체가 좋은 시로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이용악이 어릴 적에 국수집 아이였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생활에서 우러나온 시,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이기 때문에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정감에 호소하는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오랑캐꽃}은 봤지만, {낡은 집}이나 {분수령}을 보지 못해서 그 시 세계를 알지 못했다고 했는데,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같은 시는 워낙 좋은 시이기 때문에 옛날에 문학사 같은 데에 인용이 되어 있어서 대충 어떤 시인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철이 {신문학사조사}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이용악 시에 관해서는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는 시가 부분적으로 인용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백철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평소에 문학적 안목을 신용하지 않아서, 어떻게 이렇게 둔한 사람이 이렇게 좋은 시를 알아봤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함께 웃음) 나중에 보니까 임화의 {문학의 논리}라는 책 속에 인용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백철이 시는 자신이 없으니까 대개 임화가 하는 얘기를 그대로 적어서 그런지, 백철의 {신문학사조사}에 인용되어 있는 시의 많은 부분이 임화가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분적으로는 앤솔로지의 덕택으로 친해질 수가 있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윤영천 선생께서 이용악에 관해서 하시고 싶은 얘기를 자유롭게 말씀해 주시지요.

 

윤 : 조금 전에 나희덕 선생께서 이용악 작품 속에서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와 [달 있는 제사] 등의 아주 좋은 작품을 말씀하셨는데, 유종호 선생님 말씀하셨듯이, 그런 좋은 작품들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용악 시인 자신의 경험이 밀착되어서 더욱더 실감을 얻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용악의 작품 중에는 가족사 문제가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 꽤 여러 편 있고, 대체로 그런 작품들이 다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시적 성취도가 꽤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용악이 1949년에 체포되어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6.25 전쟁 때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이 6월 28일입니다. 그때 이용악이 형무소에 있다가 인민군이 문을 활짝 열어젖혀서 인민군들과 함께 월북을 했지만, 사실 월북이라기보다는 자기 고향에 돌아간 것입니다. 앞으로 이용악을 좀더 제대로 논하기 위해서는 북한으로 간 후에 그의 문학적 행적을 잘 고찰해봐야 되는데,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1957년의 {리용악 시선집}에는 북한에 가서 쓴 작품도 상당수 있고, 과거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이용악집} 등의 시집 속에서 여러 편을 뽑아서 묶어 놓았습니다. 북한에 가서 쓴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평남관개시초]라는 시입니다. 관개라는 것은 물을 대는 것인데, 평안남도에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물을 잘 대줘야 되는데, 대규모 공사를 소재로 한 시입니다. 그 작품도 이야기 성격이 강합니다. 다만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용악도 북한 체제가 좋다고 생각해서 월북을 했겠지만, 이용악이라는 시인에게는 체제가 별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1957년 이후에도 간혹 몇 편의 작품이 눈에 띌 정도입니다. 그것은 별도로 제가 모아두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앞으로 통일이 되어서 통일문학사를 기술하는 시점에서는 이용악이 이북에서 썼던 작품들도 네 권의 시집의 연장선 상에서 잘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 황석영 씨가 북한에 있다가 나중에 독일로 갔다가 미국에 갔다가 들어오면서 감옥 생활을 좀 했는데, 황석영 씨의 짤막한 글을 보니까, 이용악의 아들 창이라는 화가를 만나본 만나본 듯한데, 이용악 시인은 폐결핵으로 1971년에 작고했습니다. 제가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적어도 1958,59년까지는 작품 활동을 했던 듯하고, 1960년대부터 죽기 전까지는 활동을 안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 그것은 쓰고 싶은 생각이 많았어도 자기가 진정 쓰고 싶은 작품은 쓰기가 힘든, 편치 않은 상황 때문이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백석 같은 시인은 아동문학 평론도 하고,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에 꽤 힘을 많이 기울였습니다만, 앞으로 이용악에 관한 논의는 연구라는 말을 빌지 않더라도 체제가 다른 북쪽에 가서 그의 시작 활동의 면모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좀더 잘 정리하게 되면, 이용악이라는 시인의 작품 전모에 대해서 훨씬 더 깊이 있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 : 1971년에 돌아갔다고 하면, 60세가 안 되어서 돌아간 겁니다. 그리고 오장환 같은 사람은 40이 안 되어서 돌아갔습니다. 오장환, 이용악, 서정주가 30년대에 대표적으로 한국의 촉망받는 시인들이라고 했는데, 결국 미당은 오래 살아서 좋은 작품을 많이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은 살고 봐야죠.(함께 웃음) 그리고 잘 먹어야 되는데, 대개 폐결핵이라는 것은 옛날에 영양부족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겁니다. 김유정의 말년의 편지를 보면, 뱀이라도 몇 마리 잡아 먹어서 빨리 몸을 보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이용악의 사망도 북쪽의 어려운 사정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희덕 선생께서도 보태고 싶은 이야기를 한 말씀 해주시지요.

