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및 유적답사

양주 대모산성(경기 양주시 백석읍)

윤여설 2009. 4. 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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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인 고대 산성이다.

            즉, 토성보다 조금 더 발달된 성이다. 성의 구조나 돌을 쌓은 방식으로 봐서 백제의 토성이다.

            이 지역은 한성(백제의 수도 지금의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최전방의 성격을 지닌다.

            주변의 북쪽 불곡산 정상에도 보루의 흔적이 있고, 남쪽의 호명산 정상에도 보루의 흔적이 있다.

            백제의 세력이 확장되었을 때는 임진강까지 진출한 적이 있다.

 

            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전혀 보수나 보존이 이루어지지 않고 저렇게 방치되어 있다.

            저 것이 우리 문화재 정책의 현주소이다.

            속히 보존조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양주산성 관련 홈페이지

                  http://www.yangju.go.kr/site/tour/

                  나의 홈페이지

                 http://poet.or.kr/youn

 

 

양주 대모산성은 양주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해발 212m의 대모산 정상에 있다. 분지형을 이루고 있는 대모산의 산꼭대기를 돌아가면서 돌로 성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이곳은 수락산 봉수대와 교통의 요지이자 양주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5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6세기중엽까지 고구려에 속하였고, 그 이후에는 신라 땅이 되었다. 이런 지정학적인 위치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양주 대모산성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매초성’으로 추정된다. 타원형을 이룬 성벽의 둘레는 1,400m 쯤 되며, 북쪽의 운처로 짐작되는 곳에는 성벽이 잘 남아 있지만 다른 곳은 대부분 무너졌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4~5m 안팎이나, 너비는 주변의 지세에 따라 가파른 남쪽은 6m, 완만한 북서쪽은 8m쯤 된다. 50°정도의 각도로 경사지게 들여쌓기를 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주로 이용된 것이다. 성 내부에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평지가 여러 곳 있으며, 지표에는 둥근 주춧돌 여러개가 노출되어 있고 또 주변에는 많은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상세내용

양주산성은 일명 대모산성이라고도 하며, 양주시 유양동과 백석읍 방성리에 연접하여 있다. 산성은 해발 212m인 대모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으며 유양동과 백석읍의 경계를 이룬다.

산성의 동쪽은 유양동, 동남쪽은 남방동, 남쪽은 어둔동, 북쪽은 방성리, 남서쪽은 복지리이다. 이곳은 북서 방향의 유일한 통행로인 광적면 일대를 굽어볼 수 있고, 수락산 봉수대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분지형의 작은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쌓은 이 테뫼식의 석축 산성은 그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하여 오래전부터 삼국시대의 산성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현재 산성의 둘레는 약 1.4km이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북문지 좌우측과 동편 등 3개소에 약 70~80m정도의 성벽이 대체로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성벽의 높이는 4~5m이고 기저부의 척은 약 6m이다. 성내부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지가 여러 곳이 있으며, 지표에는 원형의 초석 여러 개가 노출되어 있다고 주변에는 많은 토기편과 와편이 산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에 많이 보이는 축성 방법, 즉 성벽 밑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쌓고 성벽위쪽은 점차 작은 석재를 이용하는 양식과는 달리 고식의 성벽 축조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체성을 보수하여 성벽 기초부분으로 갈수록 점차 넓어지게 하거나 시각적으로 대단히 높게 보이게 축성하였다. 이러한 축성 방법은 주로 5~6세기 중엽의 신라성에서 많이 발견되며 아차산성, 삼년산성, 명활산성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신라의 경우 470년에 축성된 삼년산성 이래 계속 이러한 축성기법이 사용됨을 고려할 때 현존하는 성벽은 6세기 중엽 이후의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지는 모두 10여개 소가 발견되었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할석으로 조성산 기단, 초석, 적심석의 일부만 잔존한다. 유물은 대부분 건물지 내부와 추정 저장공,문지 주변에서 출토되었는데 무기류, 농기류, 마구류, 건물부재, 일반생활용구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건물지 하층의 풍화암반층 주변에서 반월형 석도나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해왔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러나 산 아래에 비옥한 평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산 정상부에 위치한 고지성 집락 형태는 원시사회로부터 고대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긴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경지 확보를 위한 투쟁과정에서 군사적 방위기능의 필요에 의하여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따라서 이 유적은 고대국가 성립의 전 단계에 있어 집단간의 갈등과 그들의 방어시설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삼국시대에 들어 양주산성을 포함한 이 일대는 5세기 중엽까지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6세기 중엽가지 고구려에 속하였고, 6세기 중반 이후는 신라의 소유가 된 지역이다. 즉 삼국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때문에 산성내에서 발견되는 유물이나 유구 역시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백제, 신라계의 유물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구려계의 유물은 비교적 희박하다.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의 유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어 이 산성이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관방시설로 이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 산성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매초성인가 하는 점이다. 실상 발굴의 목적도 삼국시대 대당전투에서 결정적인 전공을 세운 곳인 매초성의 흔적을 찾고자 함이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 남아 있는 성벽은 신라에 의하여 축성되었지만 그 이전 백제시기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요충지로 이용되었음이 밝혀진것도 이곳이 매초성지라는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