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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흔적

윤여설 2008. 5. 16. 15:37
퇴계 이황의 흔적
· 테마분류 ㅣ 역사
· 등 록 일 ㅣ 2008-01-14
· 관련자료 ㅣ 4개

옛날에 퇴계 이황 선생님의 집에서 하인 2명이서 싸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조금 다른 의견으로 티격태격하던 것이 일이 점점 커져서는 큰 소리로 싸우는 일이 생겨버렸다.

큰소리에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 나와 보신 퇴계 이황 선생님은 첫 번째 하인의 말을 들어보더니, 
“으음... 그 말이 이치에 합당하여 맞구나.” 라고 하셨고, 

그에 억울한 두 번째 하인이 자기주장을 말했다. 
다 들으신 퇴계 이황 선생님은 “으음... 그 말 또한 이치에 합당하여 맞구나.” 라고 하셨다.

그것을 옆에서 듣던 한 제자가 “선생님, 이 하인의 말도 맞고 저 하인의 말도 맞으면 도대체 어떤 것이 맞는 말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고, 
그것을 들으신 퇴계 이황 선생님은 “으음.. 그 소리 또한 맞는 말이구나.” 라고 하셨다.

위의 유명한 퇴계 이황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느 하나도 진실도, 어느 하나의 옳은 것도 존재치 않는다.’ 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 이지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이었으며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던 퇴계이황의 발자취를 정보통신부 지식자원정보관리사업으로 구축된 ' 유교넷(http://www.ugyo.net) '사이트를 통하여 더듬어 봅시다.

                                               

▶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입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정조대에는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여 서원 앞 솔나무숲과 강변에서 과거가 실시되었으며, 그 자리에 시사단(試士壇) 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1969년 5월 28일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 호계서원

조선 선조 6년(1573)에 월곡면 도곡동에 여강서원을 세워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1605년(선조38)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자 중창하였습니다.

광해군 12년(1620)에 퇴계의 큰 제자인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고, 숙종 2년(1676)에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습니다. 그러나 병호시비(屛虎是非) 사건으로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으로 각각 위패를 옮김으로써 지금은 강당만 남게 되었습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3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입니다. 평면상으로는 一자집인데, 지붕의 양쪽 끝이 정면을 보고 있는 ㄷ자형의 매우 특이한 형태입니다. 가운데는 마루 이고 양쪽은 방이며 해마다 1번씩의 당회가 이곳에서 열립니다. 현재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각각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퇴계종택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종택으로, 1982년 12월 1일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의 가옥은 구한말 일본헌병들이 의병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불을 질러 전소되어 없어졌으며, 지금의 가옥은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종종택의 크기는 총 34칸으로 ㅁ자형이며, 전체 면적은 2,119㎡이다. 종택 오른쪽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 퇴계태실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조선 단종 2년(1454) 퇴계의 할아버지인 이계양 선생이 세웠는데, 뒷날 몸채의 중앙에 돌출된 방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고 하여 퇴계 태실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몸채는 ㅁ자형으로 중앙에 퇴계태실이 있고 몸채 동쪽에는 별당형 정자인 노송정(老松亭)이 있다. 집 전체는 노송정종택이라고도 부릅니다.

전체적으로는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풍모를 지니면서 태실과 같은 특이한 방을 두고 있는 집입니다.

▶ 퇴계묘소   

 퇴계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 가량 떨어진 토계동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습니다.

퇴계의 유언에 따라 묘비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써있고, 뒷면에는 선생의 자명과 문인 기고봉이 지은 묘갈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석은 통상 비석을 배치하는 방법과 달리 특이하게 동쪽을 등에 지고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비석의 윗부분에는 좌우대칭의 구름무늬 한가운데 앞면에는 태양이, 뒷면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비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06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국가지식포털에서 옮겨옴>