 

나 : 아까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체제 속에서 거기에 맞춘 시를 쓴 시인이 있고, 아니면 차라리 침묵으로 대응하는 시인이 있는데, 저는 그 경우에 침묵이, 더 많은 집필로 제도화된 물품을 만들어내는 역할보다 훨씬 더 시인다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남한에서 월북하기 전까지 쓰여진 이용악의 시가 가지고 있는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자기 개인의 내면에만 골몰하지 않고, 시대적인 얘기를 하면서도 추상적이거나 선동적인 언사로 남발하지 않고, 자기화된 목소리로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변모하지 않고, 튀지 않고, 그랬기 때문에 시가 올곧게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앞으로 시인으로서 살아갈 때, 그가 가졌던 시대에 대해서 무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정말 자기의 실존적인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체화시키는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서 둔화되지 않는, 그리고 그것을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표현하는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유 : 지금 말씀 중에 잘 맞지 않고 그럴 때에는 침묵하는 것이 좋다고 얘기하셨는데, 무서운 체제라고 하는 것은 침묵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체제다 라는 생각이 들고, 북에서의 동정을 잘 모르지만, 지금 윤영천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용악이 60년대에 활동을 안했다면, 침묵했다기보다는 뭔가 제재를 받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60년대 초에 백석도 삼수갑산으로 쫓겨가고 그랬으니까, 문학에 대해서 뭔가 바람이 불어서 더 억압적이 되었기 때문에 침묵을 강요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윤 : 조금 말씀을 덧붙이면, 북한 문학사를 보면 1967년부터 소위 주체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대두합니다. 아마 이용악이나 백석 등이 주체문학이라고 하는 현실 앞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체문학은 60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조짐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런 정치적인 상황의 변동이나 변화와 아주 직결된 것이 아닐까, 저로서는 그런 정도로 예단 내지는 추측을 하는데, 아마 조금 전에 말씀하신 단순한 침묵이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외적 요인과 긴밀하게 연관된 특정의 상황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 : 올해가 정지용, 김소월, 채만식 같은 분들의 탄생 100주년이 되었기 때문에 그 분들의 문학을 지난번에 조명해 보았는데, 그런 과정에서 북으로 갔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도 관심을 갖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현대문학의 정전 속에 응당 포함되어야 할 시인으로서 백석과 이용악을 얘기해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실제로 이용악의 시를 접해보면, 감동적인 부분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질의 응답 ◈

 

질문자 1 : 이용악 시를 저는 많이 읽어보지는 못하고, [낡은 집], [오랑캐꽃] 등을 읽어보았는데, 나희덕 선생님께서 서사 구조, 짧은 이미지 등을 말씀하셨는데, [오랑캐꽃]을 읽으면서, 구려 장군님이 오셔서 오랑캐들을 다 물리쳤는데, 오랑캐 너는 가만히 있다가 이름이 오랑캐꽃이 됐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는 부분을 보면서, 개인사적인 부분을 떠나서 이용악 시인이 민족주의적인 의식이 있지 않았느냐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월북 작가의 시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시를 조명하는 것은 우리 독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용악의 [낡은 집]을 보면서, 정말 이 시대의 우리가 읽어야 할 시라고 생각을 했는데, IMF 시대를 살아가는 아주 어려운 저소득층의 사람들을 느끼기에 너무나 적합한 시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윤 : [오랑캐꽃]이라는 시는 원래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고구려 장군님'으로 되어 있었는데, 훗날 시집에 올리면서 '고구려'가 '고려'로 바뀌었습니다. 오랑캐꽃은 앙증맞고 조그맣고, 색깔이 보랏빛도 있고 노란빛도 있는 등 제가 식물도감을 찾아보니까 아주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함경북도 경성이 고향이라고 했는데, 경성 가까이에 고려 시대의 윤관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수대라는 윤관과 관련된 사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경성 지방에서 멀지 않은 석막면에 여진족이 공동부락을 이루면서 그때도 꽤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랑캐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그 지방에 계속 내려왔을텐데, 문제는 오랑캐꽃이라고 하는 것은 여진족과 아무 관계도 없이 오랑캐꽃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생각보다는 좀 난해한 시입니다. 오랑캐꽃이라는 조그맣고 연약한 꽃의 형상을 빌어서 뭔가 그 무렵에, 어렵게 살아나가는 아니면 핍박받는 사람들의 서러운 처지를 노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더 꼼꼼하게 보시지 않으면 자칫 시적 의미를 놓치기 쉽기 때문에 공을 들여서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다행히 유종호 선생님께서 {다시 읽는 한국 시인}에 [오랑캐꽃]에 대해서 아주 꼼꼼하게 분석적으로 실감 있게 해설조로 글을 쓰셔서 그것도 좋은 참고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월북 작가들의 작품은 저희처럼 공부하는 사람조차도 88년 7월에 해금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는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굉장한 불행이었는데, 저도 대학시절에는 백석의 {사슴}이라는 시집을 용케 빌려서 밤새도록 베껴적은 기억이 지금도 새로울 정도입니다. 이용악의 [낡은 집]은 작품의 성취도도 아주 높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유민 혹은 유이민들의 설움이나 삶의 실상을 아주 절실하게 잘 묘파했다고 하는 점에서 훌륭한 작품입니다. 지금 질문하신 분은 꽤 좋게 읽으셨던 것 같고, 혹시 아직도 이용악 시를 접할 기회를 구체적으로 가지지 못하셨던 분들도 앞으로 찾아서 읽어보시면 좋은 문학적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자 2 : 유종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1930년대 당시에 서정주, 이용악, 오장환 등이 삼재라고 불리워졌었는데, 제가 이용악 시를 읽으면서도 백석 시와 자연적으로 비교가 되더라구요. 그런데 지금 이용악 시세계를 얘기하면서 가장 많이 거론되었던 것이 지극히 시인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읽어도 가슴에 와 닿고,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용악의 시세계가 조금 한정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일관된 주제가 궁핍함, 고생 같은 것인데, 그런 만큼 스스로 소재가 한계적이어서 다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석 시인의 경우에는 상당히 다양한 세계를 풀어냈는데, 그렇게 생각해볼 때, 이용악 시인이 삼재로 일컬어졌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당시의 평자들이 어떤 관점에서 평가를 했기에 백석이 아닌 이용악이 삼재가 됐을까 라는 의문이 들고, 거기에서 가지 쳐서 나온 또 하나의 질문은 시의 소재가 한정적이었을 때, 거기에 시인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 : 제가 삼재에 대해서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삼재에 해당하는 사람은 백석보다 아랫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백석은 1936년에 시집을 내서 말하자면 이용악, 서정주보다는 선배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재라고 했을 때에는 젊은 시인들로서 촉망받는 시인이라는 얘기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백석은 이미 이 신진 시인들보다는 그 전대의 시인이라는 느낌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지 백석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을 뽑은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는 윤영천 선생께서 말씀해주시지요.

 

질문자 2 : 그리고 오장환 시인이 백석 시인을 상당히 폄하했었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유 : 오장환이 백석을 폄하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장환의 입장에서 볼 때에 백석의 시가 처음에 사투리가 많고, 상당히 읽기가 어려웠는데, 그런 것이 오장환의 취향에 맞지가 않았을 겁니다. 오장환은 우리 나라 시인 가운데에서 운율성에 대해서 가장 민감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방 후에 김소월 같은 시인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그랬지요. 리듬감에 대해서 민감하고 동시에 운율성을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 보면, 백석의 시는 운율감이 전혀 없고, 일종의 투박한 산문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을 겁니다. 또 오장환이 백석을 혹평했을 때에는 상당히 사회적인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백석이 가지고 있는 관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현실적 관심이 아니고 오히려 퇴영적으로 옛날 얘기, 어린 시절 얘기만 하니까 현실 도피가 아닌가 하는 몇 가지 점이 작용해서 오장환의 입장에서 백석을 폄하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오장환은 젊은 기분이었고, 또 오장환의 산문을 보면, 지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의 산문입니다. 그러니까 절제되지 않은 생각을 젊은 기분에 털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악의 실제 경험에서 오는 한계성에 대해서는 윤영천 선생께서 조금 더 설명해 주시지요.

 

윤 : 말하자면 새롭게 떠오르는 별이랄까, 청년 시인으로서 유망주라고 할 수 있는 세 사람을 삼재라고 일컬었고, 백석은 유종호 선생님 말씀대로 그들보다는 조금 선배로 놓인 것입니다. 시를 제쳐놓고 수필을 보면, 백석의 수필은 아주 격이 높습니다. 오장환도 미술에 꽤 조예가 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이 맛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이용악의 수필은 맛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왜 드리느냐 하면, 가령 정지용, 김기림의 수필이 다 격이 있는데, 이용악의 수필은 소재가 제한적이어서 멋이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의 경우에 있어서 이용악의 시는 소재의 제한성이랄까, 어떤 특정의 소재를 가지고 시를 썼을 때는 굉장히 탁월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비해서 다양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일정하게 동의합니다. 그런데 백석의 시는 사뭇 철학적이거든요. 운율성은 살아 있지 않으면서도 소위 줄글 형식으로 써나가는데, 그게 굉장히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성 면에서 이용악의 시는 백석과 견주어서 상대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은 올바른 지적인 것 같습니다. 오장환은 아주 운율이 살아 있는 시, 후기에 [고향 앞에서] 같은 시를 보면 괜찮습니다. 백석은 운문성에 대한 고려는 거의 하지 않은 반면, 쉽게 써내려간 듯 하면서도 우리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수가 어려 있는, 존재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면이 있습니다. 이용악과는 상대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백석은 상당한 세계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고, 상당히 여러 편의 기행시를 썼습니다([여승]이라는 시도 그 부류에 넣을 수 있고, 경남 통영에서의 시 등). 그 두 시인과 더불어 오장환까지 각각의 시 세계가 나름의 장단점이 있고 특성이 있습니다. 각각의 특성이나 개성적인 면모를 독자의 입장에서 잘 가늠해서 읽으면 그 자체대로 또 다르게 읽는 맛이 우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 : 이용악 시인이 자기의 구체적인 체험을 토대로 했다고 해서 자기 얘기를 많이 쓴 시인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개인 얘기라든가 가족 얘기는 의외로 적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용악의 시는 관찰자적이고 전달자적이어서 다양한 인물들을 다양한 정황 속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각조각 그려진 인물들이 그려내는 시대의 조형도는 굉장히 선명하지만, 그것을 이루고 있는 세부적인 시편 한 편 한 편에서 보면 오히려 자기 개인적인 체험에 별로 빠지지 않고, 동어반복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다양한 유형의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중의 계층을 이루는 사람들의 직업도 다르고, 살아온 내력도 다른데, 어떻게 보면, 시가 지어졌을 정황 같은 것은 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듣고 쓴 시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기의 주관적인 체험에만 매몰된 시인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들이 비슷한 문제들을 환기시키고 하나의 시대 조감도를 선명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어떤 시인이든지 문제의식이 너무 분명하다거나 작품의 구심이 강할 경우에 상대적으로 다양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다채로워질 때는 그만큼 그것을 아우를 수 있는 선명한 인상이 약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아까 자기 체험에 충실한 시인이라고 했던 것이 자기 개인의 체험에만 국한되지는 않은 것이라는 점을 해명 드리겠습니다.

 

윤 : 거기에 조금 말씀을 덧불일 수 있다면, 이용악이 일본 유학 시절에 동경 근교에 히바우라 라는 해군도시가 있는데, 군부대에서 나오는 잔반도 먹고, 날품팔이 노동도 하고, [나를 만나거든]이라는 시를 보면, 자기 체험의 구체성에 근거해서 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시인이라고 하면 지식인 시인들을 생각하지만, 80년대 중반에 박노해라는 시인이 출현해서 뭔가 새로운 계층(그 사람도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지만)으로 문단에 새로움을 몰고 왔는데, 이용악이야말로 그런 체험을 실제로 했고, 따라서 그의 시 세계가 조금 전에 나희덕 선생 말씀대로 자기 주관성에 함몰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시선을 따뜻하게 보냈다는 점에서 장단점이 다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용악 시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문자 3 : 그동안 강의를 접하면서 유종호 선생님께서 우리말 표현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정지용이나 김소월의 시적 표현들처럼, 우리말의 고유한 언어를 찾아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었는데, 최근에 들어서 백석이나 이용악 시인들의 표현을 보면, 백석은 특히 사투리를 많이 써서, 저도 보면서 어려운 것들이 많더라구요. 그 시대적 상황에서는 사투리가 그 지역에서는 평소에 쓰는 언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 과거의 글들을 접하는 저희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하고 어렵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희덕 선생님도 나오셔서 그런데, 오늘날 글을 쓰는 데 있어서의 시적 표현이나 자연스러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들로 표현할 때는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사투리나 지방 방언들을 사용할 때 특히 시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또한 평론가 입장에서나 기존 시를 쓰는 입장에서 사투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구요. 오늘의 현실에서 방송 매체가 굉장히 발달해서 지방 어투가 특별히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 없는데, 대부분 표준어를 구사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기 때문에, 현재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지금 시점에서 보는 관점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나 :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셔서 무엇부터 대답을 해야 될는지 모르겠는데, 먼저, 방언이 시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제가 시인으로서 아쉬운 점 중의 하나가 충청도 논산이 고향인데, 열 살 때 서울에 왔습니다. 지금 문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제가 한 5년만 더 고향에 있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그러면 제가 고향에서 느낀 것이 명료해지고 더 구체적인 형상을 가졌을텐데, 그리고 제 언어에도 훨씬 더 지방적인 색채가 독특한 개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작가가 다 방언을 써야 될 필요는 없지만, 때로 방언에 대한 줄기찬 탐구와 그것을 살려내려고 하는, 예를 들면 이문구 선생이라든가 얼마 전에 새로 전집이 나온 작고한 김소진 소설가처럼, 시인 중에도 향토적인 부분을 잘 살려쓴 시인들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방언적인 것을 잘 살려쓰는 현대 시인들이 소설에 비해서 적은 것 같습니다. 방언은 사라져가는 말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풍요로운 질감과 표준어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일상적으로 편안하게 쓰려고 하고 대중화시키려고 하면서, 방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향취를 너무 빨리 빼앗아버리고 표준화시켜버리는 것의 가장 심각한 사례를 널리 읽히는 옛날 시인들의 시집의 표기가 다 현대어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읽기가 어렵더라도 옛 표기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집들이 정확하게 출간이 되고, 밑에다가 간이 사전식으로 주를 달아서 읽게 해야지 전혀 다른 어감의 표준어나 현대어로 바꾸어놓는 행위는 상당히 비문학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풍부하게 방언적이고 풍속적인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저처럼 도시에서 주로 자라 표준화된 작가들에 비해서는 중요한 무기 하나를 더 갖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적인 표현, 시를 쓸 때 어떤 언어가 좋은 것이냐 하는 것은 한두 가지로 말할 수는 없고, 제 자신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저는 되도록이면 언어가 앞서가지 않는 것, 제가 겪고 느끼고 갖고 있는 정서적인 상태 속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것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을 부풀린다거나 장식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기피하는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제 시가 명료하고 일반인들이 읽기 쉽다고 하는 것도 그런 시작 태도나 언어에 대한 생각과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하게 난해하고 언어의 연기를 피운 내용없는 시들에 대해서는 제가 비판적이지만, 해체시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저는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한 시도 필요하지만, 언어 자체와 날것으로 맞서 싸우면서 기존의 시의 언어가 가지 못했던 길을 소통의 불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라도 넘어가보려고 하는 작품(꼭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의 언어적인 실험 노력은 전통적인 향토어를 존속하는 것 못지 않게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 : 언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측면이 있습니다. 동일한 언어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소속감을 교환하는 면이 있고, 동일한 언어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가령 19세기에 톨스토이의 러시아 소설 같은 것을 보면, 귀족 집안에서 러시아 사람이 자기들끼리는 프랑스 말로 얘기합니다. 프랑스 말로 얘기하는 것은 자기들이 러시아의 보통 사람들보다 유식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면도 있지만, 자기들이 얘기할 때에 하인들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끼리 만나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다른 지역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이것은 우리끼리 통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남이니까 듣지 말아라 라는 식으로 언어에는 배제의 원리와 동시에 동일한 언어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 확인이라는 두 가지 면이 있는 겁니다. 사실 표준말을 만들어서 방언을 배제한다는 것 자체가 중대한 언어권 침해입니다. 서울 중류계급이 말하는 것을 표준말로 한다는 것은 사실 언어도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말을 강행한 것은 근대 국가에서 지배층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지배를 공고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제국주의적 소산입니다. 사실은 경상도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이 우리는 우리말을 지키고 표준말을 안 쓰겠다고 거부운동을 하더라도 막을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익숙해지고 세뇌가 돼서 같은 대한민국 사람끼리 같은 말을 써야 한다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사실은 부당한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읽었지만, 진달래꽃이 뭔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참꽃이라고 하지 진달래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배운 최초의 생물학 교육은 참꽃은 먹어도 좋다, 하지만 철쭉꽃은 먹으면 큰일나니까 먹지 말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진달래라고 해서 이것이 무엇인가, 이북에나 있는 꽃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게 참꽃이었습니다. 왜 꼭 진달래꽃이라고 써야 합니까. 아까 오랑캐꽃 얘기도 나왔지만, 지금 우리 나라 표준말로는 오랑캐꽃이 제비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제 고향에서는 오랑캐꽃을 앉은뱅이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앉은뱅이꽃은 채송화에 대해서나 멈둘레꽃에 대해서 그렇게 부르는 곳이 있을 정도로 다 제각각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각자가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인데, 근대 국가에서 하나의 편의적 발상으로 표준말을 쓰게 하는 것입니다. 백석이 시를 쓸 때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 표준말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확고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고, 표준어를 제정해서 발표하고, 동시에 문인들이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표준말을 따르기로 하자고 해서 운동을 펼쳤는데, 이것이 1930년대 초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표준말 운동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백석이 마음놓고 쓰는 것이 가능했지, 요즘은 문제가 조금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투리가 생활어이기 때문에, 생활어가 아닌 말로 대화를 해보면, 실감이 안 납니다. 김유정의 단편이나 백석의 시나 경상도 지방의 생활을 다루는 얘기를 보면 그 지역의 말로 대화를 다루고 있어서 실감이 나는 겁니다. 하근찬의 소설 같은 데에서 경상도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언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잘 고려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방식으로 써야 되느냐에 대해서는 문학에서 보편적인 원리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 계제가 있는 것이니까 그 계제에 적합한 언어로 써야 되는 것입니다. 경상도 사람들의 생활을 다루려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장면을 다뤄야 실감이 나지, 표준말로 번역해서 쓰면 엉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를 읽다가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할 때 사전을 갖고 공부합니다. 그런데 표준말에서 조금 일탈되었다고 해서 어렵다고 하는데, 사실 조금만 사전 찾아보면 됩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사전을 안 찾아봅니다. 자습서에 설명이 다 나와 있는 것에 길들여져서 사전 찾는 법을 모릅니다. 사전 찾아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론은 성립이 안되고, 어떤 작품을 쓰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서울의 경박한 아이들의 생활을 그리려면 외래어가 많이 나와야 되고 요즘의 인터넷 사용도 나와야 되지만, 옛날 사람들의 생활을 그리려면 그 지방의 사투리를 써야 실감 있는 장면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계제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질문자 4 : 윤영천 선생님께 한 가지 여쭤보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도중에, 홍종인 시인과 김상운 시인에 대한 얘기를 하셨는데, 저희가 단지 그들이 북으로 갔다는 이유로 인해서, 시대적인 차이와 이데올로기 장벽에 의해서 그런 시인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시인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작품이 많이 소개되지 않은 시인들, 북한에 있는 시인들 중에 주목해봐야 할 시인들이 있으면 간단히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윤 : 1988년에 월북작가 120명이 해금될 때, 명단 속에 있는 상당수 작가들은 이미 문단에서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 꽤 알려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김상운 같은 시인들은 다 알고 있는 시인들입니다. 또 우리가 이렇게 구분하기도 어렵고 구분해서도 안 되지만, 명망가 시인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무명 시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도 사실 무명 시인이었습니다. 자기 이름 석자 내는 일에 누구보다도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좀 특이한 시인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윤동주라는 시인의 존재는 사실 1948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온 뒤에 뚜렷하게 부각되었지, 그 전에는 그 존재가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윤동주도 생전에는 무명 시인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홍종인이라는 시인도 무명 시인입니다. 월북해서 헝가리의 유명한 혁명 시인(서정성이 아주 빼어난데)의 {뻬떼피 시선집}을 번역한 것을 보고 저도 놀랐는데, {한국 유민시 선집}에 이름없는 시인들이 많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도 별반 거론이 안되고, 저로서는 그런 시인들의 작품도 잘 발굴해서 새삼스럽게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북이라는 사람은 성이 계씨이고 이름이 외자 북인지도 불분명한데, 제가 확인한 시인 숫자가 꽤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이름을 쭉 말씀드릴 처지도 못 되고, 잘 기억이 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들이 명망가 시인에만 골똘할 것이 아니고 과거에 이름없는 시인이지만, 꽤 성취도가 높은 작품을 남긴 시인들의 작품을 눈여겨봐야 하고, 결국은 저처럼 대학에서 공부하는 국문학 연구자들이 많은 노력을 해서 많은 독자들에게 시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끔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 : 아까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한국 유민시 선집}이 있다고 하셨죠.

 

윤 : {가두로 울며 헤매는 자여}라는 제목으로 한 권이 나왔는데, 그 제목은 작고하신 황순원 선생의 작품입니다. 황순원 선생은 훗날 소설을 쓰셨지만 초기에는 시를 쓰셨던 분입니다. 그 당시에 유이민 문제에 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두 권인데, 거기에서 시인들의 이름을 참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유 : 다음 주에는 한 주 휴강을 하고 다음다음 주 금요일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함께 박수)

 

. 끝.

 

 

 

 

 

원문출처http://www.kcaf.or.kr/lecture/munhak/2002/20020802_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